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살74] 코로나 팬데믹으로 드러난 서구사회의 반문명②
상태바
[아침햇살74] 코로나 팬데믹으로 드러난 서구사회의 반문명②
  • 문경환 주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20.04.14 22: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앞의 글에 이어

2. 반문명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전했다는 2020년 지구상에 위(앞의 글)와 같은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걸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나아가 도저히 문명사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상들에 대해 많은 이들이 ‘그럴 수도 있다’며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과거 노예제사회에 순장제도라는 게 있었다. 노예주인이 죽으면 노예를 산 채로 함께 파묻는 제도다. 그 이전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이 죽을 때 시체와 함께 죽은 사람이 사용한 돌칼 같은 도구를 함께 묻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다가 노예제도가 생기면서 도구와 함께 노예를 묻는 문화가 생긴 것이다. 당시 노예주들은 노예를 ‘말하는 도구’, ‘살아있는 시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순장제도는 노예제사회가 사라진 후에도 꽤 늦게까지 유지됐는데 중국의 경우 청나라 초기에도 순장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순장제도는 말도 안 되는 문화다. 지금 순장을 한다고 하면 반문명 행위로 지탄받는 건 물론이고 살인죄로 처벌받는다. 하지만 당시에는 순장을 당연하게 여기며 순응했다. 심지어 자기가 모시던 주인을 따라간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함께 묻히는 자사순장도 있었다. 반문명적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모습이 반문명적이라는 것을 잘 모르며 문제의식을 못 느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국민을 포기하는 스웨덴의 모습, 노인을 포기하는 이탈리아의 모습, 국민을 속이고 우롱하는 미국,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도 ‘지금 상황이 비상시국이니 어쩔 수 없다’, ‘형편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심지어 ‘저런 조치가 현명하고 효율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쉽게 한다.

대구 시민들이 자신들뿐 아니라 전 국민을 농락한 대구시장과 미래통합당을 지지하는 것도 ‘저기는 원래 저래’라고 당연하게 여겨버린다. 반문명적 현상을 그냥 일어날 수도 있는 현상으로 여긴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나타난 반문명적 현상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바로 극단적 개인주의다. 집단과 떨어진 개인이 우수하고, 집단보다 개인을 앞세우는 문화가 우월하며, 집단이 개인을 책임지지 않는 모습을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주의가 오늘날 서구사회에 널리 퍼져있으며 지금의 반문명적 현상을 만들었다. 

코로나19로부터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 정부의 모습을 보자. 개인주의자들은 정부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래서 극단적 개인주의는 종종 무정부주의로 연결된다.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정부가 국민을 책임지지 않는 모습은 당연하다.

개인의 생명과 건강은 개인이 알아서 지켜야 하며 정부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약탈이 발생하거나 일부 집단의 폭동이 일어나는 등 사회가 붕괴하는 것만 막는 최소한의 개입만 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그러니 스웨덴, 이탈리아, 미국, 일본 등의 모습이 용인되는 것이다. 

사재기 현상도 생각해보자. 사재기는 전형적인 ‘나만 살자’는 현상이다. 사재기 현상은 생존에 필수인 식료품과 생필품을 집단이 해결하느냐, 개인이 해결하느냐의 문제, 나아가 위기 상황에서 함께 살아남느냐, 혼자 살아남느냐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사재기는 결국 남들은 죽든 말든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에서 벌어진다. 동시에 ‘함께 살기 위해 나 혼자 사재기를 안 한들 무슨 소용인가. 남들이 다 사재기하면 아무 소용 없는데...’ 같은 불신이 만연한 사회에서 사재기가 발생한다. 

신천지가 유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래 사이비종교는 개인의 복락과 영생을 강조하며 사람들을 현혹한다. 신천지는 14만4천 명만 구원받는다며 포교를 했다고 한다. 거꾸로 말하면 거기에 포함되지 못한 나머지 78억 명은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이다. 신천지에 포섭된 이들은 78억 명이야 구원을 받든 말든 자기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가족도, 사회도 버리고 오직 교주만 추종한다. 

미래통합당과 검찰, 기레기가 결탁한 것도 개인의 부귀영화와 권력을 위해서다. 자손 대대로 권세를 누리려는 자들끼리 결탁하여 국민을 속이고, 억압하고, 착취한다. 이처럼 모든 반문명의 바탕에는 극단적 개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3. 문명과 반문명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생활 모습에 대해 세 가지로 단순화시켜 분류해보자. 

 

1단계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지배하는 사회다. 

1단계의 가치관이 사회를 지배하면 배타적이고 극단적인 개인 이기주의가 만연한 사회가 된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며 필요하면 남을 짓밟고 약탈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약육강식의 정글과 다름없다. 이게 미국을 위시로 한 서방사회에 일반화되어 있는 가치관이며 사회 질서다. 여기서는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 한다. 모든 것은 경쟁이며 남을 밟고 올라 승자가 되지 않으면 도태된다. 그래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문명은 물질문명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게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급차, 고급아파트 등이 많은 걸 최고의 문명으로 여긴다. 이들은 문명국을 꼽을 때도 경제규모를 나타내는 GDP를 가장 중요한 지표로 여긴다. 사람의 가치를 따질 때도 재산이 얼마나 있느냐를 주요 기준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번에 드러났듯이 이런 물질문명만 발달한 사회는 코로나19와 같은 외부의 충격에 굉장히 취약해 쉽게 아수라장이 된다. 이런 재난은 사람들이 서로 돕고 힘을 모아야 극복할 수 있는데 서로 자기만 먼저 살겠다고 하니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코로나19에만 특별히 취약했던 게 아니라 원래 잠재돼있던 약점이 코로나19를 계기로 표면에 드러났고 증폭됐다고 봐야 한다. 물질만능주의는 문명사회의 모습일 수 없다. 

 

2단계는 만인의 공존을 추구하는 사회다. 

2단계의 사회는 서로를 인정하고 규칙과 계약을 통해 서로 지키면서 함께 발전하는 사회로 공존, 공리, 공영을 추구하는 사회다. 

1단계에도 규칙은 있지만 형식에 불과하고 현실에서는 약육강식의 정글일 뿐이며 탐욕과 약탈을 합리화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윤석열 검찰의 조국 장관 사냥에서 봤듯 법은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기 위한 무기로 쓰인다. 원래 우리 민족 역사에서 최초의 법으로 꼽히는 범금8조도 권력자, 노예주들이 노예와 백성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런 1단계 사회와 달리 2단계 사회는 공정한 규칙 속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서로에게 이익을 보장하는 방향에서 계약을 맺고 굴러가는 사회로 1단계보다 훨씬 발전적이고 합리적이다. 한국의 민주개혁세력이 나름 추구하는 사회가 이런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전우익 농민의 저서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현암사, 1993)의 제목이 이런 사회를 잘 표현하고 있다. 경제형태를 놓고 보면 협동조합이 여기에 해당한다. 협동조합은 주식회사와 달리 모든 조합원이 출자금과 무관하게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며 출자한 만큼 이익을 나눠 갖는다. 

 

3단계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헌신으로 발전하는 사회다. 

3단계 사회는 자기가 아닌 남을 위해 사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로 인간의 보편적 지향에 적합한 가장 우월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만인의 존경을 받는 안중근 의사는 생전에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爲國獻身軍人本分),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見利思義見危授命)라는 말을 남겼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나라의 자주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서슴없이 총을 들었다. 

▲ 안중근 의사.  © 인터넷
▲ 안중근 의사.  © 인터넷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도 많은 이들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조 여사는 편지에서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라고 하였다. 어머니 개인에게 잘 하는 게 효도가 아니라 대의를 위해 한 몸 바친 것을 효도라고 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와 조마리아 여사의 모습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의 전형이며 사람들은 이들을 위인이라 부른다. 

2001년 1월 26일 일본 신오쿠보역에서 승객 추락 사고가 발생했다. 술에 취한 채 플랫폼을 걷던 사람이 선로에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역에는 전철이 진입하고 있었다. 이때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이 선로에 뛰어들었다. 뒤이어 일본인 한 명도 뛰어들었다. 그러나 취객을 구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고 끝내 세 명 모두 전철에 치어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한일 양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고가 난 선로는 교량 구조였기에 비상시에 옆 선로로 건너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이수현과 일본인이 선로에 뛰어들 때는 이미 전철이 진입하는 상황이었다.

즉, 두 사람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취객을 구조하기 위해 몸을 내던진 것이었다. 일본 총리가 유족과 한국 대통령에게 조의를 표하는 편지를 보냈고 한일 양국 국민들도 이들을 추모하였다. 이 사건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사람들은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이수현을 지금도 의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 이수현 추모 홈페이지. 
▲ 이수현 추모 홈페이지. 

전태일 열사도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 인물이다. 전태일 열사는 법에 보장된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착취 받는 노동자들을 위해 힘쓰다 끝내 분신으로 항거하였다. 전태일 열사의 노력으로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태일 열사가 남긴 유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전태일 열사가 ‘너’를 ‘나’라고 부른 것은 나와 너를 동일시한 것이다. 너를 위한 것이 곧 나를 위한 것이라는 정신을 볼 수 있다. 이를 동료나 인류 전체로 확대할 수도 있다. 나와 우리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여기는 것이 곧 집단주의다. 

전태일 열사는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자기 몸에 불을 붙였다. 자신의 육체는 그렇게 불에 타 사라지겠지만 이를 통해 또 다른 전태일들이 조금이라도 더 존중받고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참으로 숭고한 인생관이다. 이런 사람이 만인의 존경을 받는다. 

▲ 전태일 열사 흉상.  © dalgial
▲ 전태일 열사 흉상.  © dalgial

1단계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진 3단계의 사람들을 욕하지 못한다. 2단계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3단계의 가치관을 가진 이들을 존경한다. 이렇게 보면 3단계의 가치관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올바른 가치관이며 인간의 보편적 지향에 적합한 가장 우월한 가치관임을 알 수 있다. 

물론 1단계 가치관을 가진 사람 가운데는 3단계의 가치관을 두고 독재나 전체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국가나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조차 3단계 가치관을 가진 이들의 헌신 덕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전 세계에 드러난 아수라장을 보며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떤 사회를 추구해야 할지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