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칼럼] 우리도 이제 공자의 그늘에서 벗어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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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칼럼] 우리도 이제 공자의 그늘에서 벗어날 때다
  • 김용택 이사장
  • 승인 2024.02.12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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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혼상제문화 이대로 좋은가

'어동육서(魚東肉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조율이시(棗栗梨枾), 홍동백서(紅東白西)….‘무슨 뜻일까?조상의 차례상을 차릴 때 어동유서란 생선은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올리라는 말이다. 좌포우혜란 왼쪽에 포, 오른쪽에 식혜라는 뜻이요, 조율이시란 대추, 밤, 감, 배의 순서로, 홍동백서란 붉은 색 과일은 동쪽, 흰색과일은 서쪽에 차려야 한다는 법칙(?)이다.

1열에는 반서갱동(飯西羹東) 원칙 즉 사람이 봤을 때 밥과 술은 서쪽, 동쪽에는 국을 놓고 시접은 가운데에... 2열은 어동육서(魚東肉西)에 맞춰 어류는 동쪽에, 육류는 서쪽에 놓아야 한다. 생선적의 경우 음양오행설에 따라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으로 두는 것이 원칙이며 두부와 채소로 만든 소적은 맨 우측에...

3열...4열...5열에는 이러이러한 순으로... 한치의 오류도 없이 차려야 조상이 복을 내려주시기 때문일까? 여자들이 시집을 가서 주부가 되면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교육받은 집안 자식으로 부모 욕을 먹지 않게 처신하는 며느리로 인정받는다...?

‘올해 설 차례상 한 상을 차리는 데 드는 비용은 28만1천500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언론사가 상차리는 데 드는 비용을 보면 마치 재벌이 서민 주머니를 들여다보고 내놓으라는 징수금 명세서 같다는 느낌이 든다. 행여나 조상들이 섭섭해 하실지 정성을 다하는 자손들을 정말 저승의 선조님들이 그렇게 지내라고 들은 사람이라도 있을까?

 

■ 관·혼·상·제 누가 만들었을까

전통이라는 이름의 관혼상제는 아직도 개혁(?)의 사각지대인가? 우리가 감히 개혁(?)을 입에 떠올릴 수조차 없는 성역이 되고만 관(冠-성인식), 혼(婚-결혼), 상(喪-죽은 사람에게 배푸는 의식), 제(祭-조상을 위해 올리는 의식)란 언제 누가 만든 것일까? 오늘날 서민들까지 금과옥조로 알고 있는 전통문화가 된 관혼상제는 유교의 풍습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1300년 전에 남송 휘주(현재의 중국 복건성 우계(尤溪))에서 태어난 주희(주자)의 가문에서 지내던 예법 그대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의 유교는 사실상 주희의 눈에 비친 공자의 모습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읽고 있는 모든 사서(논어, 맹자, 예기의 일부인 대학, 중용)는 주희가 자신의 해석과 종전의 여러 주석을 모두 모아 정리한 것이다. 대학의 경우는 주석에 그치지 않고 아예 원문에 손을 대서 자구를 수정하고 자신만의 체계로 분장(分章)했으며, 심지어 소실된 구절이 있다 생각되는 부분에 자신이 글을 지어 넣기도 했다. 공자의 유교란 따지고 보면 주희가 공자를 재구성(?)한 성리학인 것이다.

1000년 전의 주자가문에서 지내던 예법을 한 치의 변형도 없이 그대로 답습해 따라 해야 양반가문의 체통이 서는가? 언제부터 우리서민들이 모두가 양반이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양반네들이 손에 물을 뭍이지 않고 지내던 허례허식과 체통이 관혼상제에 담겨 고스란히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체통을 생명보다 중히 여기던 그 양반이라는 가문의 흉내를 내며 살아야 했던 풍습을 오늘날 정보화시대에 양반의 후손도 아니면서 왜 그대로 따라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주자가례는 관(冠) ·혼(婚) ·상(喪) ·제(祭)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로서의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학이 국가 정교(政敎)의 기본강령으로 확립되었다. 처음에는 왕가와 조정 중신에서부터 사대부(士大夫)의 집안으로, 점차 일반서민에까지 보편화되기에 이르게 된다. 한자를 알지도 못하는 서민들이 양반문화를 흉네(?) 내게 된 이면에서 계급사회의 모순에 찌들려 살아왔던 서민들의 서러움이 양반문화를 동경한 ‘울며 겨자 먹기’가 아니었을까?

오랫만에 사랑하는 가족이 만나는 아름다운 풍습을 탓하자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네 가정에서 지내는 명절제사나 기제사 그리고 혼례 제례 ...등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오죽했으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까지 나왔을까? 사실은 공자가 아니라 주희다. 1000여년 전에 주희네 가문에서 지키던 관혼상제례를 그대로 답습해 지키지 않으면 쌍놈(?)이 되는 양반숭배문화의 관혼상제...

우리가 1천년전 주희의 가문에서 지키던 예법. 주자가례는 주자가 유가(儒家)의 예법의장(禮法儀章)에 관하여 상술한 책《문공가례(文公家禮)》 5권, 부록 1권에 적힌 예법이다. 주희는 아버지의 상(喪)을 당한 후인 17, 18세부터 예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수집·정리하여 40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한 후 일부를 찬술했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초년의 부친상과 중년의 모친상을 겪으면서 인정(人情)에 맞고 자기네들이 실제로 행하기 쉬운 예의 필요성을 느껴 완성한 게 《문공가례(文公家禮)》라고 한다.

세상이 바뀌고 또 바뀌고 당시의 모든 것이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는데 유독 주희네 가문에서 지키던 관혼상례를 우리가 더 원본대로 잘 지켜야 양반이 되는가?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교육도 개혁이 살길이라고 한다. 개혁의 시대, 이제는 공자(주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잘못된 전통이나 문화는 과감하게 벗어 던지는 게 개혁이다. 저승에 계신 어떤 부모님이 자기 후손들이 고통을 당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좋아하시겠는가? 이번 설에는 기족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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