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돈암서원 With 사계 김장생
상태바
[기고] 돈암서원 With 사계 김장생
  • 김철홍 자유기고가
  • 승인 2023.09.11 23: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철홍 문화유산국민신탁 충청지방사무소 명예관장

‘더위가 멈춘다’는 처서가 지났지만, 장마비와 무더위 속에서도 돈암서원(遯巖書院) 곳곳은 100일 동안 꽃이 피고 지는 배롱나무꽃 분홍빛이 지천이다. 입덕문(入德門)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가자 오른쪽 배롱나무가 제일 먼저 나를 반겨 준다.
또한 서원의 예스러운 한옥과 배롱나무꽃이 어우러져 그림같은 풍경을 선물한다. 이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해 이른 시각부터 사진 애호가는 물론 관람객을 불러 모은다. 배롱나무는 나무껍질이 매끈하기 때문에 청렴결백한 선비를 상징한다고 해서 옛부터 서원이나 정자 옆에 심었다고 한다.

돈암서원은 본래 현재 위치의 서북쪽 1.5km 떨어진 임리 숲말에 있었는데, 이 숲말에 돈암이라는 큰 바위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연산천에 가까이 있고 지대가 낮아 수해를 입어 1880년 현 위치로 이전했다. 돈암서원은 김장생(1548~1631)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김장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화가 건립한 정회당(靜會堂)·과 김장생이 건립한 양성당(養性堂)에서 수학한 제자들이 김장생이 타계한 3년 후인 1634년(인조 12년)에 건립한 서원으로 후학을 양성하던 지방 사교육기관이며, 공교육기관이던 향교, 4부학당, 성균관과는 구분된다. 또한 왕이 이름을 지어주고 노비, 서책, 토지 등과 함께 현판을 써 보낸 서원을 말하는 사액서원이면서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 중의 하나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 있는 곳이다.

이 돈암서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응도당(凝道堂)‘은 강당 건물인데, 서원 건물로는 사람을 압도할 정도로 규모가 큰데다 거대한 한옥이 공중에 약간 떠 있는 구조이고 건물 중긴 높이에 눈썹처럼 가로로 길게 붙어 있는 눈썹지붕이 있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하는 독특한 구조양식이기에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이 강당에 걸려 있는 유생들이 수증기가 응결되어 물방울이 되듯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라는 의미와 ’도(道)가 머문다‘는 뜻의 ’응도당(凝道堂)‘과 ’돈암서원(遯巖書院)‘ 편액(액자)은 송시열이 쓴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응도당 옆에 ‘고요한 마음을 지니고 행동하는 방법’을 뜻하는 정화당(靜會堂)·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김장생의 아버지 황강 김계휘가 건립한 것으로 .당시의 명망 있는 유림이 모인 곳으로 김장생도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하는데, 정회당(靜會堂)의 현판 글씨에 보통 글씨나 그림 따위에 작가가 자신의 이름이나 호(號)를 쓰고 도장을 찍는 낙관(落款)대신 의성김예산팔세경서(義城金禮山八歲敬書)라고 새겼는데, 이는 의성의 김예산이라는 인물이 여덟 살 나이에 쓴 것이라는 뜻으로 이 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돈암서원’ 하면 사계 김장생이 주인공이자 스승이며, 제자로 아들인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이 조연이지만 모두 이곳에 소위 학덕있는 고인(故人)의 위패를 서원 등에 모신다는 뜻의 배향(配享)됨은 물론 신라·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의 최고 정신적 지주에 올라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뜻하는 문묘종사(文廟從祀)된 18명(十八賢)의 유학자에 속하는 대단한 인물임엔 틀림없다.

김장생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가례집람(家禮輯覽), 상례비요(喪禮備要), 근사록석(近思錄釋疑), 사계선생연보, 사계선생유고, 사계전서 등 다수가 있다. 참고로 지난 해 4월 사계 김장생 서거 390년을 맞아 약탈, 도난, 밀매 등으로 세상에 떠돌던 가례집람(家禮輯覽) 9장을 비롯해 사계선생연보, 사계선생유고, 사계전서 등을 펴내는 데 쓰인 목판(책판) 인쇄 장치 원본 54장을 문화대통령, 문화예술계의 대부로 알려진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이 50년 전 인사동에서 구입해 소장해오다가 돈암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것을 보고 문득 ‘아! 그 책판’이란 생각과 함께 예학을 집대성했다는 큰 의미를 지닌 책인 만큼, 후대와의 공유가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을 때 값어치 있는 것’이라는 평소 철학을 실천한 셈이다. 이런 책판 원본은 지금은 감히 가격을 따질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유물이리는 전문가들의 평가와 함께 그간 ‘이빨 빠진’ 채 흩어져 있던 책판들이 비로소 치열 고른 완제품으로 채워져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문화계는 물론이고 언론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장생은 광산김씨로 지금의 검찰총장격인 대사헌을 지낸 황강 김계희의 아들로 어려서는 조선 중기 유학자이고 시문집 ‘구봉집’을 저술한 유명한 문장가인 송익필의 문하에서 예학을 전수 했고, 20세 무렵에는 율곡 이이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 김장생은 관직에서 일을 승승장구하여 형조참판의 자리에 올랐으나 인조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일을 뜻하는 추숭(追崇) 논의가 인조의 생부인 정원근에 있고, 북인(北人)이 득세하자 연산으로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며, 아들 김집과 함께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발달로 나타난 예법에 관한 학문인 예학(禮學)의 기본적인 체계를 완성하여 성리학의 실천이론인 예학을 한국적으로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는 조선시대 예학의 최고임을 뜻하는 종장(宗匠)이요,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예학의 대가이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김장생은 제자 송준길의 외당숙이고, 김장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희의 옛집인 서울 정릉집에서 김장생에 이어 아들 김집과 송준길도 출생하여 이곳이 삼현대(三賢臺)라 불렸다고 한다. 후에 송준길은 조선후기 유교 주자학의 대가로 김장생, 김집의 뒤를 이어 당대나 후대에 높이 평가받어 예학의 종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일찍이 스승인 김장생이 송준길이 예학의 종장이 될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또한 주자학의 대가인 송시열은 송준길과 부계로는 13촌이며, 진외가로는 6촌 간으로 송준길보다는 한 살 아래로 숙부인 송준길을 친척 관계를 떠나 형으로 불렀으며, 8세의 나이로 비교적 부유한 환경이었던 송준길의 집에서 수학하는 등 특별한 사이로 양송(兩宋)으로 불려 왔다, 요즘 말로 ‘세상 참 좁다’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김장생은 훗날 84세 때 연산에서 생을 마치고 후손에게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 말 것과 자손이 수십 대에 이르더라도 우애(誼)를 두터이 지낼 것‘을 유훈(遺訓)으로 남겼다. 이에 10여년 전 무소유를 실천한 법정 스님이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화장)하고 몸뚱아리 하나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를 베지 말고 남은 땔감을 사용하되 사리를 찾지 마라’고 한 유언이 오버랩되어 시사하는 바가 큼을 새삼 느낀다. 끝으로 요즈음 여기저기서 각종 문화축제 또는 행사가 봇물 터지듯 열리고 있는데,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기억의 창고’임을 잊지 말고 지자체 특히 논산, 계룡 등의 지자체가 세종, 대전의 근교 도시로서의 장점을 살리는 컨셉에 지역 문화유산을 활용하는 방안도 포함되는 적극적인 검토를 기대해본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