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살289] 북미 직접 대결, 미국이 패배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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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살289] 북미 직접 대결, 미국이 패배한 날
  • 박명훈 주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24.03.1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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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미국은 80년 가까이 군사 대결을 이어왔다. 두 나라의 영토나 인구 등을 비교해 볼 때, 미국이 승리했을 것으로 생각할 법하다. 그런데 실제 벌어진 북미 간 직접 군사 대결에서는 대개 북한이 승리했다.

북미 직접 대결을 들여다본다.

 

죽미령 전투에서 처참하게 완패한 미국

한국전쟁 초기, 경기도 오산 죽미령에서 북미 간 첫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은 죽미령 전투에서 ‘완패’했다고 평가한다. 죽미령 전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 인민군은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뒤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인민군의 진격에 놀란 미국은 선발대로 특수임무부대를 파견했다. 6월 30일,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가 일본 후쿠오카의 이타즈케 공항에서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들어왔다. 미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맥아더 휘하인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은 찰스 스미스 중령에게 오산 북쪽에서 인민군을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 부산을 거쳐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 [사진 출처: 위키백과]
▲ 부산을 거쳐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 [사진 출처: 위키백과]

스미스는 태평양 전쟁 참전 용사로 군인 훈장을 받은 인물이었다. 스미스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1941년 12월 7일) 당시 진지 방어의 공로를 인정받아 군인 훈장을 받았으며 과달카날 전투에서도 공적을 세우는 등 실전 경험이 많았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스미스 부대)의 대원은 6월 30일 부산에 먼저 들어온 ▲1대대 소속 본부 요원 일부와 B, C중대 ▲연대본부 4.2인치 박격포 소대, 7월 4일에 합류한 52포병대대 A포대까지 포함해 540명이었다. (육군본부, 「6·25전쟁시 미 제24사단의 초기 지연작전 재조명」, 『군사연구』 제122호, 육군군사연구소, 2006, 75-81쪽.)

스미스 부대 대원들 역시 주일미군 중에서 선별해 뽑혔다.

군사 전문 블로그 ‘공중전투’를 운영하는 김진용 씨의 글 「6.25 초기 미 34연대의 지연전」에 따르면 “21연대 1대대(스미스 부대)는 전쟁 전에 있었던 전투준비태세 검열에서 합격한 부대이고 대대장도 이름 있는 지휘관이었다. 사단 선발대로 뽑힌 것도 그래서였다”라고 한다.

또한 스미스 부대는 박격포, 무반동총, 대전차 화기인 2.36인치 바주카포 6문과 105밀리미터 곡사포 6문이 딸린 포병 1개 대대를 배속받았다. 대대급 규모로서는 상당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국방부 정책관실 미국정책과,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국방부, 2004.)

7월 5일 새벽 3시께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는 인민군의 진격을 대비했다. 죽미령은 경부국도와 철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주변에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거점으로 삼기 좋은 요충지였다.

특히 스미스는 죽미령에 진지를 꾸리기 전 두 차례 직접 지형 정찰에 나섰다. 스미스는 죽미령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수청리 일대를 포병 진지로 선정했다. 또 죽미령 곳곳에 기관총과 바주카포, 곡사포 등을 배치하도록 했다. (경인일보, 「오산 죽미령 전투 6시간 15분간 어떤일이 있었을까?」, 2020.6.6.)

스미스 부대 파견을 결정한 맥아더는 미군의 지상군이 투입됐다는 것만 알려져도 인민군이 알아서 도망치리라 여겼다고 한다. 죽미령 전투를 앞둔 스미스 부대의 자신감도 높았다. 전투 준비를 마친 스미스 부대는 남하하는 인민군을 기다렸다. 7월 5일 아침, 인민군이 모는 T-34 탱크 8대가 나타났다. 스미스 부대가 인민군 탱크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교전이 벌어졌고 첫 미군 사망자가 나왔다.

인민군을 맞닥뜨린 스미스 부대는 75밀리미터 무반동총, 2.36인치 바주카포 등으로 인민군 탱크를 공격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군과 인민군의 사상 첫 교전으로 미군 사망자가 나왔지만, 전면전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탱크를 주축으로 한 인민군이 자신들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는 스미스 부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인민군 탱크는 스미스 부대를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남하해 진지 중앙에 있는 경부국도를 따라 죽미령을 통과했다. (육군본부, 「6·25전쟁시 미 제24사단의 초기 지연작전 재조명」, 『군사연구』 제122호, 육군군사연구소, 2006, 82쪽.)

▲ 인민군 탱크를 바주카포로 겨누는 스미스 부대 대원. [사진 출처: 위키백과]
▲ 인민군 탱크를 바주카포로 겨누는 스미스 부대 대원. [사진 출처: 위키백과]

이에 관해 스미스 부대에서는 “인민군이 우리를 못 알아봐서 그냥 지나갔다, 미군이 왔다는 사실을 알면 되돌아 갈 것”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인민군이 자신들을 한국군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쳤다고 판단한 것이다. (위키백과 ‘오산 전투’ 항목)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군 제4사단이 T-34 탱크 33대를 끌고 진격해왔다. 탱크의 후방에는 총 5,000여 명의 인민군 보병도 뒤따랐다. (위키백과 ‘오산 전투’ 항목)

▲ 죽미령 전투 당시 인민군의 진격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 [사진 출처: 위키백과]
▲ 죽미령 전투 당시 인민군의 진격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 [사진 출처: 위키백과]

인민군 탱크병들은 85밀리미터 포탄을 쏴 스미스 부대가 구축한 진지를 파괴했고 보병들도 가세했다. 스미스 부대는 전투 초반부터 수세에 몰렸다. 그러던 중 스미스 부대가 후방에서 쏜 105밀리미터 고폭탄에 맞아 인민군 탱크 2대가 멈춰섰다. 다만 스미스 부대의 ‘반격다운 반격’은 이게 마지막이었다. (「미군의 오산전투」, 디펜스투데이, 2020.3.14.)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스미스 중령은 뒤늦게 철수를 결정했다. 급박한 철수 상황에서 스미스 부대 소속 B중대 2소대는 철수 명령조차 듣지 못했다. 2소대 소속 병사 상당수는 무기와 철모, 탄띠를 버리고 군복도 벗은 채 맨발로 줄행랑쳤다. 무작정 걷다가 간신히 살아남아 서해안, 동해안까지 다다른 병사들도 있었다. 서해안에 도착한 병사 일부는 조각배를 타고 부산으로 도망갔다. (「한국전 첫 전투의 ‘악마적 선택’」, DBR, 2012.10.)

결과를 볼 때 스미스 부대는 죽미령에서 미리 대비해 지형상 우위를 점하고도 인민군에 패배했다. 미군의 희생이 무척 컸던 죽미령 전투는 미국의 국익에도 해가 됐다. (정다혜, 「1950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참전과 죽미령 전투」, 국민대학교, 2014.)

스미스 부대는 대원 중 150명이 전사하고 장교 5명이 실종, 82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 (위키백과 ‘오산 전투’ 항목) 한편으로는 스미스 부대가 받은 피해를 전사, 부상, 실종 등 181명으로 파악한 연구도 있다. (육군본부, 「6·25전쟁시 미 제24사단의 초기 지연작전 재조명」, 『군사연구』 제122호, 육군군사연구소, 2006, 83쪽.)

연구마다 스미스 부대가 받은 피해의 집계가 다른데, 미군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고 보는 점에서는 견해가 같다. 스미스 부대가 받은 피해는 인민군의 피해가 전사자 42명, 부상자 85명에 그친 점과도 비교된다. (육군본부, 「군사연구」 제122호, 2006, 83쪽.)

심지어 스미스 부대는 도망치면서 두고 간 장비 대부분도 인민군에 빼앗겼다. 죽미령 전투에서 완패한 스미스 부대의 처지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이후 죽미령 전투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는 천안, 대전, 옥천 전투 등에서도 미국은 무참하게 패배했다.

천안 전투에서는 인민군 탱크에 의해 34연대장 로버트 마틴이 숨졌다. 연대장을 잃은 34연대 병사들은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하고 후퇴하기 급급했다. (육군본부, 「6·25전쟁시 미 제24사단의 초기 지연작전 재조명」, 『군사연구』 제122호, 육군군사연구소, 2006, 85쪽.)

대전 전투에서는 스미스 중령에게 방어를 당부한 장본인인 딘 소장(24단 사단장)이 철수 도중 인민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사단장이 전쟁 중 적에 붙잡힌 건 미군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사진의 인물이 윌리엄 딘. 포로가 된 딘은 정전협정 이후 북미 간 포로 교환에 따라 1953년 9월 4일 판문점을 통해 미국으로 귀환했다. [사진 출처: 위키백과]
▲ 사진의 인물이 윌리엄 딘. 포로가 된 딘은 정전협정 이후 북미 간 포로 교환에 따라 1953년 9월 4일 판문점을 통해 미국으로 귀환했다. [사진 출처: 위키백과]

이후 미 24사단은 7월 21일 벌어진 옥천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죽미령 전투 이후 보름여 만에 1만 6,000명 병력 가운데 약 7,000명이 사망했다. (구자룡, 「죽미령에서 다부동까지 ‘피(血)로 버틴 지연작전’(1)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화정평화재단·21세기 평화연구소)

미국은 죽미령 전투에 관해 인민군의 진격 속 총 6시간 15분 동안이나 버텼다고 자평한다. 특히 맥아더는 죽미령 전투를 두고 인민군의 진격을 늦춰 미군이 전선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며 ‘성공한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40년 만에 다시 풀어보는 6·25의 수수께끼:4”」, 한국일보 1990.6.20.)

하지만 이런 주장은 ▲스미스 부대가 특수임무를 맡은 선별된 정예였다는 점 ▲죽미령 전투 이후 잇따른 전투에서도 미군이 패배했다는 점에서 군색한 변명으로 보인다. 맥아더에 이어 유엔군 사령관이 된 매슈 리지웨이는 회고록에서 맥아더가 인민군의 전력을 잘못 판단했다고 평가했다. 맥아더에 비해 합리적인 평가로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미국은 죽미령 전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올해 2월 1일(미국 현지 시각) 새뮤얼 퍼파로 인도·태평양 사령관 지명자 인준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에서는 죽미령 전투를 비중 있게 다룬 책 『이런 전쟁(T.R. 페렌바크, 『This Kind of War: A Study in Unpreparedness』, 1963.)』이 화제가 됐다.

공화당의 댄 설리번 상원의원은 책을 들어 보이며 “(죽미령 전투 당시) 미군의 엄청난 희생은 당시 미국 (군 지도부 등의) 지도력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자조했다. 『이런 전쟁』의 저자 페렌바크는 미국의 패배를 두고 싸울 준비가 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항복할 준비를 해야 한다”라고 적었다. 페렌바크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교 출신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미군은 한국전쟁 이후 베트남과 무려 15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이후에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과 여러 차례 전면전을 벌였다. 특히 미국은 2021년 7월, 아프간에서 야반도주하듯 미군을 철수시켰다. 세계 주요 언론은 아프간에서 탈레반과 20년 동안 전쟁을 벌이던 미국이 패배하며 망신살을 뻗쳤다고 보도했다.

그런데도 미 정치권이 최근 청문회에서 콕 짚어 강조한 건 죽미령 전투였다. 이는 죽미령 전투에서의 완패가 미국에 ‘트라우마’로 각인됐음을 보여준다.

 

북한이 나포한 미 해군 첩보선 푸에블로호

푸에블로호. [사진 출처: 위키백과]

 

북한은 1968년 1월 23일 오후 1시 45분경, 원산 인근 동해상에서 미 해군의 첩보선 USS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 북한은 푸에블로호가 미 태평양함대에 소속된 무장간첩선이라고 주장했다.

미 정부는 푸에블로호가 비무장 정보수집선이라면서 태평양함대 소속이라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위키피디아 영문판, ‘USS Pueblo (AGER-2)’ 항목) 나포 과정에서 미 해군 승무원 1명이 숨지고 82명이 붙잡혔다. 푸에블로호가 북한 인민군에 나포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1) 미국의 주장

미 정부는 푸에블로호가 원산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동해 공해상에서 정상적인 정탐 활동을 했는데, 북한 인민군이 난데없이 공격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미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CIA(중앙정보국), NSA(국가안보국), 연방의회 등의 비밀문서를 보면 결이 다른 얘기가 나온다. 아래는 정리한 내용이다.

푸에블로호가 원산 해역에 나타나자 북한 측은 ‘정체불명의 어선’ 여러 척으로 감시를 붙였다. 푸에블로호는 오후 12시 52분 무전으로 ‘가능한 한 현장에 머물고 불가피할 때 서서히 북동쪽으로 철수하겠다’고 보고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북한 초계정 3척과 미그-21기 2기가 푸에블로호를 포위했고, 인민군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도끼로 정찰장비를 부수고 비밀문서를 불태우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푸에블로호와 함께 당시 푸에블로호가 가지고 있던 민감한 정보 대다수는 인민군의 손에 넘어갔다. (「[안치용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Secret of Korea)] 비밀문건해제 -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상)」, 조선일보, 2014.1.24.)

푸에블로호가 비무장 함정이라는 미국의 공식 주장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NSA 보고서에는 “방어 무장(기관총)은 조사 대상 부대의 비상한 관심을 유발하지 않도록 보관하거나 숨겨야 한다. (기관총은)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라고 나와 있다.

 

2) 북한의 주장

북한이 푸에블로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살펴보자.

북한 조선중앙방송위원회는 2000년 기록 영화 「미제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의 말로」를 공개했다. 또 2017년 10월 조선중앙방송은 「텔레비죤기록편집물 조선중앙방송은 세상에 전한다」를 제목으로 제1부 「나포」, 제2부 「쾌승」을 방송했다. 푸에블로호 나포 50주년인 2018년 1월 23일에는 「미제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 도 공개됐다.

방송 내용을 정리하면 푸에블로호 나포 경위는 다음과 같다.

푸에블로호는 1967년 12월 1일 일본 요코스카항에 도착했다. 이후 1968년 1월 8일 사세보항으로 이동해 임무를 받았고 1월 13일부터 북한 원산 해역에서 첩보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첩보 활동은 별 성과가 없었고, 푸에블로호 함장인 로이드 부처는 푸에블로호를 원산 해역 가까이 접근시켰다.

1월 23일 원산 해역에 푸에블로호가 출몰했다. 북한 경비함은 “국적을 밝히라”라고 했지만 푸에블로호는 수로측량을 하는 중이었고 동해에서 나갈 테니 단속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인민군은 참모부를 통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엄격히 단속하고 국적을 확인해 대응하라며 푸에블로호의 나포를 명령했다.

인민군의 단속 요구를 거부한 푸에블로호는 기관총을 쏘며 도망갔다. 북한 경비함은 포를 발사하며 푸에블로호를 공격했다. 대응에서 밀린 푸에블로호는 성조기를 게양해 미국 국적임을 밝히며 계속 도주했다.

인민군은 끝까지 푸에블로호를 추격했다. 소형 쾌속 군함인 어뢰정에 옮겨 탄 인민군 결사대원 7명은 전투 임무에 따라 푸에블로호에 따라붙었다. 이들이 받은 임무는 4가지로 ▲승무원 체포 ▲푸에블로호에 실린 무기 빼앗기 ▲푸에블로호의 통신 끊기 ▲푸에블로호를 원산항에 끌고 오기였다.

푸에블로호에 올라탄 인민군들은 가장 먼저 게양대에 걸린 성조기를 내려 찢고 북한 국기를 올렸다. 인민군은 자동보총으로 함장을 겨눴고, 함장은 승무원들에게 갑판으로 올라오라고 말했다. 북한 경비함의 대응 사격으로 숨진 한명을 제외한 82명이 항복해 밧줄로 묶였다. 인민군이 푸에블로호에 올라 나포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4분이었다.

인민군은 나포한 푸에블로호를 원산항으로 옮겼다. 승무원들은 원산에 머물다가 이후 평양으로 호송됐다.

북한은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인 원산 근처 려도 7.6마일(14킬로미터)까지 접근했다고 주장했다. 나포는 국제법을 위반한 미국의 영해 침범에 따른 정당한 대응이었다는 것이다.

푸에블로호가 무장간첩선이라며 북한이 든 근거는 상당히 구체적이다. 푸에블로호는 12.7밀리미터 대구경 기관총 2문 등과 수류탄 등 각종 무기로 무장했고, 총탄 수만 발도 실려 있었다. 도·감청과 송수신이 가능한 전자정찰 장비, 음향 탐지 장비 등도 있었다. 또 푸에블로호는 북한 해안의 군사 대상물과 레이더망의 배치 상태, 인민군의 기동 상태를 파악하는 임무를 맡았다.

푸에블로호 사건의 파장으로 이른바 핑크루트 작전도 중단됐다. 미국은 1968년 1월 5일부터 2월 4일까지 북한 해안과 지형지물을 조사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 중국의 동중국해, 알래스카와 가까운 소련의 페트로파브포프스크 근처를 정탐할 계획을 세웠다. (「[안치용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Secret of Korea)] 비밀문건해제 -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상)」, 조선일보, 2014.1.24.)

하지만 푸에블로호 사건에서 발이 묶이면서 미국의 대중·대소 구상도 흐트러졌다. 북한을 먼저 자극한 미국이 거꾸로 북한에 된통 당한 꼴이 된 셈이다.

 

군사 대응과 협상 시도…미국의 사과와 굴욕

김일성 주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자신을 최고사령관으로 생각하고 한번 결심을 채택해 보오. 저 ‘푸에블로’호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미국놈들이 항복서를 내기 전에는 ‘푸에블로’호 선원들을 절대로 석방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텔레비죤기록편집물 조선중앙방송은 세상에 전한다」, 제1부 「나포」)

미국은 이러한 북한을 상대로 전쟁을 적극 검토했다.

푸에블로호 나포 직후 미 태평양함대 산하 7함대는 핵추진항공모함 3척과, 함선 4척, 전투폭격기 372대 등을 원산항 15마일(24킬로미터) 부근으로 이동시켰다. 미국 본토에는 해·공군 예비역 1만 4,600여 명에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주일미군 및 주한미군 주둔 병력과 일본 자위대, 한국군에까지 비상동원령이 내려졌다. 오산 주한미군 공군기지에는 전략폭격기 B-52 2대와 F-105 수십 대가 배치됐다.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현대사1 1945~1957』, 도서출판 4.27시대, 2018, 206쪽.)

주한미군 사령관 본 스틸은 아래 지휘관들에게 경계 태세를 높이라고 주문했다. 또 전쟁 준비 태세를 일단 데프콘 4(평시)로 유지하되, 데프콘 3(준전시상태)으로 올릴 것을 검토했다. 이 밖에 일본 오키나와 기지에 있는 F-105, 전투기 12대도 한국 오산 기지에 급파됐다. (「[다큐멘터리 사건 다시 보기]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3)」, VOA, 2009.10.19.)

이를 통해 미국이 총력전 수준으로 북한과의 전쟁을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CIA는 나포 사흘 뒤 A-12 초음속 정찰기를 띄워 북한 남쪽 절반을 샅샅이 훑었다. 이는 블랙실드(검은 방패) 작전으로 불렸는데 군사작전을 하기 전 북한의 병력 배치를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심지어 미국은 푸에블로호 내 장비장치와 비밀문서를 파괴하기 위해 공군기를 보내 푸에블로호를 격침할 계획까지 구상했다. (「[안치용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Secret of Korea)] 푸에블로호 납치사건(하)」, 조선일보, 2014.1.24.)

린든 B. 존슨 대통령도 군사 대응을 고려했다. 1월 25일 존슨 대통령이 참석한 국가안전보장회의 회의에서는 북한 공습 작전이 논의됐다. 합동참모본부의 얼 휠러는 ▲북한 공군 무력화 뒤 원산항에 기뢰 설치 ▲다른 항구에도 기뢰 설치 ▲해운 운송 차단 ▲북한의 특정 목표 폭격 ▲북한 선박 나포 뒤 푸에블로호와 교환 등 과격한 군사 대응을 제시했다. 국방부 차관 폴 니츠는 푸에블로호가 나포된 곳으로 구축함을 보내고 북한이 대응 시 보복하자고 주장했다. (김연철, 『70년의 대화』, 창비, 2018, 74~76쪽.)

기밀 해제된 미 국방부 문서에 따르면 율리시스 샤프 당시 미 태평양지구 총사령관은 세부 비상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전술 전투기와 B-52 폭격기가 한국 공군과 함께 북한 공군기지 전면 폭격 ▲전투기를 동원해 북한군에 최고 70킬로톤 위력의 핵폭탄 투하 ▲항구 봉쇄 ▲원산항 외곽에서의 무력 시위 등을 검토했다.

그런데 미국은 북한과 전면전을 구상했지만, 끝내 실행하지는 못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짚어볼 수 있다.

 

첫째는 북한의 군사적 대비가 철저했기 때문이다.

김일성 주석은 1968년 2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성명 「미제침략자들이 감히 덤비려 든다면 섬멸적인 타격을 가할것이다!」를 통해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민과 인민군대는 미제국주의자들의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2.8절 20주년 경축연회가 끝난 뒤 김일성 주석은 인민군 책임일꾼들에게 “미국놈들이 푸에블로호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보복하겠다고 떠드는데 비밀에 부쳐오던 지상대해상 로켓과 지상대공중 로켓을 공개하여 우리의 보복 선언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어 원수들을 전율케 하자”라면서 “저들만 로켓이 있는 줄 알고 있는 우쭐대는 저 미국놈들의 눈알이 뒤집히게 어디 한번 로켓을 보란 듯이 공개하자. 우리가 내놓은 경제건설과 국방경제 병진노선이 얼마나 정당한가를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다”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는 북한이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군사 대응을 중점에 둔 결사항전을 선포한 것이다. 인민군과 노농적위대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도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해 전쟁을 대비했다고 한다. (김동원·안광획·이정훈,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현대사1 1945~1957』, 도서출판 4.27시대, 2018, 207쪽.)

북한이 전쟁을 준비했음은 CIA 초음속 정찰기의 비밀 전문에서도 드러난다. 초음속 정찰기는 지대공 미사일 13개를 포함해 북한 주요 군사기지와 공업지역 등을 파악했다. 특히 원산공항에서는 발사대에 장착된 지대공 미사일 6발과 대기 중인 미그-15 전투기 29대, 미그-17 전투기 등 전투기 54대를 확인했다. (「[안치용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Secret of Korea)] 푸에블로호 납치사건(하)」, 조선일보, 2014.1.24.)

미국은 이러한 북한의 전력을 확인하고 전쟁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당시 베트남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미국의 처지다.

미군은 1월 30일 베트남이 펼친 ‘구정 공세’에서 심각한 피해를 봤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미국과 전쟁 중인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미국은 군사 대응에서 외교 협상을 통한 푸에블로호와 승무원 반환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가 나포되고 11개월 동안 판문점에서 북한과 29차례 비밀협상을 진행했다. 그런데 미국은 협상 과정 내내 후퇴하며 북한에 끌려다녔다.

북한이 주도권을 쥔 협상의 쟁점은 미국이 북한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었다. 협상 초기 북한에 사과를 요구하던 미국은 푸에블로호의 정탐 활동에 관해 ‘유감’ 표명을 할 수 있다, 미 해군의 영해 침범에 관해 조사 결과에 따라 미국 측이 ‘조건부 사과’를 할 수 있다고 말을 계속 바꿨다.

반면 북한은 미국과 달리 협상 과정에서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이에 관해 북한 고유의 협상전략과 대응 전술적 책략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성윤, 「1차 사료를 통한 미북간 협상과정 분석 :1968년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중심으로」, 『전략연구』,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08. 164~203쪽.)

2월 17일 노동신문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드리는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 전체 선원들의 공동사죄문」이 실렸다. 승무원들이 작성한 사죄문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는 미국 함선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해에 침입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엄중한 정탐 행위를 한 데 대하여 전적인 책임을 지고 이에 엄숙히 사죄하며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해를 침범하지 않도록 할 것을 확고히 담보하는 바”라고 적시됐다.

27차 회의에서는 북한 측이 포로들을 석방이 아니라 추방하는 방식으로 쫓아내겠다고 통보했다. 북한은 미국이 요구를 받지 않는다면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군사재판에 따라 총살형까지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후통첩을 받은 미국은 결국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 당시 미국 측 협상 대표인 소장 길버트 우드워드는 끝까지 사과문에 날짜를 쓰는 걸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북한에 고개를 숙여 ‘무조건 항복’을 한 셈이다.

결국 미국은 푸에블로호의 승무원이라도 돌려받기 위해 “미국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사과문”을 북한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북한을 인정해야만 했던 미국, 극적인 위기가 된 ‘푸에블로호 사건’」, JTBC 팩추얼(JTBC FACTUAL), 2011.1.26.)

미국이 북한에 보낸 사과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미합중국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의하여 몰수된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의 이전 승무원들이 자기들의 죄행을 솔직히 고백하고 관용성을 베풀어줄 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청원한 사실을 고려하여 이들 승무원들을 관대히 처분하여줄 것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간절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영해 침범을 인정하라 ▲사과하라 ▲재발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라는 3가지 요구 조건을 관철했다. 이렇게 푸에블로호의 포로들은 붙잡힌 지 11개월 만에 북한에서 쫓겨났다. 승무원 82명과 시신 한 구가 북측 판문점에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걸어 남측 판문점으로 건너갔다. 이 장면은 마치 패잔병의 행렬 같았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사진 출처: 위키백과]

먼저 푸에블로호 나포 과정에서 숨진 승무원의 시신을 든 승무원 두 명이 앞장섰고 한 사람씩 뒤따라 다리를 건넜다. 미국의 처지에서 여러모로 수모, 굴욕, 치욕 그리고 패배라고 할 만했다. 당시 소련이 푸에블로호 사건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도 주목할 만하다.

사회주의권의 큰형님 격인 소련은 북한을 향해 나포는 과잉 대응이며 미국을 자극하면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압박했다. (김연철, 『70년의 대화』, 창비, 2018, 72쪽.) 그러나 북한은 주변 상황과 상관없이 푸에블로호 사건에서 자신의 태도를 관철한 끝에 미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런 점에서 푸에블로호 사건은 북한이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함정을 나포하면서 ‘주체사상을 통한 독자적 자주노선과 외교 전략’을 국제무대에서 보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다큐멘터리 사건 다시 보기]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3)), VOA, 2009.12.29.)

CNN 베이징 지국장 마이크 치노이는 1995년 4월 27일 보도에서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적 미국에 대한 승리를 기리는 성스러운 기념물로 여기고 있다”라고 전했다.

미 NSA가 1992년 작성한 비밀문서에는 푸에블로호 사건을 두고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정보 분야 대실패”, “최악의 악몽” 등의 평가가 담겼다. (「“‘푸에블로호 사건=최악 정보 실패’ 시사 비밀문서”」, KBS, 2014.1.2.)

 

전리품이 된 푸에블로호

푸에블로호 사건에서 나타난 두 가지 특징은 미국의 침략성과 북한의 승리이다. (이신재, 「북한의 기억의 정치와 푸에블로호 호명」, 『현대북한연구』 17권 1호,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미시연구소, 2014. 170쪽.)

오늘날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이 있는 평양 보통강 강가에 전시하고 있다. 푸에블로호 사건이 미국에 승리한 역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전시된 푸에블로호. [사진 출처: 위키백과]

한미연합훈련이 실시된 2023년 3월 30일 니미츠급 항공모함을 기함으로 하는 미 해군 11항모강습단이 부산에 입항했다. 그러자 노동신문은 푸에블로호 나포 작전에 참가한 인민군을 통해 미국을 조롱했다.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 김종록(푸에블로호 나포 작전에 참가한 인민군 7명 중 한명)은 북한이 공개한 수중 핵어뢰 ‘해일’을 언급하며 “세계 최강의 핵무기들까지 장비한 우리 해군에 감히 맞선다면 이번에는 아무리 덩치 큰 항공모함이라고 해도 푸에블로호 신세조차 차례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인민군 7명의 조장이었던 박인호는 “미국놈들에게 푸에블로호 사건 때 저들이 써 바친 사죄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권고하고 싶다”라고 일갈했다.

앞으로도 세계는 푸에블로호 사건을 통해 ‘미국 패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 듯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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