[7.27 특집] ① 정전협상 과정과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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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 특집] ① 정전협상 과정과 특징
  • 주권연구소
  • 승인 2023.07.1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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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 27일은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반도는 지금도 정전 체제에 있으며 전쟁 위기가 상존한다. 정전협정이 어떻게 체결되었고 또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이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무엇이고 또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여 이 땅에 평화가 깃들게 하는 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주권연구소] 

1. 정전협상을 제안하기까지

1950년 시작된 한국전쟁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애초의 경계선이었던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고착 국면에 들어갔다. 소모전이 길어지면서 전쟁 당사자와 유관국들은 군사적 방법이 아닌 정치적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부터 휴전 혹은 정전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1950년 9월 16일 해리슨 매슈스 미 국무부 차관보는 국무부 대외군사문제 및 원조 담당 특별보좌관 제임스 번스 소장에게 북한의 휴전 제의에 대비한 휴전 구상 지침을 사령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1급 비밀문서를 보냈다. (김명기, 『한반도평화조약의 체결』, 국제법출판사, 1994, 40~41쪽.) 

미국은 전황이 불리해진 북한이 먼저 휴전 제의를 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북한은 후퇴 과정에서 반격을 준비했을 뿐 휴전 제의는 하지 않았다. 

김일성 주석은 전쟁 초기 낙동강까지 진격한 것을 전쟁 제1계단으로, 후퇴 시기를 전쟁 제2계단으로 구분하고 제2계단 전략적 방침을 제시했다. 1950년 9월 25일 북한군 최고사령부 작전회의와 27일 도당위원장협의회에서 제시한 전략적 방침은 “현 계단에 있어서 우리 당의 전략적 방침은 적들의 진공 속도를 최대한으로 지연시키면서 시간을 쟁취하여 인민군 주력부대들을 구출하고 새로운 후비 부대들을 편성하여 강력한 반공격 집단을 형성하며 계획적인 후퇴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김일성전집 12』, 조선노동당출판사, 1995, 323쪽.)

김일성 주석은 후퇴가 곧 패배는 아니며, 후퇴 기간을 반격 준비를 위한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휴전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김일성 주석이 이런 판단을 한 것은 유엔군의 포위에 약점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유엔군의 포위가 형식에 불과하고 그 범위가 넓어 실제로는 서울 동쪽부터 전선 동부까지 빈 공간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기본 전선인 낙동강 전선과 상륙지점인 인천의 거리가 멀어 여기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리준항·김정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조국해방전쟁령도사 2』, 사회과학출판사, 2013, 9쪽.)

1950년 10월 1일 한국군 3사단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감행했다. (훗날 한국 정부는 이를 기념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했다.)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은 여러 논란을 낳았다. 그리고 이 논란은 한국전쟁의 성격, 그리고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한미의 시각을 보여주었다. 

한미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불법 남침’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북한의 ‘침략’을 무찔러 38선 이북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으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이런 미국의 관점을 수용해 6월 25일 결의문 제82호에서 “북한 당국이 그 군대를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27일 결의문 제83호에서도 “무력 공격의 격퇴”를 명시하였다. 즉, 38선 이남에 넘어온 북한군을 ‘격퇴’하는 게 유엔 안보리의 결정이었다. 

이런 논리와 시각에 따르면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는 것은 북한을 ‘침략’하는 것으로 된다. 그런데 한국군은 그것을 감행하였다. 물론 한국군의 독자적인 판단이 아닌 유엔군, 더 정확히는 미군의 지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낙동강까지 후퇴를 거듭하던 7월 중순에 이미 38선 너머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딘 애치슨 국무부 장관, 존 덜레스, 딘 러스크 국무부 동아태차관보 등은 미국이 한반도를 무력 통일해 친미·반소 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9월 1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는 것을 허용하는 지침을 완성했고 11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서명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였고 북쪽으로 진격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27일 중국이나 소련의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성공이 확실하다면 북한 전역을 돌파하라고 맥아더 사령관에게 지시했다. (Walter LaFeber,『America, Russia, and the Cold War, 1945-1996』 8th ed., McGraw-Hill, 1997,  113~114쪽)

10월 2일 맥아더 사령관은 전 부대에 38선 돌파 명령을 하달했다. 이는 명백히 유엔 안보리 결의문의 내용을 넘어선 것이었다. 미국은 뒤늦게 유엔에 추가 승인을 요구했고 10월 7일에야 유엔은 총회 결의 376(V)를 하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한반도 전체에 걸쳐 안정상태를 확보하기 위해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으로 38선 북진 승인 여부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남았다. 

유엔 총회 결의 376(V). [출처: 유엔]

유엔군의 북진은 중국을 자극했다.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는 10월 3일 주중 인도대사 카발람 파니카와 면담을 하고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중국은 전쟁에 개입하겠다’는 내용을 미국에 전달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계속했다. 결국 10월 16일 밤 중국군 제42군 124사단 370연대가 샤오젠페이 부사단장의 인솔 아래 압록강을 넘어 북한 영내 30km 남짓까지 진입했다. (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252·264쪽.)

그러나 당시 맥아더 사령관은 전황을 오판하고 있었다.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열린 트루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맥아더 사령관은 중국의 참전 가능성에 대해 “개입의 공산은 극히 적다. …중략… 그들은 공군이 없기 때문에 만일 평양을 확보하기 위해 남하할 경우에는 사상 최대의 섬멸전에 의해 희생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고 “11월 23일의 추수감사절까지는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마스 때까지 제8군을 일본으로 복귀시키고 싶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이런 판단 아래 맥아더 사령관은 10월 24일 “전 병력을 투입해 최대한 빨리 압록강과 두만강 선까지 진격”하라는 이른바 ‘추수감사절 공세’를 개시했다.

웨이크섬에서 만난 트루먼과 맥아더.
웨이크섬에서 만난 트루먼과 맥아더.

한편 같은 날 김일성 주석은 반격 준비가 일정하게 갖추어졌다고 판단하고 북한군 최고사령부 작전회의에서 전쟁 제3계단을 선포하여 “빠른 시일 내에 재진격으로 넘어가 공화국 북반부에 침입한 적들을 38도선 이남으로 구축하면서[쫓아내면서] 적의 역량을 부단히 소멸 약화시키는 한편 전쟁의 종국적 승리를 위한 모든 준비를 튼튼히 갖출 데 대한 (새로운) 전략적 방침”을 제시하였다. (『김일성전집 13』, 조선노동당출판사, 1995, 20쪽.)

김일성 주석은 당시 상황이 북한군 측에 유리하고 유엔군 측에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분석하였다고 한다. (리준항·김정철, 앞의 책, 86~88쪽.)

일단 북한군은 김일성 주석의 조처에 따라 후퇴 기간 병사, 사관, 군관을 과감히 등용하여 각급 군관학교에서 단기 강습으로 장교를 양성하고, 새로 조직한 예비부대를 후퇴해 들어간 북한군 연합부대에 편입시켜 주력부대를 급속히 확대하며 또 군수 생산도 확대하였다. 또한 전쟁을 통해 군인들이 김일성 주석의 독자적인 전법을 익히고 단련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중국인민지원군까지 참전하여 도움을 주었다. 

반면 유엔군은 속전속결을 서두르며 전선 서부와 동부로 나뉜 2개 공격집단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연계가 제대로 되지 않고 수송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미8군과 미10군단이 맥아더 사령관의 지휘 아래 독립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협동 과정에서 혼란이 많았다. 또 깊은 산악지대에서 엄동설한을 맞아야 하는데 이는 유엔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여기에 북한군 제2전선부대와 주민들이 직접 무장한 인민유격대가 후방에서 계속 유엔군을 공격했다. 

이런 상황 판단 아래 김일성 주석은 총반격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은 10월 25일부터 전쟁 제3계단 제1차 작전을 시작할 것을 명령했다. 그 결과 유엔군의 추수감사절 공세는 막대한 피해로 끝이 났다. 한국군 제6사단과 미군 제8기병연대는 부대가 와해하였으며, 한국군 제1·8사단, 미군 제1기병사단도 큰 타격을 입었다. (강경표 외, 『한권으로 읽는 6.25 전쟁사』, 진영사, 2012, 211·226·227쪽.)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은 여전히 전황을 낙관하고 11월 24일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Home by Christmas)’ 작전을 명령했다.

김일성 주석은 이에 대비해 11월 17일 북한군 제2군단장에게 전쟁 제3계단 제2차 작전 방침을 명령했다. 김일성 주석은 “앞으로 진행할 작전에서 우리는 주 타격 방향을 전선 서부에 두고 전반적 전선에서 반공격으로 넘어가며 주력부대들과 적 후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2전선 부대들과의 배합 작전을 적극 벌여 적의 기본집단들을 청천강, 장진호반, 함흥, 청진 일대에서 포위 소멸하고 공화국 북반부의 전 지역을 적의 강점으로부터 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투성과를 38도선 이남으로 계속 확대하여 전쟁의 종국적 승리를 촉진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본 작전적 방침입니다”라고 하였다. (『김일성전집 12』, ―, 418쪽.)

이에 따라 크리스마스 공세 바로 다음 날 북한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이 총반격에 돌입하면서 유엔군은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 한국군 제7사단은 덕천지역에서, 제2군단은 청천강에서 붕괴했다. 터키여단은 3분의 1 이상의 병력 손실을 보았다. 미군 제8군단은 심각한 붕괴 위기에 휩싸였고, 제2사단은 3천여 명의 사상자와 대부분 장비를 상실하여 완전히 와해하였으며 사단장은 직위에서 해제됐다. 특히 장진호 철수 과정에서 미 제1해병사단은 2·3중 포위를 당해 8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전쟁’이라 부를 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강경표 외, 위의 책, 231~239쪽.)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결국 맥아더 사령관은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 철수를 승인했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했으며, 연말에는 38선까지 후퇴했다. 동부전선은 퇴로가 차단돼 미10군단과 기타 패잔 부대들이 흥남항에서 해상으로 철수했다.


2. 미국의 요청으로 정전협상을 제안하다

두 차례 대공세가 실패로 끝나자 1950년 12월 14일 유엔 총회 결의 384(V)는 “한국에서 원만한 정화(cease-fire)가 이뤄질 수 있는 근거를 결정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권고를 이행하기 위해 총회 의장을 포함한 3명의 그룹을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나스르알라 엔테잠 미국 주재 이란 대사 겸 유엔총회 의장, 레스터 피어슨 캐나다 외교부 장관, 베네갈 라우 유엔 주재 인도 대표 겸 유엔 안보리 의장이 정화 3인단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과 교섭에 실패했다.

유엔 총회 결의 384(V). [출처: 유엔]
유엔 총회 결의 384(V). [출처: 유엔]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까지 북한에 내주며 후퇴를 거듭했다. 3월 14일 유엔군이 서울을 재탈환하기 이틀 전인 12일 미8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는 “38도선에서 휴전이 된다면 유엔군의 대승리”라고 이야기하였다. 이는 38선 이북으로 재진격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38선 부근에서 유엔군과 북한군 양측 모두 진격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전선은 고착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 김일성 주석은 전쟁 제4계단 전략적 방침을 제시하였다. 1951년 5월 30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 등에서 김일성 주석은 “오늘 우리 앞에 나선 선차적 임무는 전선을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미제의 대규모적인 무력 증강 책동에 의하여 조국해방전쟁이 장기성을 띠게 된 조건에서 완강한 진지 방어전을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김일성전집 14』, 조선노동당출판사, 1996, 64쪽.) 즉, 김일성 주석의 구상은 ‘튼튼한 방어진지를 만들어 현 전선을 지키면서 상대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한편 군대와 후방을 강화해 전쟁의 종국적 승리를 위한 조건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편 미국은 막대한 피해로 인해 난감한 처지에 있었다. 정전협상이 개시되기 직전인 1951년 6월까지 미국은 7만 8,800명의 인명 손실, 100억 달러를 상회하는 전쟁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이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첫 1년 동안 입은 손실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도 전쟁 승리의 전망이 보이지 않고, 미국 내 여론도 부정적이었다. (김상원 외, 『휴전회담 개막과 고지쟁탈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28쪽.) 정전협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1951년 6월 들어 미국은 본격적으로 소련과 물밑 접촉을 시도한다. 6월 1일과 5일 전직 소련 주재 미국 대사였던 조지 케넌은 야코프 말리크 유엔 주재 소련 대사를 만나 정전에 대해 논의했다. 그 결과 형식적으로는 전쟁 당사국이 아니었던 소련이 먼저 정전협상을 제안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김상원 외, 『휴전회담 개막과 고지쟁탈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32쪽.) 

이처럼 협상 제안을 복잡하게 가져간 이유는 정전협상을 먼저 제안한 측이 ‘패배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전쟁에 불리하니 정전협상을 제안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길 것을 우려한 미국은 북한이 먼저 정전협상을 제안해 자신이 ‘승리자’로 인식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북한은 이런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정전 담판을 먼저 제기하겠는가, 우리는 그 어떤 장기전도 할 수 있으며 적들의 온갖 군사적 모험을 철저히 짓부숴버릴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리준항,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조국해방전쟁령도사 3』, 사회과학출판사, 2013, 95쪽.)

1951년 6월 16일 트뤼그베 리 유엔사무총장이 휴전을 보장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23일에는 말리크 대사가 라디오 방송 연설을 통해 휴전을 암시했으며, 27일에는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차관이 휴전을 제안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6월 30일 리지웨이 사령관은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안했고, 7월 1일 김일성 주석과 펑더화이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 공동명의로 동의를 표했다.

김일성 주석은 6월 30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 결론 「미제의 정전담판 제의에 대한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의 립장」과 7월 초 내각 전원회의 등에서 정전협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제시하였다. 김일성 주석은 ‘미국이 정전협상을 제의한 것은 패전을 인정한 것이며 정전 기간에 외국군대 철거를 요구할 수 있고 통일의 조건을 성숙시킬 수 있어 협상은 나쁘지 않다’라는 취지로 설명하였다. (리준항, 앞의 책, 96쪽.)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런 움직임을 격렬히 반대했다. 이 대통령은 정전논의가 본격화되기 전인 1951년 3월 24일 중국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에도 38선 휴전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에는 그로미코 차관의 휴전 제안 성명을 거부하였다.

결국 유엔군과 북한군, 중국 인민지원군은 한국 정부를 배제한 채 7월 8일 개성 북쪽 래봉장에서 예비회담을 열고 곧바로 10일 본회담을 개최했다. 본회담에는 터너 조이 미 극동 해군 사령관, 헨리 호데스 미8군 참모부장, 로런스 크레이기 미 극동 공군 부사령관, 알리 버크 극동 해군 참모부장, 백선엽 한국군 제1군단장이 유엔 측 대표로, 남일 대장(수석대표), 이상조 소장, 장평산 소장이 북한군 대표로, 덩화 중장, 세팡 소장이 중국 인민지원군 대표로 참석했다.

최초의 정전협상이 진행된 래봉장.
최초의 정전협상이 진행된 래봉장.

유엔군이 북한, 중국 인민지원군과 정전회담을 개최하기로 한 과정은 전적으로 미국의 판단 아래 이루어졌다. 트뤼그베 리 사무총장은 “미국은 유엔 총회나 안보리의 추가적인 허가나 지침 없이 정전이나 휴전협정을 체결할 권리를 갖는다”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이상철, 「한반도 정전체제와 유엔사의 위상」, 가우리학문공동체, 2004.12.4.) 이는 사실상 미군이 유엔군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으며 유엔은 방관자 혹은 미국의 대리인이었음을 보여준다.

 

◆ 748일간 진행된 정전협상 

정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에 시작해서 1953년 7월 27일에 끝났다. 장장 748일을 진행한 것이다. 전체 전쟁 기간의 3분의 2가 회담 기간인 셈이다. 이 기간에 총 159회의 본회담과 765회의 각종 회담이 있었다. 회담이 이토록 오래 걸린 이유는 여러 쟁점과 고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특히 두 차례의 큰 고비가 있었는데 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3. 첫 번째 고비 : 군사분계선

1951년 7월 10일 유엔과 북한은 의제 선정을 위한 첫 예비 협상에 돌입했다. 

첫 협상에서 유엔군은 ▲구체적 의제 채택 ▲국제적십자사 대표 포로수용소 방문 ▲한반도 내 순수한 군사 문제 토의 ▲한반도 무력 행위 재발 방지를 위한 세부 사항 토의 ▲군사분계선 내 비무장지대 설정 ▲적대행위 방지와 감시를 위한 군사정전위원회 구성 ▲군사정전위원회의 한반도 내 감시 수행 ▲감시행위를 위한 군사감시단 구성과 기능 설정 ▲전쟁포로에 관한 협정 등 9개 항을 제시했다. 

북한군은 ▲구체적 의제 채택 ▲38선을 중심으로 군사분계선 설정 및 10km 비무장지대 설치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 철수 ▲전쟁포로에 관한 협정 등 5개 항을 제시했다.

첫 협상의 쟁점은 군사분계선 설정, 외국군 철수, 국제적십자사 대표의 포로수용소 방문 문제였다. 논란 끝에 양측은 7월 26일 ▲의제 채택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분계선 설정 ▲정전이행 감시를 위한 위원회 설치 ▲포로교환 문제 ▲외국 군대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관계국 간의 정치협상 개최 권고 등 5개 항의 의제를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곧바로 군사분계선 문제부터 협상에 들어갔다. 유엔군은 유엔군이 우세에 있는 공군력과 해군력을 감안하여,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현 전선의 위치에서 더 북쪽으로 물러난 선에서 군사분계선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북한군은 지상군 대치선과 유사하며 전쟁 전의 경계선이었던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여 이 선을 따라 남북으로 폭 10km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할 것을 주장했다. (김선숙, 「한국전쟁의 휴전협상과정에 관한 연구」, 『21세기정치학회보』 2002년 12권 2호, 2002. 70쪽.)

양측이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협상에 진전이 없자 미국은 8월 중순부터 무력 대응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전황 보고에 따르면 8월 17일부터 동부전선에서 감제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진지는 반복적으로 주인이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중폭격기가 거의 매일 나진항에 출격해 조차장과 철도차량에 3,417발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8월 16일부터 31일 사이에 심리전 전단을 4천만 장 가까이 뿌리기도 했다. (미 해외참전용사협회, 박동찬·이주영 역, 『한국전쟁 1』, 눈빛, 2010, 483쪽.)

9월 들어 유엔군은 추계공세를 시작했다. 추계공세의 핵심은 강원 양구 1211고지 전투였는데 이 고지를 점령하면 유엔군은 원산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유엔군이 전선 서부에 무력을 증강하지만 이를 위장전술로 판단하고 부대를 전선 동부로 집중시켰다. 그리고 산이 많은 실정에 맞게 직사포를 고지에 끌어올려 효율성을 높이도록 하였으며 포를 집중적으로 배치해 기존의 2배 이상 늘렸다. 

특히 김일성 주석은 1211고지 방어에 큰 힘을 쏟았다. 최고사령부 작전실과 1211고지 방어부대와 직통전화선을 가설하고 무선통신망도 갖출 정도였다. 김일성 주석은 9월 23일 아침 1211고지에 잇닿은 1237.3고지에 올라 1211고지 방어를 맡은 북한은 제256군부대 지휘관과 담화하고 격려하였다. 26일 밤에는 제256군부대가 속한 북한군 제2군단의 최현 군단장에 전화로 후방 지원을 잘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리준항,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조국해방전쟁령도사 3』, 사회과학출판사, 2013, 40~45쪽.)

1211고지 전투 장면.
1211고지 방어부대 병사들.
1211고지 방어부대 병사들.

9월 5일부터 16일까지 한국군 제5사단 27연대가 3차에 걸쳐 1211고지를 공격하여 한 차례 점령하기도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17일부터는 35, 36연대가 41일간 8차에 걸쳐 공격했으나 끝내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고 이후 다른 부대들도 끝내 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북한 자료에 따르면 10월 20일까지 유엔군이 130여 회 공격을 되풀이했으나 8천여 전사자를 남긴 채 철수했다고 한다. (육군본부, 『전장사례연구 3』, 육군본부, 1987.)

특히 미국은 하계, 추계 공세 기간 핵무기 사용을 적극 검토했으며, 비밀 해제된 미 육군 문서에 따르면 1950년 8월 중순에 이미 핵무기를 한국 전장에 배치했고, 1951년 9~10월에는 B-29 전략폭격기들이 평양 상공을 비행하면서 모형 핵폭탄을 투하하기도 하였다. (「미, 1951년 9, 10월 평양상공 모의원폭 투하」, 연합뉴스, 2010.10.10.)

유엔군의 하계, 추계 공세가 실패하자 정전협상이 재개됐고 유엔군 측은 현 접촉선보다 북쪽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자는 주장을 철회하고 대신 개성을 유엔군에 반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북한군도 38선 안을 철회하였으나 개성 반환은 거부하였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은 물론 미국 내의 여론도 정전협상을 빨리 진행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결국 유엔군은 개성 반환 요구를 접어야 했다. 

결국 11월 17일 분과위원회에서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를 합의하고 1952년 1월 27일 본회의에서 최종 타결했다. 최종 타결안은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며, 각각 2km씩 철수하여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며, 30일 이내에 정전협정이 조인되지 않을 경우 접촉선에서 발생한 변화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수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군사분계선 문제가 해결된 후 정전이행 감시를 위한 위원회 설치, 외국 군대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관계국 간의 정치협상 개최 권고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상대적으로 원만히 해결됐다. 정전이행 문제는 1952년 1월 27일부터 논의되었는데 5월 2일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로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정치협상 권고는 1952년 2월 19일 양측 군사령관은 관계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이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2. 두 번째 고비 : 포로교환

복잡한 문제가 모두 해결되고 마지막 남은 의제는 포로교환 문제였다. 포로교환 문제는 큰 어려움 없이 합의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 자 제네바협약(제3협약)(Geneva Convention Relating to the Treatment of the Prisoners of War of  August 12, 1949) 제118조는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한 후 지체 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하였다. 미국은 1951년 중반 이 협약을 비준했다. 따라서 포로교환 문제는 양측이 모든 포로를 송환하면 끝나는 단순한 문제였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이 문제에 정전회담 혹은 평화회담 사상 유례없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포로교환 문제가 복잡해진 이유는 미국이 포로송환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미 육군 심리전 참모 로버트 매클루어 준장은 1951년 7월 5일 “미국은 이제까지 공산권을 상대로 자유세계로 망명해 오라고 심리전을 전개해 왔는데 공산군 포로를 강제 송환시키면 앞으로 누가 망명하려고 하겠는가?”라는 주장을 하며 ‘자발적 송환’ 원칙을 세우고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를 대만으로, 북한군 포로를 남한으로 보내자고 제의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 역시 유엔군이 장악한 포로의 수가 훨씬 많기 때문에 포로 전체를 교환하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했다. 유엔군 측 포로는 13만 명이 넘지만, 북한군 측 포로는 1만 명을 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김학준, 『한국전쟁』, 전영사, 2010, 336~337쪽과 342~343쪽.)

1952년 1월 유엔군은 포로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자발적 송환의 원칙을 제시했다. 유엔군은 제네바협약이 포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한 것이지 출신 국가의 권리를 부여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북한군은 제네바협약에 따라 전체 대 전체 방식으로 교환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유엔 내에서마저 제네바협약에 대한 해석상의 논란이 벌어지면서 여러 나라들이 다양한 중재안을 내놨지만 포로교환 문제는 해법을 찾지 못한 채 협상은 지지부진한 상황이 되었다.

이 와중에 미국 대선 시기가 다가왔다. 한국전쟁이 지지부진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의 인기는 급락했고 급기야 1952년 3월 29일 재선 포기 선언까지 하였다. 이에 반해 공화당은 2차 대전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을 영입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선거 출마를 결심하고 5월 초 나토 최고사령관직을 사임했으며 그 후임에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을 임명했다. 이 바람에 유엔군 총사령관이 미8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로 바뀌었고 덩달아 협상 대표도 윌리엄 해리슨으로 바뀌었다.

클라크 사령관(왼쪽)
클라크 사령관(왼쪽)

클라크 사령관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서 이기는 길은, 하나도 힘이요 둘도 힘이며 셋도 힘이다”라며 협상이 지지부진하면 힘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유엔군은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고 해리슨은 부임 후 첫 협상에서 일방적 휴회 선언을 하고 퇴장해 버렸다. 클라크 사령관은 6월 23일 압록강 주변 수력발전 시설을 집중적으로 공습하기 시작했다. 사흘 동안 1,400회 이상 출격하여 수풍댐을 비롯한 10개 이상의 발전소를 공격하였다. 8월에는 1,254차례에 걸쳐 평양을 비롯한 주민 밀집 지역을 폭격했다. (김선숙, 앞의 글, 90쪽.)

그러나 북한군의 양보를 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9월 29일 클라크 사령관은 “공산군의 사기는 결코 떨어지지 않았고, ‘뛰어난, 극도로 잘 조직된 방어적 위치’를 차지한 채, 충분한 병참 지원을 받고 있으며 군사력이 월등히 우세한 형편이다”라고 평가했다. 결국 10월 8일 유엔군은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고 퇴장했으며 이때부터 반년 동안 협상은 열리지 않았다. (김학준, 앞의 책, 351~354쪽.)

1952년 11월 4일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12월 4일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해 전황을 둘러본 뒤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새로운 공세를 준비했다.

미국에 새 정권이 들어서고 신공세를 준비하고 있음을 파악한 북한은 이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김일성 주석은 당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결론에서 ‘전투준비를 더욱 철저히 갖춰 신공세 기도를 앞질러 분쇄해 전쟁 승리의 전환적 계기를 마련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맞게 해안 방어 능력을 강화하고, 부대 배치를 새로 하며, 병종 간 협동작전을 개선하고, 훈련을 강화하며, 현대전에 맞게 군수물자 생산을 늘리는 등 다양한 조처를 하였다. 

철원 근방을 돌아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
철원 근방을 돌아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전투는 1953년 1월 25일 강원도 철원 역곡천 부근 T자형 고지 꼭대기의 감자고지(spud hill)에서 진행된 ‘스맥 작전(SMACK operation)’이었다. 미군은 폭격기, 탱크, 보병, 포병을 결합한 일종의 시범 전투를 준비하였다. 동맹국 고관들과 기자들까지 초청했으며, 전투 시나리오가 담긴 컬러 팸플릿도 나눠주었다. 새로운 방식의 성공적인 전투 작전을 홍보하여 동맹국들에 더 많은 군사 지원을 요구할 구상이었던 것이다.

폭탄과 네이팜탄을 먼저 쏟아부은 다음 탱크와 포사격을 퍼붓고 난 뒤 미 7사단 31보병연대가 고지를 향해 진격했다. 공군은 112톤의 폭탄을 투하했고, 탱크는 7만 7천 발의 포탄을 발사했으며, 포병은 11만 2천 발의 포를 발사했다. 4,500발의 박격포와 5만 발의 기관총알, 650개의 수류탄이 날아갔다. 그러나 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후퇴하였다. 기자들은 정부 고관들을 초청해 놓고 참패한 전투에 대해 혹평하였다.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6, 385~389쪽.)

북한은 이 고지가 T자형으로 생겼다고 하여 정형(丁形)고지 전투라 부른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전투 하루 전날인 1월 24일 오후 5시에 급보를 받고 최고사령부 예비 포병부대를 급히 파견해 유엔군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집중포화를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부대는 밤새워 기동해 새벽 4시까지 전투 준비를 마치고 미군이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 위치를 노출한 시점에 일제 포사격을 가해 치명타를 주었다. (리준항, 앞의 책, 386~388쪽.)

T자형 고지.
T자형 고지.

유엔군의 1월 공세가 무산되자 유엔군은 결국 4월 26일 정전협상을 재개했다.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쟁점이었는데, 북한은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6개월 동안 소속 국가와 면담하는 안을 제시했다. 이에 유엔군은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 전원은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인계하며, 그러나 남한지역 출신 포로들은 정전과 동시에 북한지역이든 남한지역이든 그들이 갈 곳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와 함께 일반인의 신분으로 석방되도록 한다’는 제안을 했고 북한은 이를 강력히 거부하였다. (김선숙, 앞의 글, 2001, 93~94쪽.)

북한은 유엔군을 굴복시키기 위해 1953년 5월 13일~7월 27일에 걸쳐 3차례 공세를 펼쳤다. 이 과정은 클라크 사령관의 전황 보고에 잘 나와 있다.

클라크 사령관은 “5월 후반부 2주 동안 적 중대들과 대대들의 맹렬한 공격은 1953년에 들어 지금까지 치러진 지상 전투 중 가장 격렬했으며, 병력이 적었던 몇몇 유엔군 전초진지들을 상실하는 결과로 끝났다”, “5월에 시작된 격렬한 지상전은 6월에 더 격화되었다. 중대 규모로부터 사단 규모에 이르는 공산군 병력이 유엔군의 전초진지들과 주저항선 진지들에 대해 104번이나 강하게 몰아쳤다”, “(공산군이) 24시간 동안 전선 너머로 퍼부은 폭탄 수가 131,800발이라는 새로운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7월 하반기에) 중대에서 사단 규모에 이르는 공산군 병력은 중부 전선에 연한 유엔군 전초진지와 주저항선 지지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였다. 그 전선의 서부지구에서 유엔군은 중대 혹은 그보다 큰 규모의 적 공격으로 다섯 번의 전투를 치렀고, 중앙지구에서 스무 번, 동부지구에서 세 번의 전투를 치렀다”라고 보고했다. (미 해외참전용사협회, 앞의 책, 739~743쪽.)

특히 7월 13일~20일 사이의 중부 전선 금성전투에서 유엔군은 5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주요 고지를 빼앗기는 등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위키백과 ‘금성전투’ 항목.)

금성전투 장면.
금성전투 장면.

북한군의 공세가 이어지는 동안 협상이 이어졌고 여기서 유엔군은 남한지역 출신 포로들에 대한 자유송환 입장을 철회하고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포로 관리를 맡기자는 북한군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포로 면담 기간을 6개월에서 90일로 단축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크게 반발하면서 6월 18~19일 이른바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당황한 미국은 한국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려는 ‘에버레디(Everready)’ 작전계획을 세웠다가 방위조약을 체결해 주면서 달래는 선으로 마무리했다. 

이승만의 포로 석방 사건은 명백한 유엔군 관리 책임이었기에 북한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고 미국의 협상을 더 수세에 빠지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군은 정전협정에 조인하면서 장장 748일에 걸친 협상을 마무리하고 전투를 중지하게 되었다.

협상의 전 과정을 보면 유엔군과 북한군 모두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쟁은 외교의 연장”이라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결국 정전협상의 결과는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누구의 군사력이 더 우세한가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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