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교수 특강] 식민사학의 카르텔과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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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교수 특강] 식민사학의 카르텔과 실체
  • 충청메시지 조성우
  • 승인 2023.01.2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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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뽑지 못한 식민사학의 뿌리를 아십니까?

[이덕일 교수 특강] 제가 이번 시간부터는 식민사학 완전정복 시리즈 연속특강을 좀 진행하려고 합니다.제가 역사TV를 진행하든지 또 아니면은 뭐 각지에 가서 강연을 하고 나면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너무 몰랐다는 거예요.

이 식민사학의 실체에 대해서 그래서 이 식민사학의 실체를 좀 핵심적인 것들을 갖다가 좀 강의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제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역사TV 시청자들 대상으로 이 식민사학계 요체에 대해서 여러 번에 걸쳐서 말씀을 좀 드리려고 합니다.

식민사는 뭐냐면 뭐 한마디로 조선 통록부 역사관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 조선 후기 나라를 팔아먹은 노론의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이죠.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한 몸이예요. 그래서 이 두 가지 역사관이 여러 모습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은 뭐 임나는 가야다. 그러니까 야마토 왜가 가야를 점령했다고 하든지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그래서 북한은 원래부터 중국의 영토였다라고 주장하죠. 고려 북방 강역을 지금의 함경남도까지였다. 그래서 고려라는 나라는 대륙은 커녕 한반도의 3분의2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정조는 독살당하지 않았다. 조선왕 독살 사건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하든지 또는 일제 때 근대화가 되었다고 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고 그 다음에 독도는 일본꺼다 라고 주장하면서 독도는 한일 간의 공동으로 영유해야 된다.

그다음에 또 일본군 성폭행 피해자 할머니들 세칭 위안부는 자발적이었다라고 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데 어떤 것들은 비교적 쉽게 알 수 있지만 어떤 것들은 논리가 복잡하고 옛날 것이기 때문에 알기가 힘들죠.

그리고 특히 여기에서는 핵심이 뭐냐면 진실을 이야기해야 될 한국의 강단 역사학자들이 오히려 교묘한 방법으로 조선총독부 역사관은 옹호하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이 진실을 알기가 더욱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일제 35년 강점을 마치고 해방이 되었을 때 우리 민족 우리 국가의 역사관은 어떤 역사관이 되어야 했을까? 그 부분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저명한 독립운동가들 대다수가 다 역사학자였어요. 여기 이렇게 보시는 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었던 백암 박은식 선생, 한국통사라는 아픔의 역사를 쓰셨죠.

그 다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용 선생 이분도 역사학자죠. 그다음에 단재 신채호 선생도 역사학자고 이외에 무원 김교헌 선생이라든지. 뭐 성재 이시영 선생이라든지. 희산 김승학 선생이라든지. 대단히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역사학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역사학에서 독립전쟁, 그 항일전쟁의 논리가 나왔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분들의 역사학을 가르치는 대학 사학과가 한국 내에는 0개, 한 개도 없다는 사실이죠. 이건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거는 프랑스로 치면은 항독 레지스탕스들의 역자학, 마르크 블로크 같은 사람들의 역사학을 가르치는 대학이 0개고 지금 프랑스 모든 사학과가 나치를 계승하는 역사학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면은 상상이 안 가죠? 그러나 우린 그 상상이 안가는게 지금 현실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조선사편수회 야유회

이분들의 역사학을 가리치는 대학은 한 군데도 없어요. 반면에 이 사진이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야유에 간 그런 사진이죠? 이 사진을 보시면은 한국인하고 일본인 껴 있고 한국인 기생과 일본인 게이샤가 껴가지고 장구치고 춤추고 놀면서 오리역사를 난도질한 사람들이 신나게 야유회하고 있는 장면들이죠.

그럼 현재 강단사학이라고 불리는 한국 역사학계가 누구를 계승하고 있느냐 하는 이야깁니다. 이게 과연 핵심적인 질문이에요. 조금 아까 우리가 살펴본 대로 박은식, 이상용, 신채호의 역사관을 계승했다. 그러면은 아직까지 식민사학 논쟁이 있을리가 없는거죠.

근데, 말로는 다 극복했다. 그래 놓고 나서 막상 본론에 들어가 보면 다 조선사편수회 역사학을 지금 가르치니까 아직까지도 식민사관이란 말이 계속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해방 이후에도 또 조선총독부 역사관이 지금까지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전부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역사관만 가르칠 수 있는가? 이런게 어떻게 현실 속에서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죠!

이것도 역시 역사속에서 답을 찾아야 됩니다. 그렇게 보면은 우리가 해방공간이라고 불리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역사학계는 어떤 일이 있었나? 이거를 또 찾아봐야 답이 나오는 거죠.

이덕일 교수

해방공간의 역사학계라고 할 수 있는 데는 역사학파라고 할 수 있는 파는 3개 정도가 있었어요. 하나는 항일 민족주의 역대학계가 있었고요. 또 하나는 사회주의 역사학계, 일제강점기에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을 가지고 역사연구를 하고 독립운동한 사회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사회경제사적인 관점에서 공부를 했기에 사회경제사학자 이렇게 불립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제 식민사학계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하면서 일본인들의 예쁨을 받으면서 자국사를 난독질하던 이 일제 식민사학계가 있었어요. 그러면 우리가 정상적인 경로로 한국의 현대사가 흘러왔다 그러면 당연히 민족주의 역사학계와 그다음에 사회주의 역사학계가 서로가 양대 큰 세력이 돼가지고 한국역사학을 이끌어 갔겠죠.

그러나 이 지형은 1945년부터 48년까지 제가 해방공간의 정치상황에 대해 몇 번 이덕일 역사TV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죠.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세력은 다 제거되고 말할 것도 없고 그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세력들 그러니까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도했던 한국 독립당도 전부 다 제거가 된 다음에 그 친일세력인 독립촉성 중앙회와 또 친일세력인 한국 민주당 친일지주 세력인 한민당 이 두 세력이 여야를 이뤄가지고 지금까지 오는 거라 그랬죠.

이것이 똑같이 역사학계도 그대로 진행이 된 겁니다. 그나마 친일세력들이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회와 김성수 중심의 친일 지주 정당인 한민당이 여야를 구성해가지고 겉으로 보면은 싸우는 척이라도 했는데 이 역사학계는 그것도 없었어요.

100% 규정력을 가지고 이 식민사학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제거해왔던 그런 역사죠 그래서 항일 민족주의 역사학이 제거됐는데 제거된 거는 두 가지 사유가 있죠.

하나는 해방직후에 친일세력들이 다시 득세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또 하나는 와중에서도 살아남았던 위당 정인보 선생이나 그다음에 민세 안세홍 선생같은 분들은 역사학자 겸 또 정치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니까 정치운동도 같이 했었죠.

그 와중에 6.25 때 6.25 전쟁 때 이런 분들은 다 납북됐어요. 그러면서 친일세력과 6.25 전쟁 친일세력의 탄압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항일 민족주의 역사학은 인위적으로 제거가 됐습니다.

두계 이병도

그래서 결국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들의 예쁨을 받은 사랑을 받았던 이병도, 신석호같은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역사하계를 100% 장악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들이 일본인들의 예쁨을 받았다 하는 거는 제가 만든 얘기가 아니라 이병도 자신이 한 이야기예요.

이병도는 쓰다 소키치와 이케우치 히로시 씨의 사랑을 받아 저가 사랑을 받았다고 써놨어요. 그런데 이들은 일본인이지만 매우 존경할 만한 인격자였고 그 연구방법이 실종적이고 비판적인 만큼 날카로운 점을 많았습니다. 그런데 쓰다 소키치는 누구냐 삼국사기가 가짜라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창한 인물이죠.

그다음에 이케우치 히로시는 누구냐 고려강역이 지금의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까지인데 그걸 갖다 거꾸로 두만강 남쪽 1,000리 가랑 끌어 내려가지고 함경도에 있었다라고 주장한 인물이 이케우치 히로시죠.

이 인물들이 아주 존경할 만한 인격자였고 그 연구방법이 실증적이고 비판적이었다는 거잖아요. 이 사람을 갖다가 남한 강단사학계에서 이 사람들 말로는 국사학계의 태두라고 불렀어요.

저는 국사학계라고 안 보죠. 이 사람들의 나라 국이 저는 대한민국이라고 안 보기 때문에 국사학계의 태두라 그러면 안 맞죠. 그러나 어쨌든 감히 이병도라는 사람이 세상 떠나고 나서 역사가의 유향이란 추모문집이 있어요.

추모 문집 보면 눈 뜨고 못 봅니다. 역사학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비판을 위주로 하는 건데 어떻게 저렇게 한 인간에 대해서 저런 식의 탄사를 늘어놓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니까 그건 제가 거기에 글 쓴 사람들 보면 참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겨지는데요. 그렇게 해야 살아남고 그렇게 해야 역사에서 승승장구하고 잘 나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쓴 거죠.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무슨 이야기하냐면 자기 자신들이 식민사학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을 명찰을 일제 식민사학에서 실증사학으로 갈아 바꿨어요. 그러고 나서는 마치 자기네가 객관적인 역자를 하는 것처럼 국민들을 호도했는데요. 호도하는 말을 여러분들이 한번 읽어보시고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는지 한번 살펴보세요.

“역사를 새롭게 고찰한다고 객관을 몰각한 주관이거나 어느 한 편벽된 사관에 치우치거나 또는 사실을 고립적 표본으로 고찰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항상 객관을 토대로 삼아 시야를 넓히어 다각적으로 또 종적(시간), 횡적(공간), 심적, 물적인 관련 아래 공정하게 고찰하여야 한다.”

이거를 보면 참 코메디가 따로 없단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이런 역사학이 존재할 수가 있어요? 이 사람이 막상 낙랑군에 대해서 서술할 때에는 낙랑군은 뭡니까? 위만조선은 무너뜨리고 수도자리에 세웠다는 고대 한 나라의 식민통치 기관이죠. 동방의 알렉산드리아라고 써놨어요.

그러면 고대 한나라의 통치기관을 동방의 알렉산드리아라고 써놨으면 이게 객관입니까? 주관이죠. 주관도 대단한 주관이죠. 결국 그건 뭡니까? 일제강점기가 바로 동방의 알렉산드리아라는 이야기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거기에 또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두 대부가 있어요. 하나는 이병도 이 사람은 주로 서울대학교에 있으면서 학술원 회장을 20년 가까이 하고 심지어 허정 과도내각 때 문교부 장관까지 했었죠. 문교부 장관 시절에 주로 한 이유가 그 당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교원노조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병도가 그 짧은 시간에 문교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한 일을 보면은 대부분 교원노조 파괴하는 운동이에요.

태두 신석호

하여간 잘 나갔죠. 또 한 명이 같이 조선사 편수회에 근무했던 8살 연하의 신석호인데 이 사람은 고려대학교에 있으면서 국사편찬위원회에 오래 근무했죠. 그런데 이 사람은 일본 기원 2600년 기념장 수여, 1940년에 일제의 훈장을 받은 사람이죠.

그런데 이 사람이 스스로 하는 이야기들을 써놓은 거예요.

“조선인 김창균 군은 총독부 학무국 촉탁으로 가고, 나는 지도교수 이마니시 류 박사의 추천으로 조선사편수회에 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나의 전공을 살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이마니시 류하면 악질 중에 악질인 식민사학자입니다. 조선총독부에 근무했고 그다음에 경성제국대학에 근무했는데 이 이마니시 류가 삼국사기는 다 가짜고 일본서기 연대부터 안 맞는 일본서기는 다 진짜다 이렇게 바꾸는 물이에요.

그 일본서기의 시각으로 보면 앞으로 자세히 일본 서기가 어떤 책인지도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일본서기는 우리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전부 다 야마토 왜의 속국이었다. 신하였다. 이렇게 써 놓은 책이에요.

“이마니시 류 박사의 추천으로 조선사편수회에 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나의 전공을 살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이 당시에 백암 박은식, 석주 이상룡, 단재 신채호 선생을 비롯한 희산 김승학 선생 같은 분들이 일제에 의해 죽거나 감옥에 갇혀서 신음하고 있을 때 조선사편수회 간게 아주 다행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요. 1990년에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국사편찬위원회사라는 책을 냈는데 역대 직원 명부 1호가 바로 신석호예요. 신석호의 재직기간에 대해서 뭐라고 써놨어요. 여기 이렇게 보시면, 1929년 4월부터 1965년 1월 22일까지 대한민국 역사국사편찬위원회의 신석호가 재직한 기간이 1929년 4월부터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이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자편찬위원회를 대한민국 산하로 생각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대일본제국 산하로 생각했죠. 저도 가면 갈수록 제가 식민사학 비판한지 이제 20여 년 넘었는데요. 이렇게 뿌리가 깊은가 하고 거듭 놀라요.

지금도 버젓이 1990년에 국사편찬위원회를 쓰면서 자기네 직원 재직명부에 넘버1, 1번을 갖다가 신석호, 재직기간은 1929년 4월부터 1965년 1월 21일까지 있었다고 당당히 써놓을 정도죠. 이 사람들이 과연 한국인 역사학자들인가? 일본인 역사학자들인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는 거죠.

이덕일 교수

그런데 이기백 씨라는 서강대 교수가 쓴 한국사 신론, 이 책이 뭐 한때는 대한민국 공무원 시험볼라면 전부 다 이 책을 가지고 했어요. 지금도 꽤 팔려나가죠 그런데 이 분이 한국사의 학파를 세 학파로 나눴는데요.

그게 뭐냐면 민족주의 사학 유물사관, 실증사학 이렇게 나눴어요. 제가 아까 뭐라고 그랬어요. 민족주의 역사학이 있고, 그다음에 사회주의 역사학이 있다고 그랬죠, 이건 유물사관이고 그런데 또 하나 뭐가 있다고 그랬습니까? 일제 식민사관이 있다고 그랬죠? 일제 식민사관이 어디로 사라지고 실증주의 사학으로 변했어요.

신석호 씨가 말한 것처럼 자기는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게 참 다행이다라고 말했으니까. 일제강점기에는 자랑스럽게 다녔을 텐데 해방 이후에도 보니까 자기네 해방 이후에 보니까 다 숙청될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 기세등등해졌죠?

그러니까 해방후에도 나는 일제 식민사학한다라고 하는데, 겉으로도 내가 일제 식민사학한다라고 할 순 없으니까. 이름표 바꿔달자라고 해서 바꿔단게 일제 식민사학을 갖다가 실증사학 이렇게 바꿔 달은 거예요.

그러면서 이 사람이 아니 이게 뭐햐하면 그 민족주의 사학이 편협하다라고 비판하고 유물사관도 비판하고 자신이 말하는 실증사학이 뭐냐 하면, 이에 대해서 실증 사학은 한국사의 발전을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이에 발맞추어 보는 것에 반대하였다.

오히려 실증적인 태도로 객관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올바른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게 글이냐 하는 이야기에요. 이거 역사학에서는 이 따위 글은 글이 아니에요. 실증적인 태도가 뭡니까?

그럼 실증적인 태도로 주장하려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사료를 갖고 와보라 이거예요. 0개예요. 임나가 가야라는 사료를 갖고 와봐라 이거예요. 0개입니다.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서 실증이라는 거예요. 왜냐 역사학계를 자기네가 100% 장악했으니까. 자기네만 주장하면 된다하는 이야기죠 이렇게 완벽하게 역사학계를 장악한 이 사람들이 총론으로는 이름표를 실증사학이라고 바꿔 달고 각론에 들어가면 식민사관을 계속 반복하는 겁니다.

일제 식민사관 극복했다. 임나일본부설 극복했다. 이렇게 말해 놓고 나서 각론, 본론에 들어가면 일제 식민사관을 반복하는 그 구조죠. 그 반면에 제가 이 역사TV에서 북한 역사학에 대해서 몇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뭐냐면 북한 역사학은 그럼 어떻게 형성됐나 그 뿌리를 또 알아야 돼요.

지금의 현재 북한의 정치체제에서 호불호를 떠나서 과거에 북한 역사학계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거를 알아야 현재 북한 역사학계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지금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주제들에 대해서 북한 역사학계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되냐면 원래 1945년 10월달에 평양에서 이북 5도당 그러니까 조선 공산당 이북 5도당 열성자 대회라는 게 열려요. 여기에서 북조선 분국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데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죠. 그러니까 한 나라에는 코민테른 제3국제공산당 코민테른의 원칙이 일국 일당주의입니다.

한 나라에는 공산당이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데 이때 1945년 10월에 코민테런 역사상 최초로 일국 이당주의 남한은 미군이 점령했고 북한은 소련군이 점령했기 때문에 북한에만 따로 조선공산당을 사실상 만든 것이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에요.

그리고 여기에서 소위 말하는 민주기지론이라는 노선을 채택합니다. 그래서 북한을 먼저 사회주의화 한다면, 남한을 사회주의화 하겠다라고 하는 전략을 채택을 한 건데요. 이 전략을 가지고 북한에서는 이제 남한에 대한 정책 수립을 한 거예요. 그중의 하나가 북한은 이 당시 이미 역사학을 아주 중요한 체제경쟁의 한 수단으로 삼았어요. 그래서 1946년부터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이 내려보낸 파견원들이 남한의 유수한 역자학자들을 접촉하면서 월북을 종용합니다.

월복을 종용하는 것이 우리가 곧 북한에 김일성 종합대학이 만들어지는데 여기 역사학과 교수로 근무하지 않겠느냐? 또는 우리가 곧 조선역사편찬위원회를 만들건데 여기에 한번 우리 역사학을 제대로 해보자 뭐 이런식으로 이야기하니까 해방 직후에 미 군정이 다시 친일세력을 끌어들여 가지고 실망했던 많은 역사학자들이 북한으로 올라갔습니다.

쟁쟁한 인사들이 이때 다 올라갔다 그래도 과언이 아니에요. 뭐 백남운이라든지. 전석담이라든지. 그 인제 김석형이라든지. 하는 여러 이청원이라든지. 하는 그 당시에 역사학계에서는 그 일류급 인물이자 대부분 독립운동하다가 감옥에 갔거나 뭐 고초를 겪었던 그런 인물들이죠. 이런 인물들이 대부분 월북을 해가지고 이들을 중심으로 1947년에 조선역사편찬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조선역사편찬위원회에 이청원이라는 인물이 위원장이 되죠. 그래서 여기에서는 일제식민사학 청산을 처음부터 중요한 과제로 걸어요. 그러니까 조선의 역사학을 새로 수립하려면 일제 식민사학을 청산해야 된다는 걸 주요한 목표로 내겁니다. 그러면서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주체적인 시각을 가지고 한번 역사학을 연구해 보자라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조선역사편찬위원회를 만들었다고 책이나 논문들을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나중에 제가 조선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역사제문제》를 뭐 결번도 있습니다만 구해서 좀 봤어요. 봤더니 거기서 대단히 놀란 구절을 제가 발견한 게 뭐냐면, 북한이 해방 직후에 역사학계를 재편할 때 누구를 정신적 지주로 삼았냐? 자기네는 단재 신채호 선생과 약연 김두봉 선생, 김두봉 선생은 국어학자이자 이두학자이기도 하죠. 그런데 원래는 국어학과 역사학은 같이 가는 겁니다. 지리학하고 세 가지는 같이 가는 거예요. 역사학, 지리학, 국어학은 원래 같이 가는 건데 한국만 완전 동떨어져서 따로 떨어져있죠.

거기에다가 이 두 분 단재 신채호 선생과 약연 김두봉 선생의 역사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에다가 제가 생각할 때는 6.25 이후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위당 정인보 선생 같은 분들이 납북 당했잖아요. 이분들 찾아가서 또 물어봤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런 분들의 역사관을 가지고 역사학을 정립했어요.

반면에 남한에서는 이병도 같은 사람을 갖다가 스스로 이케우치 히로시, 쓰다 소키치가 날 아주 사랑했다. 그분 인격자였다. 뭐 이런 사람을 갖다가 국자학계의 태두로 섬기고 그리고 일대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것이 아주 참 다행이다라고 하는 신석호 같은 사람이 역사학계의 대부가 되고 그러니 역사학이 다룰 수밖에 없겠죠.

그러다 보니까, 지지난 정권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한국학진흥사업단 연간 300억 정도의 국고를 갖다가 주무르른 자리인데요 그 사업단장이 공개학술대회 석당에서 단재 신채호를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고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다 이렇게 말했죠. 그니까 생각해 보세요. 단재 신채호 선생과 약연 김두봉 선생의 역사관이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라고 하는 학자들과 단재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고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말하는 학자들의 역사관이 어떨 것인지 미루어 충분히 짐작이 가시겠죠.

그래서 제가 놀란 글 중에 하나가 이 역사 역사제문제에 나와있는 1949년에 홍기문, 홍기문 선생은 벽초 홍명희 선생의 아들이에요. 이두학자인데 역사에 대해서 상당히 밝죠. 그래서 1949년 조선의 고고학에 대한 일제 어용학설의 검토라는 이 논문을 보고 제가 상당히 놀랐어요.

이덕일 교수

우리 2020년 지금도 일제 식민사관이 역사학계를 다 점량하고 있는데, 1949년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949년에 쓴 글이라라는 걸 염두해 두고 읽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1905년 소위 을사조약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한 개 자기의 식민지로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한 게 자기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에 성공함에 따라서 일시 그들의 소위 역사학자들은 조선 역사에 대해서 이상한 관심을 보였다. 혹은 고적과 고분 등을 발굴하고 혹은 문헌을 고 증하여서 조선역사로 부터는 일찍이 듣지 못한 여러가지의 사실을 입증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찍이 듣지 못한 여러 가지의 사실이라는 말이죠. 지금 우리가 식민사학이라고 비판한 것들이 다 이 이야기 들이예요. “일찍이 듣지못한 여러 가지 사실” 그러면 그들이 입증한 사실의 가장 중요한 것이란 과연 어떠한 것들인가?

“첫째, 석기 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오늘의 평양을 중심 삼아서 한인(漢人)의 식민지인 낙랑이 설치되었다는 것이요” 이게 바로 낙랑군 평양설이죠.

“둘째, 신라 백제와 함께 남조선을 분거하고 있던 加羅(가라)가 본래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요.” 이게 바로 임라일본부설이고 임나가야설이요 지금도 이 두 가지는 지금도 남한 강단사학계가 아주 도고마 성서처럼 여기고 있는 구절이죠. 이걸 갖다 북한학계 홍기문는 1949년에 지금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셋째, 신라 백제는 똑같이 마치 일본의 부용국가로서(일본에 붙어 있는 국가) 그 중에도 백제는 그가 멸망하기까지 종시일관하여 일본에 복속했다는 것이요” 남한의 고려대 명예교수 김현구란 분이 뭐라고 썼냐면 백제는 청황을 이 사람은 반드시 고대고 지금이고 반드시 천황이라고 쓰는데요. 천황을 섬기기 위해서 백제에서 왕녀를 공주들로 갖다 인질로 바쳤다.

그런데 야모토 왜의 웅략(雄略)이 이 왕녀중에 한명이 바람폈다고 불태워 죽였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번엔 백제에서 실례했다고 남자 왕족을 왕자들을 갖다가 천황에 바쳐가지고 인질로 삼게 했다. 버젓이 써놓고 있어요. 여기에서 벗어난게 하나도 없습니다. 똑같죠.

“넷째, 고대의 중국문화가 결코 조선인의 손을 거치어 일본에 소개된 것이 아니라 중국 본토나 또는 그의 식민지인 낙랑으로부터 직접 일본이 받았다는 것이다.” 이게 징검다리 놀리입니다.

한반도는 우리의 문화를 갖다가 일본에 전파해 준 것이 아니라 중국의 문화를 잠시 거쳤다가 일본에 전해 주었다라고 하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제가 이 글을 보고 이게 1949년에 벌써 이런걸 썼구나라고 제가 상당히 놀랐던 적이 있고 그래서 북한이 지금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는 핵심이유가 바로 역사관에 있구나라는 거를 제가 이런 글들을 보면서 터득을 하게 된 겁니다.

이덕일 교수

남한에서는 어떤가 강만길이라는 분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장을 했어요. 노무현 대통령 때 그런데 이분이 어떤 집안이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선정이 되면은 조사 대상자로 선정이 되면 그 집안에 당신 집 안이 친일반미족행위 집안으로 선정됐다라고 우편 공문으로 보냈어요.

그런데 그중 어떤 집안에 보냈냐면 바로 이 홍명희 선생 집안에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거를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라 강만길 씨 자신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자기 자서전 《역사의 시간》이라는 자서전 뒤에다가 자기가 써놓은 일기에 나온 내용이에요.

일기에 뭐라고 썼냐면 중추원 찬의를 지낸 홍승목의 증손 홍기훈씨도 같은 내용(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했다는 우편문을 보냈느냐?)의 전화로 걸어왔다 홍승목은 소설 임꺽정의 저자이며 해방 후 북에 가서 부수상을 지낸 벽초 홍명희의 조부다. 벽초의 부친은 한일합방 후 자결로 했는데 조부는 조선총독부에 중추원 참의를 지내 이번 친일반민족행위 조사 대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자결한 홍범식 전 군수에 대선 이름도 안 써놓고 하여간 중추원 찬의를 지냈기 때문에 당신네 집안은 뭐 그 나중에 3대가 독립운동했든 말든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한정됐다고 보냈다 하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 얘기를 왜 하느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직원들에게 한 연설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연설 중에 뭐라고 했냐면 셋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문제인데 치욕스러운 역사도 철저히 밝혀서 가르침으로써 역사 반성의 폭을 넓힐 수 있어야 한다.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서 역사적 단죄를 하지 않고는 사회 정의가 서지 않는다. 친일반민족행위 규명과 역사적 단죄는 평화통일의 추진 과정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100%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역사적 단죄에 3대 독립운동을 했던 벽속 홍명희 선생은 신간회 부의장 했던 분이죠. 아들 홍기문도 다 독립운동 했던 분이에요. 벽토 홍명희 선생의 아버님은 1910년에 합방에 나라 강점 당한 데 분개해 갖고 자결했던 분이고 그분의 아버지가 중추원 찬의했다.

그런대 친일 반민족 행위 대상자라고 선정했는데 이병도, 신석호는 왜 빠졌냐 이거예요. 중추원 찬희가 더 나쁜 짓을 했어요? 이병도, 신석호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해 가지고 자국사를 난도질한 이병도, 신석호가 더 나쁜 짓을 했어요.

여기 보시면, 홍명희 선생 부친 군수 홍범식 1910년에 일제가 나라를 강점하자 자결했어요.

벽초 홍명희 선생 이건 뭐냐면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라는 게 있어요. 총독부에서 만든 여기 소화 5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촬영했죠. 그 다음에 그 아들인 홍기문 형사과에서 촬영했죠? 이런 집안에 나가는 당신 집안 친일반민족행위자야라고 해서 공문을 보냈어요. 이렇게,

그런데 이병도, 신석호는 빼놨어요. 끝까지 빠졌어요. 제가 나중에 여러에피소드를 들었죠. 이방도 신석호를 넣자 그랬더니, 위원들 중에 이병도, 신석호를 넣으면 사퇴한다. 난리를 쳤다는 거죠. 이런 구조니까 자기 말하고 왜 다르냐 이거예요. 치욕스러운 역사로 철저히 밝혀서 논리는 이병도 신석호는 자기네 스승이라는 거죠.

그러면 이병도, 신석호는 자기가 학교 들어가서 만난 사이인 겁니다. 2차적 관계예요. 그러면 남의 할아버지 아버지를 갖다가 친일반미족행위자로 선정하겠다는 사람들이 자기가 학교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어휴 안 되지, 우리 스승은 이게 말이 되냐 하는 이야기예요. 이런 것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 친일역사학 친일사학에는 좌우도 없고 보수, 진보도 없다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죠 얼마나 어마어마한 구조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가야사를 임라일본부사로 바꿔놓고 그 다음에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었던 낙랑군을 갖다가 평양에다가 갖다 놓고 또 정조 독살설이 나오면 아주 광문하죠.

정조 독살설의 요체는 마지막 당수가 이완용이었던 노론이 독살했다는 거잖아요. 아니 감히 우리 노론이 독살했다고? 아주 광분하죠. 완벽한 카르텔이 카르텔은 결국 이덕일 역사TV를 보시는 여러분 한분 한분이 각성하셔가지고 이렇게 잘 되겠는가 이 나라 정치가들, 항상 이 친일 친일사학자들하고 결탁합니다.

이 사람들은 워낙 숫자가 많으니까.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보수의 얼굴을 하고 보수정권하고 잡고, 진보정권이 들어서면 진보인 척하고 진보하고 잡고 그러면서 일제 식민사학은 영원히 주류로 행세했던 것이 바로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의 현주소이고 역자죠 내가으로 이 구조를 하나하나 여러분들에게 일들의 말을 통해서 하나하나 밝혀드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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