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유성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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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유성온천
  • 김철홍 문화유산국민신탁 충청지방사무소 명예관장
  • 승인 2024.02.15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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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온천 차별화 경쟁으로 옛 명성 찾아야
김철홍 자유기고가
김철홍 자유기고가

올 설 연휴 때 전국에서 3071만 명이 이동하고 고속도로 이용 차량은 2721만 대로 나타났다. 그리고 연간 해외여행자 수는 3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에 반해 2019년 국내 온천 이용객이 6382만 명에서 2021년 3436만 명으로 반토막났다. 2022년에는 4121만 명으로 이용객 수가 반등하긴 했지만 여전히 전성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대전 유성하면 전문적인 온천으로 109년의 역사, 129년전 최초 을미의병의 효시인 유성의병이 일어났고 3·1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이 거룩한 역사 현장에 108년 전부터 중부권을 대표하는 도심 속의 5일장(4일, 9일) 유성장터가 시작되는 등 MZ세대에겐 관심 밖의 현장이지만 기성세대에겐 지금도 생생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야말로 아름다운 추억의 스토리가 자리하고 있다.

1918년 유성온천호텔(유성호텔의 전신, 승리관 후신)
1918년 유성온천호텔(유성호텔의 전신, 승리관 후신)

유성온천이 대전의 한적한 전원지대에서 온천지대로 개발된 것은 1907년으로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표적인 온천장으로 봉명관(현 계룡스파텔)과 만년장(만년장호텔)이 있었는데, 이 두 온천정과 경쟁하기 위해 공주갑부, 땅부자로 알려진 김갑분이 승리관(유성온천호텔 전신, 현 유성호텔)을 세웠다. 봉명관은 조선총독부 영빈관처럼 중요한 손님이 주로 묵는 고급 휴양지였다.

또한 유성온천은 대전 시민을 비롯해 전국 곳곳의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최고 명소였고 특히 해외여행이 쉽지 않았던 1970년대에는 신혼여행지로 사랑받았고, 1994년에는 유성온천 일대를 온천관광특구로 지정하면서부터 한 해 방문객이 100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문전성시의 인기 관광지였다.

아파트가 얼마 보급되지 않았던 1960~70년대의 일반주택에는 대부분 실내에 화장실이 없었다. 물론 더더욱 샤워시설은 꿈도 못꾸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사우나, 찜질방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하거나 없던 시절 ‘목욕탕’앞에 상호를 넣은 대중목욕탕에서 샤워가 아닌 1~2시간이상 소요되는 목욕을 했는데, 그것도 설이나 추석 명절 전에 몸을 깨끗이 하는 의례적인 절차였고 연례행사이기도 했다.

필자도 차량이 드물었던 1960년대 후반까지 유성온천에서 먼 거리였던 집에서 자전거 앞 보조안장과 뒤의 짐받이에 필자와 형을 태운 아버지를 따라 군인휴양소(현 계룡스파텔)로 목욕을 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지금처럼 자주 샤워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에 목욕탕에 한 번 가면 때를 밀기 전 열탕으로 들어가 때를 불리는 목욕법에 따라 뜨거운 물을 싫어하는 필자는 매번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어려서 그런지 그것도 잠시, 목욕 후 아버지가 사주시는 먹거리 덕에 열탕의 기억은 잊게 된다.

1963년 만년장호텔 준공당시 모습(충남역사박물관)
1963년 만년장호텔 준공당시 모습(충남역사박물관)
만년장호텔 George Hornbeck 룸에서 다과 후 기념사진(1979.8월)
만년장호텔 George Hornbeck 룸에서 친구들 소개 및  기념사진(1979.8월)
만년장호텔 George Hornbeck 룸에서 친구들 소개 및 기념사진(1979.8월)

지금은 없어진 리베라호텔 자리에 있던 1급의 만년장호텔에는 박정희 대통령 전용 룸이 있다고 필자가 1979년경 이 곳에서 장기 투숙하고 있던 미국인 엔지니어 ‘조지 혼벡(George Hornbeck)’과의 인연으로 영어를 배울 겸 친구들과 자주 드나들던 시절 지배인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DJ도 선호했다고 한다. 유성호텔(유성 승리관 후신)은 이승만 박사가 해방 후 미국에서 돌아와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머물렀으며, 신익희, 조병옥, 장면, JP 등 정치인이 선호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아이러니하게도 예전의 아버지와 자전거 보조 안장에 탔던 어린아이의 역할이 바뀌었다. 그 어린아이가 아들과 함께 자동차로 아버지를 모시고 3대가 유성호텔 대온천탕에서 목욕을 하면서 연로하신 아버지의 세신사(洗身師)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식가셨던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요리를 드시면서 흐뭇해하시던 모습도 아직 눈에 선하다. 살아계시면 105세로 유성온천의 역사만큼이나 근현대사를 같이한 아버지와 3대가 이용했던 그 추억의 공간이 3월이 지나면 사라진다니 지금도 매주 이용하는 지역민으로서 한없는 아쉬움과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초창기 일본의 영향을 받은 우리의 목욕문화는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문화로 정착하여 1990년대까지 목욕탕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개인 샤워실의 보급과 사우나 시설 및 찜질방 등 대형화로 전통적인 온천 및 기존의 목욕탕이 쇠퇴해 가고 있다.

이로 인해 대전 유성온천을 비롯해 수안보와 온양·도고, 부곡 등 전국 온천지구는 66개에 달하는데 온천지구의 호텔과 숙박시설 대부분은 시설이 낡아 방문객이 점차 줄어들면서 옛 명성을 잃고 3년간 이어진 코로나19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줄줄이 문을 닫았거나 닫을 상황인 것이 현실이다.

비록 옛 온천지구의 추억은 사라지고 있지만, 그래도 전국의 온천지구 여러 지자체가 옛 명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유성구에서는 변화하는 관광의 트렌드에 맞춰 다양한 콘텐츠와 새로운 시설로 ‘온천 힐링테라피 공간’ 조성사업으로 온천수체험관과 온천박물관 등 관광을 활성화하는 기반을 구축해 침체에 빠진 유성온천지구의 재도약 발판을 마련할 계획이며, 유성호텔의 경우 5성급 호텔로 업그레이드되어 재탄생한다고 알려지고 있다.

또한 지역 내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유성온천 활성화 대책이 시급하고 유성온천 활성화의 전제조건으로 대규모 투자유치를 통한 대형 스파리조트를 건설과 대도시 속 온천이라는 차별화된 경쟁력을 극대화한다면 가족 단위 체류형 관광지로 탈바꿈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등의 전문가 의견에도 귀 기울이고 다각적인 검토와 소통으로 발전적인 대안을 모색하길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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