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특집] 평화협정을 누가 가로막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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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 특집] 평화협정을 누가 가로막았나
  • 박명훈 주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23.07.26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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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 27일은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반도는 지금도 정전 체제에 있으며 전쟁 위기가 상존한다. 정전협정이 어떻게 체결되었고 또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이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무엇이고 또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여 이 땅에 평화가 깃들게 하는 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에 주권연구소는 7.27 특집을 준비하였다. 

▲ 2013년 7월 27일, 전쟁반대평화실현국민행동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으로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노동과세계}

1. 평화가 아닌 전쟁 상태 유지 강조한 미국

정전협정 체결 70년째인 올해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 상태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전쟁은 멈췄지만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수 있는 일촉즉발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통일부는 2021년에 펴낸 『한반도 평화 이해』에서 한반도는 “아직도 여전히 미완의 평화 지대로 존속하고 있다”라면서 “전쟁 위험이 여전히 존재하는 분단된 한반도를 조망할 때 평화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고 할 수 있다”라고 짚었다.

이와 관련해 “한반도 평화와 관련한 문제는 ‘군사 문제’, 즉 한반도에서 군사적 무력 충돌과 전쟁의 억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민족 문제’ 차원에서 민족 분단으로 인해 발생하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해가는 과제를 의미”한다는 분석이 있다. (박순성,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실천 구상: 정전체제, 분단체제, 평화체제」, 『사회과학연구』 25권 1호, 동국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2018, 30쪽.)

김강녕 조화정치연구원장 역시 평화의 의미를 한국과 북한이 분단 상태를 극복해 하나로 통일된 민족 공동체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강녕,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과제와 전망」, 『통일전략』 3권 2호, 한국통일전략학회, 2003, 133쪽.)

이처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분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통일을 방해하는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를 방해하는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하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은 “(지금까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협상이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라면서 “북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협상을 제안했지만, 한미는 이에 묵묵부답이었거나 매우 소극적이었다”라고 짚었다. (정욱식, 「[정욱식 칼럼] 정전 70년, 평화협정 협상의 원년으로」, 한겨레, 2023.1.2.)

정전협정은 전쟁을 치르던 국가 간 전쟁을 일시 중단, 평화협정은 전쟁을 치르던 국가 간 전쟁을 완전히 종료시킨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지난 1953년 7월 27일 북한, 중국, 미국은 한국전쟁 발발 3년여 만에 판문점에서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정전협정은 전쟁이 멈춘 상태이기 때문에 언제든 군사 충돌이 발생할 위험성이 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한반도의 휴전선-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 인근에서 70여 년 동안 계속되는 군사 충돌이 대표 사례다.

반면 평화협정은 전쟁을 치른 국가 간 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전후처리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협정이다.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한반도에서 70여 년째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대치하는 상황이 끝나게 된다. (「정전·휴전·종전의 차이점?」,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KTV, 2018.9.20.)

지난 2018년 남북·북미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평화협정이 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높았지만, 미국이 어깃장을 놓으면서 끝내 불발됐다.



2. 남북 평화협정 체결 요구한 북한

북한, 중국, 미국이 체결한 정전협정은 전쟁을 끝내지 않은 불완전한 협정이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했다. 이 때문에 정전협정 체결 뒤 한국과 북한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한자리에 모여 한반도의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논의를 진행했다.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열린 제네바회담에서 한국, 북한, 미국, 중국, 소련 등 국제사회 19개국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에 관한 논의가 오갔다. 

제네바회담에서 가장 쟁점이 된 것은 유엔의 권위 인정 여부와 외국군 철군 문제였다. 

중국 측 대표인 저우언라이 총리는 1954년 5월 22일, 중립국감시위원단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 감시를 제안하며 한반도에서 유엔의 역할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측 대표인 남일 외무상도 유엔이 미국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다며 유엔은 한국의 편을 든 교전국의 일방이므로 한반도 문제에서 공정한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김보영, 「위기의 한반도, 평화의 길을 묻다 - 정전협정의 쟁점과 그 유산」, 『역사비평』 2013년 가을호, 2013, 193~203쪽.) 

제네바회담 당시 북한과 중국뿐만 아니라, 유엔군 측인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도 한반도에 있는 외국군을 동시에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부 장관은 중국 인민지원군을 우선 철수시키고,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이 평양에 주둔해야 한다면서 논의를 결렬시켰다. 이는 북한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주장이었다. (김연철, 『70년의 대화: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창비, 49~52쪽.)

제네바회담 마지막 날인 1954년 6월 15일 남일 외무상은 우선 평화유지에 관한 합의라도 봐야 한다며 ‘냉전의 공고화와 정전상태로부터 공고한 평화에로의 점진적 이행’을 보장하기 위한 6개 항을 제안했다. (임수호,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역사적 경험과 쟁점」, 『한국정치연구』 제18집 제2호,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009, 55쪽.) 

6개 항에는 남북 병력 10만 이하 감축, 남북 정부 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위원회 구성 등의 제안이 담겼는데 이는 ‘한반도 최초의 평화정착 방안’으로 평가된다. (김연철, 앞의 책, 54쪽.)

북한은 한반도의 전쟁 상태를 끝낼 해법으로 한국을 향해 남북 간 평화협정 체결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선제적으로 북한에 주둔하는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를 주도했다.

제네바회담이 끝난 뒤 북한은 1955~1958년 동안 중국 인민지원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켰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김일성 주석이 적극 나서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철수를 주도했으며, 중국 인민지원군의 철수를 계기로 북한이 중국과 거의 정치적으로 대등한 동맹관계를 추구하게 되었다고 짚었다. (이종석, 「북한 주둔 중국인민지원군 철수에 관한 연구」, 『세종정책연구』 2014-19, 세종연구소, 2014, 37쪽.)

중국 인민지원군이 북한에서 철수한 뒤, 김일성 주석은 1962년 10월 23일 남북 군축과 미군 철수를 담보할 평화협정(불가침협정) 체결을 한국에 제안했다. 김일성 주석은 1972년 1월에는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대담을 통해 ‘정전협정을 대체할 남북 평화협정’ 체결을 국제사회에 공론화했다.

북한은 1955년 8월 14일부터 1973년 4월 5일까지, 무려 130여 차례나 남북 군축과 주한미군 철수를 담보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한국에 제안했다. (임수호, 위의 글.)

반면 한국은 평화협정 체결을 반대했다. 정전협정을 반대한 이승만 정권은 휴전을 끝내고, 한국·미국·대만군이 힘을 모아 북한과 중국을 공격하자며 북진통일론을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은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반공을 바탕으로 한 독재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강했고, 이에 따라 반북 공세를 강화했다. 북한과 대결을 강조한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남북 평화협정 체결은 관심 밖이었다.

이에 미국은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압박하며 남북 간 충돌 수위를 조절하려 했다. 미국은 남북 간 평화협정 체결을 바라지 않았지만, 한반도에 또다시 군사를 들여 북한과 전면전을 치르게 될 상황 역시 꺼렸기 때문이다. (김연철, 위의 책.)

 

3. 북미 평화협정 체결 요구한 북한

남북 간 평화협정 체결이 가로막히자 북한은 미국과 직접 담판에 나섰다. 북한은 정전협정의 ‘실질적 당사자’인 미국을 향해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촉구했다. 

1975년 10월 24일, 제30차 유엔총회에 참석한 북한 측 리종목 대표는 평화협정 체결 문제에 관해 “미국과 해결할 문제가 따로 있고 남조선[한국]과 해결할 문제가 따로 있다”라면서 평화협정은 정전협정의 ‘실질적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이 체결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군이 철수한 다음 조선[한반도]에서 공고한 평화를 달성하는 문제는 미국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남조선 사이에 해결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임수호, 위의 글.)

북한은 중국, 소련 등과 함께 제30차 유엔총회에서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그 내용은 한반도 문제에 관한 유엔의 모든 권한 박탈, 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철수 등이었다. 유엔 무대에서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제기된 건 제30차 유엔총회가 처음이었다. (임수호, 위의 글.)

반면 미국은 남·북·미 3자회담, 4자회담(한국, 북한, 미국, 중국)을 제안하는 등 북한과의 양자 대화를 거부했다. 4자회담 의제와 관련해 한미 양국은 남북 간 긴장 완화나 신뢰 구축 문제부터 먼저 논의하고 합의가 어려운 평화협정이나 주한미군 문제 등은 천천히 논의하자며 시간을 끌었다.

북한은 근본 문제인 평화협정과 주한미군 문제 등이 아니라 남북 군사당국자 직통전화 운영 등 긴장 완화 문제를 논의하자는 건 문제 해결을 피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영호, 「4자회담의 전개과정과 평가」, 『한반도 평화전략 연구총서』 2000-33, 통일연구원, 2000, 153~154쪽.)

평화협정을 거부한 미국은 1990년대 들어서도 한미연합훈련, 전략무기 전개 등으로 북한을 자극해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북한은 미국을 향해 꾸준히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했다.

북한은 1994년 4월 28일 노동신문을 통해 발표한 외교부 성명에서 미국이 한반도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도입하면서 기능하지 않는 정전협정의 비정상 상태가 사실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현 정전기구를 대신하는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할 것”을 촉구했다.

북한의 구상은 1996년 2월 노동신문을 통해 발표한 북한 외교부 대변인 성명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에 앞서 잠정협정을 체결하고 이행을 검증하기 위한 북미공동군사기구를 설치하자는 것이 북한의 제안이었다.

그러던 중 1998년 8월 말, 북한은 인공위성 광명성-1호를 발사했다. 북한은 주권국가가 가진 정당한 권리로 인공위성을 발사했다고 밝혔지만, 미국은 사거리가 2,500킬로미터로 알려진 인공위성 발사 로켓을 이른바 대포동-1호로 부르며 경계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이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는 전대미문의 국가 재난에 빠져 곧 붕괴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거꾸로 북한이 선진국의 상징이던 인공위성 발사를 자력으로 해낸 것을 보며 자신들의 예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국의 빌 클린턴 정부는 대북 정책을 원점에서 검토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를 대북정책 특별조정관으로 임명해 대북 정책의 재검토를 맡겼다. 

이후 페리는 1999년 5월 평양을 방문하는 등 북한 측과 한 논의도 담아 1999년 10월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이를 일명 페리 보고서라고 한다. 페리 보고서의 핵심은 미국이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를 추진하겠다고 한 것이다. (박종철, 「페리프로세스와 한·미·일 협력방안」, 『연구총서』 2000-05, 통일연구원, 2000, 2쪽.)

페리 보고서 채택 이후 2000년 6월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북미 사이에도 대화 분위기가 조성됐다. 미국은 같은 해 10월 9~12일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대표단을 이끌고 방미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 윌리엄 코헨 국방부 장관 등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북미정상회담과 평화협정이 처음으로 명시된 외교 공동성명인 북미 공동코뮤니케가 채택됐다. 북미 양국의 고위 인사가 공개 석상에서 마주 앉아 성명을 채택한 건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이었다.

 

4. 종전선언을 제안하고도 평화협정을 거부한 미국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논의는 조지 부시 정부에 의해 가로막혀 고작 몇 달도 가지 못했다.

2001년 1월 출범한 부시 정부는 북미 공동코뮤니케 합의를 걷어차며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이로써 북미 공동코뮤니케는 무산됐고, 북한 붕괴를 강조하는 미국의 공세도 나날이 심각해졌다.

그런데 북한이 2005년 2월 10일 ‘핵보유 선언’을 하고, 2006년 10월 9일에는 풍계리 핵시험장에서 지하 핵시험을 성공시키자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가 바뀌었다.

같은 해 11월 18일, 부시 대통령은 베트남 하노이 아펙(APEC) 정상회의 과정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북한과 종전선언, 평화협정을 체결할 뜻이 있다고 밝혔다. 비록 북한의 핵폐기라는 전제 조건을 들었으나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였다. 북한의 핵보유 선언이 평화협정을 거부하던 미국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후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남북 정상은 10.4공동선언 4조를 통해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라고 명시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미국은 북한이 핵개발을 폐기하면 평화협정을 논의할 수 있다고만 했을 뿐, 관련한 행동이나 협상을 하려 들지는 않았다.

이러한 미국의 대북 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큰 틀에서 유지됐다. 부시 정부에 이은 버락 오바마 정부는 대북 정책으로 이른바 ‘전략적 인내’를 표방했다. 이는 북한이 핵개발을 알아서 포기할 때까지 대북 제재로 봉쇄하며 북한이 항복하거나, 또는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겠다는 의도였다. (김준형,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 무시와 활용」, 『한반도포커스』 제31호, 2015, 1~7쪽.)

2010년 1월 11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조선전쟁 발발 60년이 되는 올해에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회담을 조속히 시작할 것을 정전협정 당사국들에게 정중히 제의한다”라고 밝혔다. 여기서 정전협정 당사국들은 정전협정에 서명한 미국, 중국을 말한다. (이중구, 「한반도 안보구조와 북한 평화협정 구상의 변천」, 『대외학술활동시리즈』 2018-73, 대한정치학회, 2018.10.26, 8쪽.)

이에 미국 백악관은 발표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가 선행되어야 평화협정 논의를 할 수 있다고 밝혀 사실상 논의를 거부했다.

오바마 정부 임기 만료가 6개월여 남은 2016년 6월 20일, 북한 관료들은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안보회의에 참석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북한 관료들은 “비핵화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선 미국이 먼저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라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 직후 월스트리트저널 취재진과 만난 북한 외무성 관료는 “힐러리(미 국무부 장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으로 하여금 핵억지력을 가질 수 있게 했다”라고 미국에 책임을 돌렸다. 또 다른 북한 외무성 관료는 “우리 조국은 대북 제재가 얼마나 강해지든 절대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의명, 「北 외무성 관료, “힐러리의 ‘전략적 인내’, 핵개발 가능케해”」, 매일경제, 2016.6.22.)

이와 관련해 박형준 서강대 동아연구소 전임연구원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 시험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원인이며, 미국은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논리라고 분석했다. (박형준,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의 역사적 고찰과 쟁점」, 『동아연구』 제39권 2호,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2020, 130쪽.)

2017년 11월 29일, 북한은 미국 본토까지 닿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화성포-15형을 발사하며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미국 안팎에서도 북미 대결의 판도가 북한에 유리하게 뒤집혔다는 평가와 분석이 잇따랐다. 

이런 분위기에서 북한은 2018년 2월 한국에서 열린 평창겨울올림픽에 김여정 조선노동당 부부장, 김영남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보냈다. 그 뒤 남북 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실무, 고위급 회의가 뒤따랐다.

두 달 뒤인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남북 정상은 판문점선언을 통해 “현재의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확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임을 확인하면서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6월 12일 사상 처음으로 열린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북미 양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영속적이며 안정적인 평화체제”를 한반도에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북한은 미국이 민생과 관련이 있는 제재를 해제하면, 영변에 있는 핵심 핵시설을 철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결렬시키면서 평화협정 논의를 무산시켰다. 미국이 결국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받지 않은 것이다.

이런 미국의 태도와 관련해 “미국의 입장은 명백하다. 정전협정의 틀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라면서 “정전협정은 유지하되(주한미군은 그대로 두되) 북한과는 관계 개선(수교)을 꾀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야말로 바로 미국이 원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흥환, 「‘평화협정’에 속 끊이는 미국」 , 시사저널, 1995.6.8.)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면 미국으로선 주한미군 철수뿐만 아니라 유엔군사령부(아래 유엔사)의 해체 가능성도 커진다. 유엔사의 역할(정전협정의 준수와 이행)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상근, 「한반도 평화체제의 쟁점과 구축방향」, 『INSS 연구보고서』 2019-16 국가안보전략연구원, 2019.12, 116~120쪽.)

이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에서의 영향력과 이익을 유지하려는 데 중점을 두고 평화체제 구축에 소극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상근, 위의 글, 22쪽.)

중요한 사실은 평화협정을 아예 거부했던 미국이, 평화협정 체결은 필요하지만 북한이 먼저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태도를 바꿨다는 점이다. 북한의 핵보유 선언과 핵무력 완성 선언이 평화협정을 달가워하지 않는 미국을 끌고 온 것이다.

2017년을 기점으로는 북한의 핵미사일이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게 되면서 미국으로선 자신의 생존을 위해 평화협정 체결이 필요해진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지난 2018년 싱가포르에서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후속 회담인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무산시키지 않았다면, 한반도의 평화·번영·통일을 바란 사람들의 기대감은 현실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반도는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가장 오랜 기간 정전협정이 유지 중인 지역이다. 정전협정 70주년인 올해도 평화협정을 가로막는 미국 때문에 한반도의 전운은 가시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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