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칼럼] 유신헌법의 서막 7·4남북공동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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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칼럼] 유신헌법의 서막 7·4남북공동선언
  • 김용택 이사장
  • 승인 2023.07.0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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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조차 집권 연장에 이용한 박정희
김용택 이사장
김용택 이사장

7·4남북공동선언 51주년. 38선으로 허리가 잘린 한반도는 분단 반세기가 지났지만 통일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해방 이후 남북으로 갈라져 6.25전쟁을 치르고, 그 후로 다시는 결코 서로 손잡을 일이 없을 듯이 하면서 적으로 살았다.

1972년 7월 4일 12시. 남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북의 제2부수상 박성철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방송한 ‘7·4 남북 공동성명’에서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이런 7·4남북공동선언의 내용은 쌍방이 합의를 본 남북공동성명 가운데 제1항이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에 관한 것으로, 모두 7개 항목의 공동성명을 읽어내려 가는 사이,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3년 전인 1969년에는 청와대를 습격사건과 북의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사건으로 남과 북은 살얼음판이었다.

‘7.4남북공동성명’에는 통일원칙 외에도 ‘상호 중상비방과 무력도발 금지, 다방면에 걸친 교류실시, 적십자회담 협조, 남북직통전화 개설, 이 합의사항들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그밖에도 ‘남북 간 정치적 대화통로를 열고 한반도 평화정착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남북한 당사자 간의 최초의 합의문서’라는 데도 그 의의가 컸다.

 

<집권연장을 위한 절차가 된 7·4남북공동선언>

박정희의 7·4남북공동선언은 의도가 따로 있었다. 불순한 속내를 감추고 통일조차 집권의 연장으로 이용하려던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의 중지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을 제정해 7차 개헌 헌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후 새 헌법개정안을 공고하고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면 헌정질서를 정당화하겠다는 것이 선언의 골자였다. 이어 10월 27일,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한다는 유신헌법개정안이 공고되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의 감동이 체 가시기도 전, 박정희는 제 2의 쿠데타로 유신헌법을 만들고 1972년 11월 21일의 국민투표에서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1972.12.27)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이 제정하였다. 12월 23일에 치러진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는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차 당선되었다.

유신헌법의 주요내용을 보면 대통령 직선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간선제로 국회의원선거제도는 임기 4년의 소선거구제에서 임기 6년의 중선거구제로 바뀌었다. 또 대통령의 선출은 유신정우회 후보자에 대한 찬반투표, 개헌안 의결권을 가지고 국가의 통일정책을 심의·결정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신설됐다. 이로서 박정희는 헌법위에 군림한 말이 대통령이지 사실은 헌법 위에 군림한 종신 군주였다.

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 국회의원(국회의원 정수의 1/3인 유신정우회)·법관 임명권과 같은 초헌법적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어떻게 3권분립의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일 수 있는가? 그러면서 박정희가 만든 정당은 놀랍게도 민주공화당이었다. 그는 유신 헌법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하고 헌법 위에 군림한 대통령이 ‘민주주의과 공화주의’를 실천하는 지도자라고 믿어도 되겠는가?

입법부인 국회는 국정감사권이 박탈되고 연간회기가 제한(150일)되었으며 대통령 탄핵권이 부정되는 등 견제기능을 무력화시킨 박정희는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권인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조차 법률에 의해 제약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구속적부심제 폐지, 고문 등 자백에 근거한 처벌 불가조항 삭제라는 독소조항이 포함시켜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전면 부정한 헌법을 만든 것이다.

 

<박정희의 최후>

권력에 취하면 이성을 잃는다.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온갖 이데올로기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관변단체와 언론을 동원해 자신의 욕망을 홍보하고 정당화한다. 국민들은 박정희가 ‘경제를 살린 대통령’이라고 믿고 있지만 박정희가 살린 경제는 서민의 경제가 아닌 재벌의 경제였다.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상징되는 박정희시절의 부정과 비리는 김두한의 ‘국회 오물 투척사건’ 하나만 보아도 알고도 남는다. 대학재단 비리와 입시부정,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사카린 밀수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워커힐 사건, 증권파동(주가조작), 빠찡코 사건과 같은 4대 의혹 사건, 정경유착의 상징이 된 부패 기업과의 결탁, 삼분폭리사건, 코리아게이트 사건, 사유재산 강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부정과 비리를 저지런 장본인이 박정희였다.

국민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박정희의 7·4남북공동선언은 10·26사태로 그 막을 내린다. 박정희는 국민교육헌장에 표현했듯이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만이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국민을 마취시킨 사악한 독재자였다. 박정희의 아바타로 만든 국민의 의식은 역사가 얼마나 지나야 마취에서 풀려날까? 희대의 독재자 박정희는 죽어서도 지관이 선택한 국립서울현충원의 최고 명당자리에서 태평성대를 누리며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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