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환 칼럼]일본의 전후처리가 독일과 달랐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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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환 칼럼]일본의 전후처리가 독일과 달랐던 이유
  • 문경환 주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9.08.1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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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일본의 차이는 점령국이 만들었다

1. 독일과 일본의 차이는 미국이 만들었다

(1) 핵심 원인은 전후처리 과정의 차이

일본의 과거사 부정이 국민적 분노를 넘어 전 세계의 지탄을 받는 가운데 독일의 과거 청산이 주목을 받는다. 2차 세계대전에서 같은 패전국이었음에도 독일과 일본은 전후처리 과정이 확연히 달랐다. 독일은 나치 세력을 철저히 청산했고 오늘까지도 청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 법원은 오는 10월 나치 수용소 경비원이었던 92세 전범에 대한 재판을 시작한다고 밝혀 나치 청산 의지가 굳건함을 보여주었다. 반면 일본은 전범 세력과 그 후예들이 지금도 일본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군국주의 사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혹자는 이런 차이를 독일과 일본의 국민성, 민족성에서 찾는다. 어떤 이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로 설명하기도 한다. 베네딕트는 서양의 ‘죄의 문화’와 일본의 ‘수치의 문화’의 대립이 독일과 일본의 전후인식의 차이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베네딕트, 『국화와 칼』, 김윤식 옮김, 을유문화사, 2002.)

그러나 독일인의 국민성이 일본인보다 우월하다거나, 서양의 문화가 동양의 문화보다 우월하다면 애초에 독일에서 나치가 득세하고 전대미문의 반인륜범죄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은미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전후처리에 미친 영향 연구」(『동아연구』 제58집, 2010.)에서 “독일과 일본의 전후인식 및 책임의 차이가 전후, 동일한 역사를 경험한 양 국가의 전후처리 과정의 차이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독일과 일본은 패전국으로서 주체적인 전후처리를 할 수 없었고, 승전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양국이 전범처리 및 전후배상을 실현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승전국들, 그리고 그 가운데 새로운 시대에 절대적 강자로서 군림하게 된 미국이었다”고 지목했다.

나아가 최은미는 독일과 일본의 전후처리를 비교한 연구는 대부분 “전후인식 차이가 전후책임의 차이를, 전후책임의 차이가 전후배상의 차이를, 그리고 이러한 전후 배상의 차이가 각국 국민들의 전후인식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순환적 논리”를 펴고 있어 미국의 책임을 가리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독일과 일본의 전후처리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독일의 전후처리 과정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나치 독일은 급격히 붕괴한다. 히틀러의 뒤를 이어 독일 국가원수가 된 카를 되니츠 해군 제독이 이끄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전쟁을 포기하고 5월 8일 미국, 영국에 항복하였다. 소련에는 다음날인 9일에 항복했다.

독일 입장에서는 자본주의 진영에만 항복해 전후처리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고 했던 것 같지만 그런 전략을 쓸 만큼의 영향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또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항복 후에도 해산하지 않고 버텼지만 오래 갈 수 없었다. 5월 20일 소련이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하면서 결국 23일 연합군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하고 장관들을 체포하였다.

6월 5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4개국은 베를린에서 연합국 관리위원회를 설치하고 독일을 4개로 분할,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약 4년 동안 독일은 4개국 분할통치 속에서 전후처리 과정을 밟는다.

연합군은 1945년 11월부터 1946년 9월 31일까지 독일 뉘른베르크에 국제군사법정을 설치하여 ‘뉘른베르크 재판’을 진행했다. 이 재판에 대해 일각에서는 “전후 미국의 세계 자본의 재편을 위한 희생양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을 한다. (장수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서독의 자본주의」, 『역사비평』 26호, 역사문제연구소, 1994.) 재판 결과를 보면 소련의 요구만큼 강력한 처벌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듯하다. 프리췌 독일 제국 선전부 실장과 파펜 부수상 겸 대사, 샤하트 경제장관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선언되었다. (장수한, 1994.)

▲ 뉘른베르크 재판 장면. ⓒ 자주시보

전쟁 주모자만 다룬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4개국은 자기 점령지에서 독자적인 후속재판을 통해 나머지 잔당을 처벌하였다. 미국 점령지역에서는 1,941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1,517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 가운데 324명이 사형을, 247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영국 점령지역에서는 1,985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가운데 240명이 사형을, 프랑스 점령지역에서는 2,107명이 회부되어 104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소련 점령지역에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더 엄한 처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한 통계에 따르면 1950년까지13,532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안병직 외, 『세계의 과거사 청산: 역사와 기억』, 푸른역사, 2005.)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어쨌든 초반에는 나치 청산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1948년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연합국의 나치 청산 작업은 정체를 맞는다. 미국은 ‘반나치’에서 ‘반공’으로 노선을 전환하였고 ‘탈나치’ 정책도 독일 재건을 통한 소련 견제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박찬임은 「독일의 전후처리와 과거극복」(2009)에서 “(미국의 노선 전환) 결과 ‘탈나치화’ 작업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 이러한 추세에 미국은 책임이 있으며, 여기에 뉘른베르크 재판의 한계가 있다. 재판이 끝난 1950년대에 서독에서는 ‘재나치화’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나치청산이 후퇴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맥클로이 미국 고등판무관은 1949년 여름 ‘사면위원회’를 구성, 1951년 1월 말 사면을 단행했다. 특히 기업인들과 많은 군인들이 사면대상에 들어있었는데 이들은 나치 지도부에 속한 ‘주요 전범’이었다. 그러나 기업인들 중 누구도 ‘주요 전범’으로 재판에 넘어가지 않고 사면을 받았다. (장수한, 1994.)

미국뿐 아니라 영국도 나치 청산에 소극적이었다. 영국은 당시의 관료들을 숙청시키기보다는 효율적인 행정을 위해 될 수 있으면 그들이 원래 일자리에 머무르는 것을 묵인하고자 했다. 또 경제 마비를 우려해 광산업과 농업부문을 청산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송충기, 「나치청산과 독일인」, 『서양사론』 80호, 한국서양사학회, 2004.)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했던 서독 지역에서 나치 세력이 빠르게 부활했다. 1949년 말 서독의회는 연방사면법을 통과시켜 다수의 나치 범죄자들을 사면하였다. 또 1951년에는 이른바 131조 법을 통과시켜 관료, 직업군인 등 나치 부역자들을 복귀시켰다.

1954년 2차 사면법으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박찬임, 2009.) 심지어 1959년 취임한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은 나치 수용소를 설계한 전력이 있으며 1966년 취임한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전 총리는 나치에 합류해 군에 복무한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밖에 적지 않은 정부 인사들이 나치 부역자였다.

반면 소련이 점령했던 동독 지역은 반대의 길로 갔다. 동독의 지도부는 나치의 공산당 탄압 속에서 반나치 투쟁의 선봉에 섰던 이들이었으며 철저한 나치 청산을 통해 동독이 서독에 비해 정통성이 있고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동독 정부는 동독을 순결한 반파시즘 국가로, 서독을 나치가 부활한 국가로 대비시켰다. (최승완, 「냉전기 동독의 대 서독 선전공세」, 『역사와 경계』 54호, 부산경남사학회, 2005.)

나치가 부활한 서독이 다시 철저한 나치 청산에 나선 계기는 60년대 유럽을 휩쓴 68혁명의 영향이 컸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세대인 68세대는 기성세대와 기존질서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나치 부역자와 비시 괴뢰정부 부역자들이 독일과 프랑스에서 여전히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이 컸다.

또한 프랑스-알제리 전쟁, 베트남 전쟁 등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되는 식민지 침략전쟁에 반대 입장을 가졌다. 이들은 중국의 마오쩌둥, 베트남의 호치민, 쿠바의 체게바라를 연호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기존 사회주의 운동에 동의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구좌파’와 다른 ‘신좌파’로 규정했다.)

이런 68세대를 중심으로 서독의 젊은 지식인들이 과거사를 폭로하고 반성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인들도 여기 가담, 서독에서 나치 청산 분위기가 나타났다. 68혁명 이듬해인 1969년 총선에서는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사회민주당(사민당)이 원내1당으로 등극하면서 우파로 분류되는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과 연정을 끊고 서독 최초의 사민당 총리인 빌리 브란트를 세웠다. 신나치 정당인 국민민주당은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나치의 탄압을 받은 경력이 있던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70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방문해 전쟁 희생자 비석 앞에서 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이 사건은 독일의 나치 청산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후 독일 고위 정치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과거 나치의 범죄행위에 대해 거듭 사과하였고 철저한 나치 청산 작업과 배상 작업을 진행했다.

▲ 바르샤바에 설치된 빌리 브란트 사죄 기념 부조. ⓒ 자주시보

(3) 일본의 전후처리 과정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된 것과 달리 일본은 미국 단독 점령을 겪었고 그나마도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간접 통치를 받았다. 당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외부의 간섭과 통제 없이 아시아를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지역적인 안정을 이루고자 하였다.

따라서 일본 점령은 독일과 같은 분할 점령이어서는 안 되며, 점령 형태는 연합국 점령 형태를 취하더라도 미국의 우월적인 영향력이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점령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명확히 언급한 것이다. (최은미, 2010.)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은 일본과 동북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쏟기도 힘든 형편이었기에 미국의 요구가 관철될 수 있었다.

1945년 12월 27일 연합국은 극동위원회(Far Eastern Commission)와 대일본 연합국이사회(The Allied Council for Japan)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구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일본 점령정책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기획하고 수행하였다. 미국은 극동위원회와 연합군 최고사령부 등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일본 점령정책의 결정과 집행을 주도하였다. (박원순, 「동경재판의 시작과 끝」, 『근현대사강좌』 7호, 1995.)

1946년 1월 19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극동국제군사재판소를 설치하고 5월 3일부터 재판을 시작했다. 재판은 2년 반이 넘게 진행돼 1948년 11월 12일에야 끝났다. 재판부는 판결 전 사망한 2명과 정신장애로 소추가 면제된 1명을 제외한 나머지 25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구체적으로는 교수형 7명, 종신형 16명, 유기형 2명이다.

하지만 사형이 집행된 7명을 제외하고는 A급 전범 19명 전원을 석방해 버렸다. 그리고 냉전 격화를 핑계로 미국은 재판을 조기 종결했다. (최은미, 2010.) 전쟁의 가장 큰 책임자라고 볼 수 있는 천황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았고, 아우슈비츠의 생체실험과 비견할만한 731부대의 범죄 또한 묻어버렸다. 대신 미국은 731부대의 실험 자료를 가져가 훗날 한국전쟁 때 세균전에 활용하였다.

이후 미국은 일본 내 선처 요청에 따라 1958년까지 A급과 B급 및 C급 전범자 대부분을 풀어주고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 (유웅조, 「독일과 일본의 전후처리 및 과거 침략행위에 대한 입장비교와 한국의 대응과제」, 『이슈와 논점』 제766호, 국회입법조사처, 2013.)

냉전 시기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미국은 전쟁 배상도 축소시켰다. (유웅조, 2013.) 원래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의 전쟁 배상 문제를 상당히 가혹하게 처리하였다. 군수산업의 완전한 파괴와 관련 산업의 삭감, 배상 철거 공장 지정을 철저히 진행해 30% 정도 중간배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냉전의 격화와 더불어 미국은 일본 경제의 급속한 부흥을 위해 배상 정책을 전환하였다. (박원순, 「일본의 전후배상정책과 그 실제」, 민족문제연구소,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아세아 문화사, 1995.) 미국이 주도해 1951년 9월 8일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패전국 일본의 전쟁책임을 최소한으로 경감시켜 주었고,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내려 주었다. (이원덕,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하영선, 『한국과 일본 새로운 만남을 위한 역사 인식』, 나남, 1997.)

(4) 독일과 일본의 차이 분석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전후 국제질서를 재편하면서 자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할 전략을 구상하였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경쟁자인 유럽을 확고히 능가하는 영향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거기다 소련과 사회주의 세력은 미국의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이에 미국은 독일 나치 세력과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을 자국의 충실한 부하로 활용할 고민을 하였을 것이다.

한때 적이었다고 해도 부하로 삼는 게 가능하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전쟁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어준다. 적에게 패배하면 물리적인 피해도 입지만 정신적인 굴복도 심각하다. 공포에 젖은 패자는 승자에게 충성하며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이를 이용해 승자는 패자를 얼마든지 부하로 삼을 수 있다.

당장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비시 괴뢰정부가 대표적 사례다. 히틀러는 5월 10일 ‘적색작전’을 개시, 한 달여 후인 6월 14일에 프랑스 수도 파리를 함락했다. 6월 22일 독일과 프랑스가 정전협정을 맺을 때까지 불과 한 달 반 동안 연합국은 군인 36만 명 사상, 190만 명 포로, 2천 대 이상의 항공기 파괴 등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 지도부는 독일에 항복하면서 북부 프랑스를 넘겨주고 남부에 비시 정부를 수립했다. 비시 정부는 철저히 독일의 통제에 따르는 괴뢰정부였다. 비시 정부는 독일에 엄청난 물자를 공급했고 60만 명의 노동자를 독일로 강제징용을 보냈다. 또 유대인 탄압에도 동참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독일이나 일본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고 써먹을 구상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이런 구상이 비교적 잘 실현되었지만 독일의 경우는 달랐다. 독일과 일본이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다자 점령이냐 단독 점령이냐의 차이가 있었다.

독일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4개국이 분할 통치했지만 일본은 미국 단독 점령 아래에 있었다. 일본의 사학자 모치다 유키오는 연합국이 독일에 처음부터 경쟁적으로 전쟁 범죄를 철저히 추궁한 반면 일본에서는 미국이 동서 냉전 시기 일본을 우방으로 만들기 위해 책임 추궁을 피해갈 조건을 만들어주었다고 분석했다. (전승훈, 「일본은 왜 독일과 정반대의 길로 갈까」, 동아일보, 2013.8.24.) 일본과 달리 독일에서는 여러 나라가 분할 점령하는 바람에 미국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는 소리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지역 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따라서 미국은 이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은미, 2010.) 당시만 해도 미국은 자본주의 종주국이 아니었다. 반면 일본은 유럽 국가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둘째,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력 차이가 있었다.

독일에서 초기에 나치 청산이 발 빠르게 진행된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 때문이었다. 소련은 다른 3개 국가가 나치 청산을 적당히 하려고 할 때마다 강경 입장을 고수했다. 독일에서 나치 청산이 가장 철저히 된 곳도 소련이 점령한 동독 지역이었다. 서독 지역은 어느 정도 나치 청산을 하다가 다시 나치 부활을 허용하였다. 그러다가 68혁명으로 독일 내에서 좌파 세력이 힘을 얻자 다시 철저한 나치 청산을 시작했다.

반면 일본은 사회주의의 영향이 크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 대신 한국을 분단시켰다. 일본에는 소련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일본의 전후처리에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을 철저히 차단했다.

사회주의 세력이 과거사 청산에 영향을 준다는 점은 한반도에서 친일 청산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봐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세력이 주류가 된 38선 이북 지역은 친일 청산을 철저히 한 반면, 사회주의 세력을 철저히 탄압한 38선 이남 지역은 친일 청산이 거의 되지 않았다. 이 후과는 오늘날에도 이어져 자유한국당 같은 친일 후예들이 대놓고 ‘우리 일본을 위해 친일·친미 해야 한다’고 떠드는 상황까지 왔다.

 

2. 실천적 과제

독일과 일본의 과거사 청산이 왜 정반대의 길을 갔는지를 보면서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찾고 우리 입장에서 오늘의 실천적 과제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일본 군국주의 부활에 경각성을 가지고 반대, 배격해야 한다.

일본은 패전국임에도 전후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과거사 청산을 안 했다는 것은 과거 군국주의 세력의 후예들이 일본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군국주의 사상과 노선, 정책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본은 힘을 키워 언젠가 한반도를 다시 강점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있다.

과거 전쟁 범죄와 식민지 강점을 반성하지 않는 것은 언젠가 이를 반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막는 것을 우리 민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로 인식하고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 8월 15일 광복 74주년을 맞아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서 10만의 시민들이 폭우를 뚫고 ‘노 아베’ 촛불을 들었다. 노래에 맞춰 선전물을 흔드는 촛불 시민들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둘째,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부추기는 미국을 절대 믿지 말고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켜야 한다.

일본 군국주의 부활의 배경에는 일본을 자국의 부하로 삼고 일본의 힘을 키워 동북아를 장악, 통제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있다. 미국은 이를 위해 독일과 달리 일본을 분할하지 않고 온전히 보존했다.

만약 미국이 소련과 일본을 분할 점령했다면 군국주의를 청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 대신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고 그 바람에 엉뚱하게도 일제 강점의 피해자인 우리가 분단되고 말았다. 이게 다 일본 군국주의 세력을 활용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실현된 결과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보면 미국은 우리 민족에게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다. 이런 미국이 한국뿐 아니라 동북아에 자기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우리는 용인할 수 없다. 미국의 동북아 영향력을 축소시켜야 일본의 군국주의가 약화된다. 주한미군 철수, 사드 기지 철거 등을 통해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해야 한다.

셋째, 자유한국당과 친일적폐세력을 완전히 쓸어버려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일본이 한반도를 다시 강점하는 발판 역할을 한다. 자유한국당 세력이 집권하면 항상 일본의 요구를 수용해왔다. 박정희는 일본의 요구를 전폭 수용하며 한일협정을 체결했고, 박근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고 ‘위안부’ 합의를 하였다. 자유한국당이 사라져야 일본이 동북아에서 발붙일 곳이 사라진다.

독일이 나치 부활을 막고 확실한 청산을 할 수 있었던 힘은 68혁명의 영향으로 상대적 진보세력이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상대적 진보세력이 주류가 되고 집권하면서 독일 내 나치 세력이 버틸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지지·지원하는 자유한국당 같은 세력이 사라지고 한국 사회가 더욱 진보적으로 발전해야 일본 군국주의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오늘의 반일·반아베 운동은 단순히 우리 국익을 지키는 운동이 아니라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막고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수호하는 숭고한 운동이다. 반일·반아베 운동을 더욱 확대, 발전시키며 동시에 자유한국당과 친일적폐세력을 청산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끊어내는 운동을 결합해 이 땅에 진정한 정의와 평화, 번영의 시대를 열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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