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칼럼] 이승만이 국가보안법이 필요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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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칼럼] 이승만이 국가보안법이 필요했던 이유
  • 김용택 이사장
  • 승인 2024.04.25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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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었던 정권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일천오백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고, 또 이 회의에 모인 연합국 열강이 장래에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현재와 같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저희들의 자유 염원을 평화회의 석상에서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입니다....”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정한경(헨리 정)이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한 위임통치안의 일부다. 우리 헌법 전문(前文)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뿌리가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진 1919년에 시작해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에 맞서 싸운 민중들의 혁명이 발발한 1960년까지 성숙한 것으로 본다는 의미다.

1948년 2.7구국투쟁에서 6.25전쟁까지의 양민학살. 제주 4·3항쟁이나 여순항쟁과 같은 인민항쟁, 유격대투쟁, 38선상의 남북충돌로 10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발생.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정권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1백만 명에 가깝다. 전남북 지역의 약 20만 명, 보도연맹 학살의 30만 명 등을 포함하여 함평, 문경, 대구, 부산, 함양, 산청, 거창, 충무, 거제 등 민간인 학살은 전국적, 조직적, 체계적인 현상이었다.

정부수립 100일도 되지 않아 이승만 정권은 좌익세력을 처벌하겠다며 국가보안법을 제정·공포했다. 제헌의회도 곧바로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1948.09.22.)'을 제정해 친일청산에 나섰지만, 이승만은 좌익처벌을 더 시급한 과제로 설정한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이듬해 6월 6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습격해 명단을 불태웠다. 곧이어 국회에서 반민법을 개정해 수사 기간을 축소하는 등 반민특위 활동은 사실상 무산시켰다.

■ 국가보안법의 역사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것은 76년 전인 1948년 12월 1일. 대한민국의 형법이 제정되기도 전이었다. 과연 이승만 정권이 다른 중요한 법을 만들기도 전에 서둘러 국가보안법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이승만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와 방조 아래 한반도 남단에서 미국의 패권을 보장할 친미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획책하였다. 그 결과물이 1948년의 5·10 단독선거였다. 단선은 민족분단의 확정이자 친일파의 재집권을 의미했으며, 수많은 민중들이 항쟁에 떨쳐나섰다.

대표적인 것이 제주 4·3항쟁이었다. ‘미제 축출’과 ‘단선 반대’를 내걸고 일어선 제주 민중들의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미군정은 반공 폭력집단인 서북청년단과 경찰들을 앞세워 제주민중들을 탄압하였다. 하지만 14연대의 장병들은 같은 민족에 대한 진압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1948년10월 ‘여순사건’)

이렇듯 자주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민중들의 거센 열기 속에서 분단정부 수립의 이데올로기인 반공을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장치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다.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지자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를 합법(?)적으로 학살하거나 검거, 투옥할 수 있었다. 반민특위를 주도해 친일파 청산에 앞장섰던 노일환, 김옥주 등 13명의 국회의원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였다(국회 프락치 사건).

이처럼 반공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민중의 뜻과는 상관없이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1949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1백32개의 정당과 사회단체를 ‘이적’으로 몰아 해산시켰고, 11만8천6백21명을 검거, 투옥하였으며 9천명의 군인을 구속하였다. 더구나 현행 국가보안법은 1980년 내란세력(전두환일당)이 조작한 불법 기관에 불과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제정하였으며, 이에 흡수된 반공법 역시 5ㆍ16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조작된 것으로 ‘정통성’이 없는 냉전시대의 사생아일 뿐이다.

■ 국가보안법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는 ‘국가보안법’이라 쓰고 ‘정권보안법’이라고 읽는다. 제정과정부터 그랬으며, 적용과정과 개정과정에서 보더라도 그 시대 정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면 모두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받아 간첩으로 몰려야 했다. 또한 국민적인 의견이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바라는 때이면, 개정하는 듯하다가 개악하는 수법을 반복해 왔다.

국가보안법을 제정한지 올해로 77주년이다. 군사독재정권은 부당한 권력유지에 국가보안법을 악용했다. 간첩사건을 날조하고, 수많은 민주인사를 고문하고 가두었다. 소중한 생명을 함부로 앗아가기도 했다. 이미 재심 등을 통해 다 밝혀진 사실이다. 국가보안법이 아니라 정통성이 허약한 정권보안법이었다. 국보법은 너무 시대착오적이고 비이성적이다. 같은 민족인데도 북한주민 전체를 반국가단체 소속 원으로 규정하고 있어 북한에 부모 형제가 있다 해도 소통, 왕래, 물물 교환 등을 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특히 이 법 7조가 북한에 대한 고무찬양동조를 금하고 있어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대통령 한 사람 외에는 국가보안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 국보법 폐지 논의 미루기로 합의한 21대 여야 국회

21대 국회는 국보법 개정안이 발의되자 거대 여야 합의로 2024년까지 논의를 미루기로 합의했다. 국민의 힘이나 민주당 모두 국보법의 개폐를 논한다는 것에 정치적인 부담을 느낀다는 점에서 일치한 것이다. 한국형 민주주의가 얼마나 후진적이며 주권자인 국민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지를 드러낸 대표적 사례다.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자는 7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②국외공산계렬의 활동을 찬양·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자도 제1항의 형과 같다. 국가보안법 제 7조다. 이현령비형령(耳懸鈴鼻懸鈴). 국가보안법 제7조가 헌법이 보장한 표현·양심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며 유엔 위원회 권고나 국제규약에 위반된다는 지적을 받고 국가보안법 제7조가 헌재의 위헌 심판대에 오르는 것은 법이 일부 개정된 1991년 이후 8번째다. 희대의 악법 국가보안법을 방치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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