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여성을 위한 학교 탄생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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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여성을 위한 학교 탄생 비화
  • 김철홍 자유기고가
  • 승인 2024.01.0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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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홍 자유 기고가
김철홍 자유 기고가(문화유산국민신탁 충청지방사무소 명예관장)

흔히 교육하면 가정교육, 정규교육, 전문교육으로 구분하고 교육기관은 과거 조선시대의 경우 공교육기관인 향교, 사부학당, 성균관과 사교육기관인 서원, 서당으로 알고 있고 실제로는 여성이 배제된 양반을 중심으로 주로 유교사상과 성리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다.

관립한성고등여학교
관립한성고등여학교

그러나 기본적인 교육을 모든 국민에게 제공하는 보편적인 교육체계로 발전하여 학문의 다양성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개인의 능력과 관심에 맞는 선택적 교육도 가능한 지금과는 너무나도 다름을 시간과 공간 여행을 다녀오기 전에는 충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조선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된 관학 유학(儒學)생도의 정원 15,670명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조선 시대에 여성을 위한 학교가 없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래서 ‘예외없는 원칙은 없다’는 항변과 논란은 우리 주변에 끊이지 않나 보다. 조선시대에도 지방 고을에서 3년마다 여종 가운데 여의(女醫) 70명과 여기(女妓,기녀) 150명을 선발하여 중앙에 올려보내면 여의는 내의원(內醫院)·혜민서(惠民署)의 의학(醫學)에서, 여기(기녀)는 관습도감(慣習都監)·장악원(掌樂院)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반여성은 동네 서당 조차 출입을 할 수 없지만, 집안만의 공간제약 있는 한 개인이나 집안 어른에 의해 운영되는 글방인 ‘가숙(家塾)’ 즉 담장안의 학교로 공간이 집안으로 철저히 제한돼 사실상 학교라고 보기엔 무리이긴 하다.

이화학당과 스크랜튼선교사
이화학당과 스크랜튼선교사

그러다 조선조 말 근대 전환기인 1886년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 부인이 조선 최초의 여학교(이화여고·이화여대의 전신)를 세웠고 1887년 고종 황제가 ‘이화학당’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하사했다. 이는 조선의 사액서원에 비견되는 것으로 이화학당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임을 의미한다.

당시 스크랜튼 부인은 아이의 학부모에게 “나는 당신의 딸 복순(福順)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없이 서방(西方)은 물론 조선 안에서라도 단 십 리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를 서약합니다”라는 내용의 각서를 써주고서야 가르칠 수 있었다는 재밌는 일화는 당시의 시대상을 말해준다.

이렇게 시작된 여학교의 역사는 탄력을 받아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양반 여성들을 중심으로 300명의 여성이 이소사(李召史,양성당 이씨), 김소사(金召史,양현당 김씨)의 이름으로 여성의 평등한 교육권, 정치참여권, 경제 활동 참여권이 명시된 ‘여학교 설시 통문’ [여권통문(女權通文)]을 발표했다.

[황성신문(皇城新聞)]1898년9월1일자[여권통문(女權通文)]
[황성신문(皇城新聞)]1898년9월1일자[여권통문(女權通文)]

이 통문은 황성신문(1898. 9. 8.), 독립신문(1898. 9. 9)에 ”어찌하여 우리 여인들은 일양 귀먹고 눈 어두운 병신 모양으로 ·…… 중 략…… 먼저 문명개화한 나라를 보면 남녀가 일반 사람이라 어려서부터 각각 학교에 다니며 각항 재주를 다 배우고 이목을 넓혀 장성한 후에 사나이와 부부지의를 정하여……“ 라는 내용 전문이 보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贊襄會)’설립으로 이어졌는데, 찬양회는 고종에게 여학교 설립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실제 고종의 찬성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유림의 반대 등으로 학교 설립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이듬해인 1899년 2월 회비를 기금으로 해 자신들의 힘으로 여성을 위한 순성학교(順成學校)를 개교했다.

그리고 계속된 이들의 노력으로 1908년 <고등여학교령>에 의거 최초의 관립 여자교육기관인 관립한성고등여학교(경기여고의 전신)가 설립됐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정서로 학생 모집이 쉽지 않았다고 “그해 5월 어윤적 초대 교장은 한 고관대작 집의 대문을 두드리고 ‘이 댁에 따님이 있으시죠? 따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고관대작에게 어 교장은 한참 설명했다. 그처럼 좋은 집안의 여식(女息)들을 모으기 위해 당시 촉망받던 권문세가의 집, 고관대작의 집, 양갓집으로 소문이 난 곳은 빼놓지 않고 일일이 찾아갔다.”는 모 월간지에 소개된 바도 있다.

이처럼 여학교 설립운동에 앞장서 이끌었던 여성들의 탁월한 젠더 감수성 덕분에 마침내 사립이 아닌 관립 여학교 탄생이라는 결실로 맺어져 여성이 남성과 똑같이 나라에서 세운 집밖의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또한 125년 전 9월1일에 그들이 발표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인 “여권통문”은 여성 인권 강화, 여성의 사회참여 증가, 여성 인권 운동 확대 등을 위해 그 영항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나아가 성평등과 차별없는 사회를 위해서 우리 모두의 노력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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