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특집] 유엔사의 실체와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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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 특집] 유엔사의 실체와 문제점
  • 이인선 주권연구소 객원연구원
  • 승인 2023.07.27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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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 27일은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반도는 지금도 정전 체제에 있으며 전쟁 위기가 상존한다. 정전협정이 어떻게 체결되었고 또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이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무엇이고 또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여 이 땅에 평화가 깃들게 하는 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에 주권연구소는 7.27 특집을 준비하였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이들은 정전협정 4조 60항을 통해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안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라고 앞으로의 해결 방법까지 명시했다.

하지만 정전협정이 발효된 지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국제연합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국제연합군사령부, 즉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 이하 ‘유엔사’)는 현재 유엔 깃발을 휘날리며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스’에 본부를 두고 있다.

유엔사는 어떤 곳이기에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것일까? 유엔사에 대해 살펴보자.

[출처: 주한미군사령부]


1. 미국의 군대, 유엔사의 탄생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유엔 안보리’) 결의 82호, 83호, 84호에 따라 유엔사가 설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950년 평화와 안전의 회복을 위한 유엔의 ‘경찰 조치’를 위해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군대를 파견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선전 때문에 국제사회뿐만 아니라 많은 미국인과 한국인들이 유엔사가 유엔의 전문기구 또는 보조기구로 설립되었다고 믿고 있다.

지금부터 미국의 주장이 맞는지, 유엔사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차근차근 알아보자.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부터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의 지시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무력 충돌을 가정해 유엔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방안을 미리 준비해놓았다. (문관현,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에 따른 유엔군사령부 변화에 관한 연구」, 2020, 78~79쪽.)

미국, 영국, 프랑스가 주축이 된 유엔 안보리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요청에 따라 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어니스트 그로스 유엔 주재 미국 부대사는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의 전신을 토대로 “북한군이 6월 25일 이른 아침(한국시간) 여러 지점에서 대한민국 영토를 침공했다”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북한이 “평화 파괴와 침략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유엔 안보리는 비슷한 주장을 하는 유엔 한국위원회 전신도 참고했다. 유엔 한국위원회는 1949년 9월 4차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38선 부근에서 발생하는 군사적 위협을 모두 유엔에 보고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유엔 한국위원회의 전신에는 “한국 정부는 6월 25일 오전 4시경 북한군이 38선을 따라 강력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밝혔다”라는 말과 함께 “평양 라디오의 13시 35분 주장 : 남한이 밤에 선을 넘어 침공한 것에 대해…인민군이 단호한 반격으로 침략군을 격퇴하도록 지시했다”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 안보리는 유엔 헌장 32조에 따라 남북 양국 정부 대표를 안보리 회의에 초청해 분쟁에 대한 공정한 청문회를 개최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유엔 안보리는 한국 정부 대표로 주미한국대사 장면을 초청했으나 북한 정부 대표는 초청하지 않았다.

당시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이었던 유고슬라비아 대표는 “북한 정부가 안보리에 참석해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도록” 초청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3곳(이집트, 인도, 노르웨이)이 기권하고 소련이 부재한 상태에서 미국과 미국 동맹 5개국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다.

당시 소련은 중국을 통일한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만으로 쫓겨 간 중화민국을 대신해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어야 한다며 안보리 참여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엔 안보리는 1950년 6월 25일 결의안 82호를 채택해 북한이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38선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결의 이행을 위해 유엔 회원국들이 유엔에 모든 지원을 제공할 것을 촉구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해당 결의안에 있는 ‘모든 지원’을 무력 사용을 승인하는 의미로 판단했다. 이를 근거로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6월 27일 정오 남한의 이승만 정권에 미군 무기를 보내고 미 공군과 해군에 북한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유엔 안보리는 1950년 6월 27일 “양 당사자가 평화협상을 위한 중립적 중재자에 동의하거나 회원국 정부들에 즉각적인 중재를 수행하기 위해” 양측의 초청을 고려해달라는 유엔 한국위원회의 제안을 검토하기 위해 한반도 상황에 대한 두 번째 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미국 대표는 이 제안을 무시하고 유엔 회원국들에 “이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보를 회복하고 무력 공격을 격퇴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서둘러 제출했다. 미국은 이를 이날 오후 11시 결의안 83호로 채택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무력 사용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1950년 7월 7일 채택한 유엔 안보리 결의 84호에 따라 ‘통합군사령부(unified command)’를 구성했다.

유엔 안보리 결의 84호는 3항에서 “앞서 언급한 안보리 규정(82호와 83호)에 따라 군사력 및 기타 지원을 제공하는 모든 회원국이 미국 산하의 통합사령부가 이러한 지원을 이용할 수 있게 할 것을 권고한다”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4항에 “미국에 그런 군대(통합사령부)의 사령관을 지명할 것을 요청한다”라고 명시했다.

이를 토대로 통합군사령부는 사령관 임명권이 있는 미국의 주도로 운영되었고 한국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참전한 16개국을 지휘했다.

이때까지 어디에도 유엔군 사령관이나 유엔사라는 명칭이 언급되지 않았던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통합군사령부를 만들기 전부터 자신들을 유엔의 군대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죽미령 전투다. 죽미령 전투는 통합군사령부가 꾸려지기도 전인 1950년 7월 5일에 일어났지만 미국은 유엔군의 첫 전투로 소개하고 있다. 지금도 죽미령에는 유엔군 초전기념관이 있으며 기념행사도 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7월 8일 미 극동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를 첫 번째 통합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통합군 사령관으로 부르기보다는 유엔군 사령관이라고 불렀다.

당시 상원 외교관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톰 코넬리는 트루먼 대통령이 1950년 6월 30일 백악관 회견에서 그와 의회의 중요 인사들에게 “맥아더는 미국 사령관으로서뿐만 아니라 유엔군 사령관으로서도 싸우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톰 코넬리, 『My Name is Tom Connally』, Thomas Y. Crowell Company, 1954, 349쪽.)

트루먼 대통령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우리는 한국에서 유엔을 대신해 유엔의 이름으로 존재했다. 내가 맥아더에게 위임한 ‘통합사령부’는 유엔사였다”라며 유엔사라는 명칭 사용을 자신이 승인했음을 드러냈다. (해리 트루먼, 『Memoirs by Harry S. Truman』, Vol. II, William S. Konecky Associates, 1956, 378쪽.)

맥아더는 1950년 7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답장을 보내며 “한국에서 근무하게 된 국제군대의 유엔군 사령관”이라고 명시했고, 트루먼 대통령도 이날 회신을 보내며 맥아더를 “주한 국제군대의 유엔군 사령관”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7월 25일 도쿄에 군사령부를 꾸리면서 공식적으로 유엔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유엔 안보리 결의 84호 5항은 북한군을 겨냥한 작전 과정에서 통합군사령부가 함께하고 있는 유엔 회원국들의 국기들과 함께 재량에 따라 유엔기(United Nations flag)를 사용할 수 있음을 허가했다. 이에 따라 맥아더는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되었던 유엔기를 유엔사 깃발로 쓰기로 했다.

미국은 정전협정을 맺은 후에도 유엔사를 일본에서 이동시키지 않다가 1957년 7월 1일 서울로 이전하며 주한미군 주둔의 명분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 ‘유엔군후방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Rear)를 두며 현재까지 주일미군 주둔의 명분으로 활용하고 있다.


2. 유엔사의 문제점

유엔사 표식. 유엔기를 변형해 만들었고 16개의 별은 16개국 참전을 의미한다. [출처: 유엔사]
유엔사 표식. 유엔기를 변형해 만들었고 16개의 별은 16개국 참전을 의미한다. [출처: 유엔사]

1) 유엔과 무관한 기구

많은 사람이 유엔사를 유엔의 군대로 알고 있다. 물론 유엔사를 통상적으로 유엔군의 사령부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유엔군은 유엔 헌장에 따라 조직한 유엔군과 다르다.

다시 말해, 유엔사는 유엔 헌장 43조에 규정되어 있는, 유엔 안보리와 유엔 회원국들 사이의 합의 체결을 바탕으로 유엔 안보리 주도 아래 운용될 수 있는 유엔군과 그 성격이 다르다. (정태욱, 「주한 ‘유엔군사령부’(UNC)의 법적 성격」, 『민주법학』, 제34권, 2007, 205쪽.)

두 유엔군의 혼동을 해소하고자 지금부터 나오는 유엔 헌장에 따른 유엔군을 ‘유엔 산하 유엔군’으로, 유엔사 지휘를 받는 유엔군을 ‘유엔군’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유엔 안보리는 유엔 산하 유엔군을 창설할 권한이 없고, 유엔 총회에 그 권한이 있다. 하지만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에 파견할 유엔 산하 유엔군 창설은 결정된 바 없다.

즉, 유엔사는 미국 주도의 군사 조직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로절린 히긴스 전 국제사법재판소 소장은 ‘작전적인 관점에서’ 본질적으로 유엔사는 일본 도쿄에 자리 잡은 미국 극동사령부에 불과했다고 비평한 바 있다. (로절린 히긴스, 『United Nations Peacekeeping: 1946-1967 Documents and Commentary』, Vol. II, Oxford University Press, 1970, 195~196쪽.)

미국은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과정에서 유엔 내 그 어떤 기관의 동의 또는 추인도 받지 않았다. 이후 벌어진 맥아더 경질과 매슈 리지웨이, 마크 클라크로 이어지는 유엔군 사령관 임명 역시 유엔과 관련 없이 미국의 결정으로 이뤄졌다. (로절린 히긴스, 앞의 책, 196쪽.)

유엔 안보리 결의가 ‘권고’만 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 시기 16개 국가의 참전은 유엔의 조치가 아니라 각국의 조치였다.

그런데도 유엔사가 유엔의 군대처럼 행세하자 국제사회는 이 문제를 확실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요구했다.

이에 유엔 법무국은 통합사령부, 유엔사, 유엔의 관계를 검토했고 해답을 1994년 법률각서에 명시했다.

법률각서에는 ▲“안보리가 통합사령부를 그 통제하에 있는 보조기관으로 설립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 있는 통합사령부는 걸프전에 세운 동맹 다국적군과 다르지 않다” ▲“‘유엔사’는 잘못된 명칭이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United Nations, 『United Nations Juridical Yearbook 1994』, 2001, 501~502쪽.)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당시 유엔 사무총장 역시 1994년 6월 24일 북한 외무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보리는 유엔 산하 조직으로서 통합군사령부를 설립한 적이 없으며, 단지 미국 주권 하에 배치되어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후에도 이러한 사실은 여러 차례 재확인되었다.

1998년 당시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유엔사 창설에 대해 “나의 전임자들 누구도 유엔 이름을 사용하도록 어떤 국가에 어떤 권한도 위임한 적이 없다”라고 밝혔다. 2004년과 2006년, 반기문 사무총장의 대변인도 “유엔사령부는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유엔이 아닌 미국이 주도하는 군대이다”라고 확인했다.

로즈마리 디카를로 유엔 사무차장(유엔 주재 미국 부대사 역임)은 2018년 9월 27일 유엔 안보리 회의 공식 석상에서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주한 ‘유엔사령부’는 유엔 활동이나 조직이 아니고, 유엔의 지휘와 통제 아래 있는 것도 아니다. 안전보장이사회의 하부 조직으로 설치된 것도 아니며 유엔 예산을 통해 자금을 받지도 않는다. 따라서 ‘유엔사령부’와 유엔 사무국 사이에는 아무런 보고 체계도 없다”라고 밝혔다.


2) 불법적인 유엔기 사용

유엔 안보리 결의 84호는 유엔 깃발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사령관한테 부여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통합사령부건 유엔사건 간에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엔기를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면 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엔 깃발 사용을 승인한 것부터 유엔 법률 위반이다. 유엔깃발법에 따르면 군사작전에서의 유엔기 사용을 승인할 수 있는 법적 자격은 오직 유엔 사무총장만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유엔 안보리의 1950년 7월 7일의 유엔 깃발 사용 승인은 불법이었다.

물론 당시 미국과 트뤼그베 리 유엔 사무총장은 이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1950년 7월 28일 유엔깃발법을 개정했다. 미국은 이를 근거로 유엔사에 유엔기를 걸어왔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현재 유엔깃발법은 유엔과 무관한 유엔사가 유엔기를 걸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 유엔사가 유엔기를 계속 게양하려면 유엔사의 업무가 유엔 공식 업무이고 유엔사가 유엔 조직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유엔 사무총장의 승인도 받아야 한다. 물론 그런 후에도 유엔깃발법에 따라 유엔기를 일시적으로만 게양할 수 있다.

일각에선 유엔 스스로 유엔사와 무관하다고 밝혔으므로 유엔사의 노력이 성공할 가능성은 0이라고 주장한다.

유엔기를 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유엔깃발법 8조(금지사항)에 따라 출판물, 휘장 등 어떤 곳에서도 유엔기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유엔 사무총장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유엔 또는 유엔을 대신한 곳에서 발행하는 것임을 증명해야 하며 사용하더라도 그 상태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유엔사 홈페이지나 보도자료, 매년 발간되는 『전략 다이제스트』 같은 정기간행물에 사용된 유엔기는 물론이고 유엔사 군인들의 복장에 부착된 휘장 속 변형된 유엔기 모두 불법이다.


3) 한국전쟁 중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

유엔사는 1950년 9월 15일 미국의 진두지휘 아래 인천에 7만여 명의 병력을 상륙시킨 후 서울도 탈환하고 남과 북을 가르는 38선을 향해 계속 진격했다. 그리고 9월 27일 미국 합동참모본부(이하 ‘합참’)는 맥아더에게 새로운 군사 목표인 “북한 군대 파괴”를 위해 분단선을 넘도록 승인했다. (칼럼 맥도날드, 『Korea: the War Before Vietnam』, Free Press, 1986, 49쪽.)

10월 1일 국군 제1군단은 “38선을 넘어 원산으로 진격했”고 맥아더는 이날 도쿄에서 북한군에게 항복하라는 요구를 발표했다. (와다 하루키, 『The Korean War: An International History』, Rowman & Littlefield, 2014, 126쪽.)

해리 베일리 미군 소령이 한반도와 일본 지도를 배경으로 서서 북한 신의주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당시 유엔사는 신의주 지역에 여러 차례 폭격을 진행했다. [출처: 미 국립 공군박물관]
해리 베일리 미군 소령이 한반도와 일본 지도를 배경으로 서서 북한 신의주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당시 유엔사는 신의주 지역에 여러 차례 폭격을 진행했다. [출처: 미 국립 공군박물관]

이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는 결정이다.

유엔 안보리는 결의 82호에서 북한이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38선 이북으로 철군해야 한다고 명시했고, 83호와 84호에선 “한국에 무력 공격을 격퇴하고 해당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보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데만 무력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딘 애치슨 역시 1950년 6월 29일 미군이 “침략 이전의 상태로 대한민국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싸우고 있다고 선언했다. (조셉 굴든,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McGraw-Hill Companies, 1983, 237쪽.)

하지만 1950년 7월 중순부터 트루먼 정부는 북한 영토를 침공해 점령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트루먼 대통령은 7월 17일 국가안보위원회(NSC)에 이와 관련한 연구를 요청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조치 절차’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9월 11일 해당 보고서를 승인했고 합참에 “북한 점령 가능성에 대한 계획을 세우도록 주한 유엔군 사령관에 대한 지휘”를 인가하도록 권고했다.

트루먼 정부는 또한 보고서에서 “대한민국 하 통일정부”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내는 것을 넘어서 “유엔 안보리 결의에서 승인하지 않은” 38선 이북에서의 군사 조치를 해야 한다며 “이 정치적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군사 조치를 위한 유엔 승인”을 새로 받을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은 1950년 10월 7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는 두 가지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

먼저, 유엔 총회 결의안 통과 이전인 1950년 10월 1일 이미 유엔군은 한국군과 함께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했다. (우리역사넷, ‘6.25전쟁 냉전과 분단이 낳은 동족상잔의 비극’ 항목.)

두 번째로, 해당 결의안이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결권을 침해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자결권은 유엔 헌장 1조 2항에서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짜 ‘유엔사’ 해체를 위한 국제캠페인, 『“유엔사령부”의 실체와 그 문제점』, 4.27시대, 2021, 50쪽.)


4) 꼼수로 연명하는 유엔사

1972년 7월 4일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천명한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유엔사 해체에 대한 국제적 목소리가 높아졌고 관련해 유엔에서 논의도 있었다.

국제사회는 정전협정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절한 합의 탄생을 전제로 유엔사를 해체하는 문제에 대해 1974년 12월 17일 유엔 총회 결의 3333호를 채택했다. 이에 미국은 1975년 6월 27일 유엔 안보리 의장에게 해당 사항에 동의하는 서한을 보냈고 되도록 한국 내에서 유엔군을 노출하지 않는 방향을 취했다.

유엔 총회는 다시 한번 1975년 11월 18일 두 개의 결의를 채택했다. 바로 유엔 총회 결의 3390호(A)와 3390호(B)다. 3390호(A)는 앞서 언급한 내용과 다르지 않지만 3390호(B)에는 유엔사 해체 문제는 물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전쟁 당시 군대를 파견했던 일부 국가들이 3390호(B)를 지지(에티오피아)하거나 기권(그리스, 필리핀, 태국)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미국은 유엔사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워지자 1978년 11월 7일 ‘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하고 유엔사의 기능과 역할을 정전협정 관련 임무로만 축소했다. 유엔군 사령관이 계속 보유하고 있던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이양되었다. (박휘락·김병기, 「한미연합사령부 해체가 유엔군사령부에 미치는 영향과 정책제안」, 『신아세아』 제19권 제3호, 2012, 85쪽.)

하지만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미연합사령관도 맡고 유엔군 사령관도 겸직했다는 점에서 눈속임이었다. 한때 유엔사 소속이었던 주한미군 병력 2만여 명은 한미연합군 소속으로도 활동했다.

2023년 현재, 폴 러캐머라 유엔군 사령관 겸 주한미군 사령관 겸 한미연합군 사령관.
2023년 현재, 폴 러캐머라 유엔군 사령관 겸 주한미군 사령관 겸 한미연합군 사령관.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되고 유엔사를 해체해야 하는 등의 큰 변화가 오는 것에 대비해 자국 사령관 1명에게 세 개의 사령관 모자를 씌워놓은 것이다. 그리고 한국 정부나 사회가 침묵 속에 추종하도록 환경을 조성해 한반도에서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자신들과 유엔사가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런 노력의 하나가 유엔사 부사령관 임명이다. 원래 부사령관의 경우 미군 장성들이 맡아왔지만 2018년 캐나다 육군 장군이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2019년 호주 해군 중장이, 2021년부터 현재까지 영국군 장성이 맡고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 초반에 출범한 유엔사의 16개 회원국의 군대는 정전협정 체결 이후 병력 철수해 1970년대 초반 대부분 자국으로 돌아갔다. 미군과 함께 명분을 유지하던 태국군 1개 중대마저 1972년 6월 본국으로 귀환함에 따라 유엔사에는 미군과 깃발만 남아있게 되었다.

즉, 1950년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구성된 ‘통합군사령부’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미국이 만든 유엔사만 남은 것이다. 일각에서 지금 있는 유엔사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미국은 유엔사를 유지하고 다국적군으로 재활성화하기 위해 우방국들을 긁어모았다. 2010년 호주가 일본에 있는 유엔군후방사령부를 지휘할 장교 1명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2011년 캐나다가 3명의 장교를 유엔사로, 1명을 유엔사후방사령부로 보냈다.

이러한 노력은 2018년 1월 미국과 캐나다의 ‘한반도 안보 및 안정에 관한 밴쿠버 외무장관회의’ 공동 주최로 이어졌다. 이 회의는 새로 구성된 유엔사 회원국을 중심으로 북한에 대한 압박을 확대하고 강화하기 위해 열린 것으로 한국과 일본도 참석했다.


5) 남북협력 방해하는 유엔사

유엔사는 남북협력사업을 승인하거나 차단하는 규제기관의 역할을 불법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2002년 금강산 육로관광이 시작되려고 하자 유엔사는 금강산 관광객 등이 비무장지대(DMZ)에 출입하거나 군사분계선(MDL)을 넘을 때 정전협정 규정을 엄격히 적용하겠다면서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8년 8월 유엔군 사령관은 북한의 철로 상태에 대한 남북 공동조사를 위해 남한 철도차량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을 불허했다. 불허 사유는 한국 정부가 제출한 서류가 불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이재강 당시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2020년 11월 9일 개성공단 재개를 위해 현장 집무실을 도라전망대에 마련하려 했을 때 유엔사가 승인하지 않아 임진각 평화누리 바람의 언덕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하고 업무를 보는 상황도 벌어졌다.

이 부지사에 따르면 유엔사는 불허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민화협 새해맞이 행사 취재 장비 반출 요구 불허(2019.2) ▲통일부 차관 등 한독 통일자문위원회 고성 GP 방문 신청 불허(2019.6) ▲통일부 장관 대성동 마을 방문, 기자단 출입 불허(2019.8) ▲전국체전 100회 기념 공동경비구역 성화 봉송 불허(2019.10) 등 유엔사가 불허한 사례는 많다.

유엔사를 통한 미국의 내정 간섭은 유엔 헌장 2조 “평등권과 민족자결권의 원칙에 대한 존중에 기반하여 국가 간 우호 관계를 발전시키려는 것”과 3조 “모두를 위한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을 증진하고 장려한다”라는 유엔 헌장의 주된 목적을 위반한 행위다.

앞서 본 대로 애당초 정전협정 이후 사라져야 할 유엔사가 아직도 이름을 유지하는 것도 문제지만 안보리 결의대로 평화를 추구해야 할 유엔사가 한반도 평화로 나아가는 남북협력을 방해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유엔사는 오늘날 비무장지대 출입과 군사분계선 통행 가능 여부를 결정하는 것과 더불어 남북의 군사행동이 정전협정을 준수하는지 조사 및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정전협정문에는 비무장지대 출입과 군사분계선 통행에는 군정위의 특정한 허가를 기본으로 하되, 군사분계선 이남에서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에 대해선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진다고 되어 있다.

정전협정 위반에 대한 조사와 처리 권한은 정전협정 24항, 27항에 따라 유엔사가 아니라 군정위가 가지고 있다.

물론 1994년 5월 29일 북한이 군정위 폐쇄를 통보함으로써 군정위는 사라졌다. 그러한 이유로 유엔사 군정위가 군정위의 절반이니 절반만의 효력이라도 가진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군정위는 쌍방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 있지 홀로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유엔사 군정위는 군정위 역할을 할 수 없다.

유엔사는 궁여지책으로 대안을 냈다. 정전협정 25항 ㅈ목에 군정위의 역할로서 나온 쌍방 사령관의 통신을 중개하는 기능을 하는 데 다른 방법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예외 규정을 활용해 이른바 ‘핑크폰’을 통해 북한과 통신을 유지하고 있다.

핑크폰은 판문점 남측지역 내 유엔사 일직 장교 사무실에 놓인 연분홍색 전화기다. 이 전화기가 북측 판문각에 놓인 전화기와 직통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군정위와 무관한 그저 ‘다른’ 소통 방법일 뿐이다. 북한군 군정위가 복귀하지 않는 한 유엔사 군정위는 군정위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유엔사 군정위의 정전협정 위반 여부 단독 조사는 군정위 조사권과는 무관한 것이자 정전협정 위반이다.

유엔사 군정위가 조사하려면 북한군과 상의해 군정위를 복원시켜야 한다. 일각에선 그럴 생각이 없는 유엔사엔 남북관계와 관련해 가타부타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한다.
 

정리하자면, 유엔사는 ▲유엔과 무관하지만 유엔의 군대를 표방한 점 ▲유엔기를 불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 ▲한국전쟁 중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한 점 ▲유엔사를 해체하지 않고 눈속임으로 유지하고 다국적군으로 만들려는 점 ▲남북협력을 방해하는 점 등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유엔사가 시작부터 미국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군사 조직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도 이러한 유엔사의 문제점들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전 70년인 2023년에도 유엔사가 자신들의 문제점을 돌아보지 않고 있어 앞으로도 한반도에 주둔하며 남북관계 발전보다 분단을 유지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으로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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