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칼럼] ‘학생이 집회·시위에 참석하면 퇴학’ 가짜뉴스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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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칼럼] ‘학생이 집회·시위에 참석하면 퇴학’ 가짜뉴스가 아닙니다
  • 김용택 이사장
  • 승인 2023.11.1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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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발령한 긴급조치권 아세요?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행위,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고 했다. 박정희가 발령했던 긴급조치권이다.

긴급조치 제4호는 “학생의 출석거부,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내외의 집회, 시위, 성토, 농성, 그 외의 모든 개별적 행위를 금지하고 이 조치를 위반한 학생은 퇴학, 정학처분을 받고 해당학교는 폐교처분을 받는다.”고 했다. 이 긴급조치 제 4호는 1974년 4월 3일 오후 10시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주제한 임시국무회의에서 이봉성 법무부 장관의 제안으로 심의, 의결되었다. 같은 해, 8월 23일, 오전 10시를 기해 긴급조치 1,4호는 해제되었다.

 

<공무원이 커피 마시면 파면>

긴급치뿐만 아니다. “외래 커피를 팔다 걸리면 무조건 업자를 구속하고, 다방허가를 취소하겠다.”고도 했다. 실제로 1962년 6월 27일 경상남도 경찰국이 “공무원으로서 커피를 마시거나 사다가 적발되면 바로 고발, 파면 조치”하고 일반인의 경우에는 “주소, 성명, 직위 등을 신문 지상에 공시”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엄포가 아니었다. 오마이뉴스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라는 주제의 기사를 보면 경상남도 경찰국장의 담화 일주일 후인 7월 4일 부산지검은 부산 남포동 3가 12번지 '내집' 다방 마담 이복란을 구속 기소했다. 외래 커피 2잔을 팔다 적발된 이복란에게 부산지법은 징역 6월을 선고하고 7월 13일 부산 중부경찰서는 광복동 1가 29에 있던 '파리잔' 다방의 마담 홍정애를 같은 혐의로 구속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박정희의 긴급조치권의 위헌성>

박정희는 ‘긴급조치’라고 쓰고 ‘헌법 위의 헌법’이라고 읽는다. 1972년 개헌된 대한민국의 유신헌법 53조에 규정되어 있던, ’긴급조치권‘은 대통령의 권한으로 취할 수 있었던 특별조치다. 박정희의 긴급조치권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인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헌법 위의 헌법이었다. 말이 긴급조치이지 사실은 헌법의 상위법이었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를 시작으로 총 9차례 공포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직후 신군부(전두환 정권)의 주도로 1980년 10월 27일 헌법이 개정되면서 폐지되었다.

민주주의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승만의 독재, 박정희의 폭압정치로 숨쉬기조차 어려운 세상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정도의 민주주의에 살 수 있게 된 것은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만든 결과다.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저절로 찾아오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4·19혁명은 하루 동안의 시위로 서울에서만 1백여 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라는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박정희는 통일의 길은 조국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은 경제적 자립이며 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라고 보아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재임 기간 중 경부고속국도 건설, 수출 증대, 소득 증대, 저축 장려, 식량 자급과 자족 실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쳐 황폐화된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하여 "근대화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경제학자 김수행은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높은 착취율에 기반한 것이며 실제 국민생활의 개선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정권 말기인 1979년 5월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2.3%를 기록했고, 석유제품의 가격은 59%, 전력요금은 35% 상승한 반면, 저임금 정책이 지속되어 경기가 위축되었다. 이미 당시부터 재벌들이 부를 독점하기 시작하여, 1979년의 제조업 출하액 중 2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30.3%를 기록하였다.

 

<독재정권 집권연장 도구가 된 헌법>

대한민국 헌법은 독재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뭉개졌다. 제헌 헌법 이래 9차례 개헌한 헌법 중 5차례의 개헌이 대통령의 정권 연장용이었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연임할 수 있는 개헌 하는가 하면 박정희의 제5차 개헌은 임기 4년, 1차 중임의 직선 대통령제를, 제6차 개헌(3선 개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8년의 임기를 마치기 전인 1969년 두 번까지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도록 규정한 제5차 개헌 상의 관련 조항을 뒤집고 3번까지 당선할 수 있게 한 3선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72년 12월 27일 개헌한 제7차 개헌은 유신헌법은 중임이나 연임 제한 규정을 두지 않은 채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토론 없이 무기명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했다. 대통령은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 추천권, 국민투표부의권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사실상 대통령을 절대 군주화한 것이다. 박정희는 주권자 위에 군림한 안하무인격인 유신헌법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포장했다.

식민지시대 일제에 은혜를 입은 세력들, 이승만정권에서, 박정희정권에서 복무했거나 시혜를 받은 기득권 세력들은 그 시대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 한다. 중국이 득세할 때는 존화주의(尊華主義) 가치관으로 일제의 지배하에서는 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식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본다. 우리나라 지식인 중에는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이지만 행동이나 기치관은 중국사람이요, 일본 사람이요 미국 사람이다.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을 믿지 말고 일본을 잊지 말고 조선사람 조심해라.” 1945년 해방 후 한반도의 민중들 사이에 회자(膾炙)되었던 4행시다. 1866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이를 자손만년에 경고하노라.”고 적혀 있다. 이 척화비는 서울 종로 네거리, 경기도 강화, 경상도 동래군 · 함양군 · 경주 · 부산진 등 전국 각지에 남아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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