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백제역사 유적지구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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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백제역사 유적지구 답사기
  • 김철홍 자유기고가
  • 승인 2023.10.3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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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홍 자유기고가
김철홍 자유기고가

얼마 전 대전 유성문화원에서 주관하는 ‘2023 정기문화답사’ 프로그램에 동참하여 학창시절 설레는 마음으로 소풍을 가듯 버스에 몸을 의지한 채 차창 밖을 주시하게 되었다. 절기 중 서리가 내리는 시기를 뜻하고 추수가 마무리되는 때인 상강(霜降)이 불과 3일 밖에 지나지 않아서인지 노랗게 물든 가로수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코스모스는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게 해주고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차를 타고 가면서 호기심에 물어보면 난처해하거나 소먹이일 거라고 얼버무린다는 일명 마시멜로 또는 공룡알로 불리는 원형의 흰색 비닐로 포장된 큰 덩어리(소사료로 정식명칭은 ‘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가 농촌 들녘을 장식하고 있는 풍경을 볼 수가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세 곳의 백제역사 유적지구의 하나인 백제의 마지막 왕도 익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미륵사지의 경관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국립익산박물관이 있는 복합문화공간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로 먼저 박물관 상설전시장을 시작으로 1995년 미륵사지와 더불어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왕궁리유적은 고대 동아시아 도성 개발사의 한 축으로 당시 최고의 사찰규모와 남북일직선상에 중문, 목탑, 금당,, 강당, 승방순으로 일탑일금당식 가람 배치의 완성형 제석사지 그리고 백제의 마지막 왕릉으로 주목받는 쌍릉 등 가장 완숙하고 우아한 백제 후기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흔적인 정전급 건물, 와적기단 건물, 정원, 대형 물길, 공방, 대형 화장실 등 왕궁에 어울리는 시설들이 발견되었음을 재현한 모형물을 통한 상세한 설명이 이해를 도왔고. 최전성기에 이른 사비기 백제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적임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되었다.

미륵사지는 익산시 금마면 해발고도 430m의 미륵산 아래 넓은 평지에 펼쳐져 있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터임을 자랑한다. 또한 미륵사는 무왕때 왕실의 안녕과 중생의 불도(佛道)를 기원하며 건립된 가운데, 탑은 목탑, 양쪽에 석탑이 자리한 모습이고 탑 뒤쪽에 금당이 하나씩 자리 잡은 형태를 말하는 3탑 3금당 양식의 백제에서 가장 크고 독특한 사찰이었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통일신라 시기에도 거대한 불교 사원으로 번창했으며 고려 시대에도 중요한 불교 사원으로 존재함은 물론 조선의 불교 억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던 미륵사는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까지 불법(佛法)을 서로 전하는 전통 법등(法燈)을 이어간 사찰로는 이례적으로 ‘삼국유사‘에 창건 설화가 전해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자 최대 규모인 국보 ‘익산미륵사지석탑(서탑)’은 미륵사지에 있는 무왕때의 화강암 석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탑이며, 백제의 대가람 미륵사지에 남아있는 기념비적 문화유산으로 원래 9층으로 추정되나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있는 상태로 2001년부터 콘크리트로 보수된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기 시작했고 무려 18년의 기다림 끝에 2019년 4월에야 모든 복원 과정을 완료할 수 있었다.


2009년초 해체 과정에서는 미륵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국보 금제사리봉영기(金制舍利奉迎記) 등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미륵사와 무왕의 관계를 재정립하여 백제사 속 미륵사의 가치와 백제 후기 문화의 꽃은 단연 미륵사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사리봉영기에서 석탑을 세울 때 이를 도와준 사람은 무왕의 부인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내용이 나오면서 사실처럼 믿어 왔던 서동 설화의 진위가 아직도 이슈로 남아있다.

자료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미륵사가 없어졌고 이후에 서탑과 당간지주만 남았으나 서탑도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일제는 처방으로 콘크리트를 잔뜩 부어 조치했다고 한다.

사실 일제강점기 때 많은 우리 문화재가 수난을 겪었는데, 일제는 민족정기를 끊고자 경복궁을 헐고 조선총독부를 지었고, 종묘와 창덕궁을 연결하는 길을 차단하고 도로를 만들었으며, 왕실 여인의 공간이자 효(孝)의 상징인 창덕궁은 놀이기구와 동물을 구경하는 창경원으로 격하시키는 등 악의적으로 전국의 문화재를 제멋대로 복원하거나 콘크리트를 부어 훼손시켰는데, 그중 1915년 벼락으로 붕괴 직전의 미륵사지 석탑이 콘크리트 범벅으로 복원의 희생물이 됐다는 기록이 있다.


동탑과 서탑 중 동탑은 2년 만에 먼저 복원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마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허망과 허상의 복원탑’이라고 표현하는 등 졸속 복원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고 실제, 미륵사지 동탑은 하얀 화강암을 기계로 깎아내어 탑을 쌓아 기존의 서탑과 부조화가 심하고 표면 질감이 너무 매끈하여 상당히 부담스러운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미륵사지 서탑의 복원은 과거의 졸속 문화재 복원을 반성하고,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상당히 조심스럽게 진행됐는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일제가 사용했던 콘크리트 185톤에 대한 제거 작업으로 석탑에 사용된 원석과 붙어있는 콘크리트를 완벽하게 제거하기 위해 치과용 드릴을 사용해 미세한 콘크리트까지 모두 제거하겠다는 복원 의지를 드러내 현재 우리가 ‘미륵사지 석탑’이라고 부르는 미륵사지 서탑은 그렇게 세상에 다시 제 모습을 드러냈다는 설명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국보인 왕궁리 오층석탑은 고려의 석탑으로 보수를 위해 1965년 해체하면서 탑을 받치고 있던 기단부와 1층 지붕돌 윗면에서 사리함과 사리병을 비롯해 사리를 봉안하는 일체의 장치인 ‘사리장 엄구’와 정교한 세공의 ‘녹색유리사리병’, 금강경의 내용을 19장의 금판에 새긴 다음 접어서 2개의 금줄로 묶은 ‘도금 은제 금강반야바라밀경판’, ‘청동여래입상’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됐는데 이는 백제에서 고려에 이르는 여러 시기의 것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번 답사는 익산에서 꽃피운 백제 불교 문화와 미륵산을 배경으로 한 미륵사의 문화 특히 동탑과 서탑, 미륵사지 터가 한눈에 펼쳐지는 광장은 비록 문화재 복원에서 ‘아픔’과 ‘환희’를 모두 겪었지만, 기존 지형과 자연을 최대한 보존하고 문화재 복원 노력의 결실인 ‘미륵사지 석탑’을 보면서 찬란한 백제 문화의 숨결을 청명한 가을하늘과 함께 느낄 수 있는 가슴 뿌듯한 정서연금을 듬뿍 받은 시간이었다.

끝으로 충청권에 거주하면서 공주나 부여 ‘백제문화유적지구’는 자주 접할 수 있는 문화유적지이지만, 지역을 뛰어넘어 백제문화유적지구이면서 백제의 마지막 왕도인 익산 답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평소 지역문화제 활용사업으로 진잠향교의 ‘향교 인문학당’ 등 전통문화 계승 발전을 위해 남다른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유성문화원 관계자 여러분께 문화재 지킴이의 한 사람으로서 고마움의 인사와 경의를 표하며, 마침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이라는 ‘시인과 촌장’의 ‘풍경’ 시구절이 늦가을인 지금 60대인 필자마저 감성을 자극하는 듯한 하루여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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