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하에] 조선 침략을 시작하는 일본 2. 강화도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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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하에] 조선 침략을 시작하는 일본 2. 강화도 조약
  • 구산하
  • 승인 2022.09.2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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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 운요호 사건을 살펴봤다.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서양 열강을 상대하면서도 물러설 줄 몰랐던 조선이 일본에는 왜 쉽게 무너진 것일까? 그 이유는 달라진 조선의 정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흥선대원군의 실각

가장 큰 변화는 흥선대원군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26대 조선의 왕인 고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다. 고종이 집권할 무렵 조선은 세도 정치로 인해 나라가 거덜 나고 백성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나라를 정상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정책을 펼쳤다. 탐관오리들의 주머니를 채우는데 악용된 세금 제도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고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던 전국의 서원을 철폐했다. 당파를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는가 하면, 나라의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한 사업에 힘을 쏟았다.

특히 이 시기엔 조선의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는 서양 열강의 접근이 본격화되던 때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두 차례의 외세 침략을 막아낸 것도 흥선대원군의 이런 정책과 관련이 있다. 흥선대원군이 급변하는 정세를 정확히 읽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서 아쉬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외세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한 자기 입장이 있었다. 서양 오랑캐의 침범에 싸우지 않는 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라고 못 박은 척화비를 전국에 세운 것을 보더라도, 그의 외세 배척 의식을 강하게 확인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지 10여 년, 성인이 된 고종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권력의 중심에 서고 싶어 했다. 고종의 부인인 민비는 그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민비는 최익현에 책사를 보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게 하는 상소를 올리게 충동했다. 1873년,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며 정사에서 손을 떼게 하라는 상소를 올린다. 고종은 이런 여론을 발판 삼아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고종의 친정과 민 씨 시대의 시작

흥선대원군의 실각과 고종의 친정(임금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봄)은 조선의 정치적 변화를 불러왔다. 민씨 일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인사권을 손에 쥔 민비의 의붓오빠 민승호는 조정 내 흥선대원군 사람들을 모두 교체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이 추진하던 여러 개혁정책도 폐기되었다. 

민씨 일가의 부정부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들은 나라의 관직을 팔아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자 했다. 지방의 관직들이 2만 냥에 거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돈을 주고 관직을 산 이들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을 리 없다. 그들은 관직을 얻기 위해 자신이 가져다 바친 돈을 뽑아내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다. 세도 정치 시기보다 끔찍한 나날이 이어졌다. 

백성의 삶은 파탄에 이르렀는데 고종과 민비는 향락에 찌든 삶을 살았다. 그들의 귀에는 백성의 신음이 들리지 않는지, 밤이면 밤마다 궁중에서는 잔치와 연희가 열렸다. 민비는 틈만 나면 궁중에서 굿판을 벌였다. 전국의 이름난 산과 계곡, 절에 소원을 빌기 위한 건물을 세우고 숱한 재물을 바쳤다. 오죽하면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의 봉우리에 1만 냥에 가까운 돈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이로 해서 수천 금을 썼다. 대원군이 10년 동안 저축하여 내수사에 간직한 돈과 호조, 선혜청의 창고는 1년이 못 되어 깡그리 비었다.” (김택영, 『한국역대소사』,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재인용)

김택영이 밝힌 것처럼 조선의 국력은 급격히 쇠락한다. 열강이 조선을 집어삼키고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시기에 이처럼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이 집권한 것이다. 이런 정치 세력은 지지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다. 미치지 않고서 어떤 백성이 이들을 지지하겠는가. 개인의 탐욕만을 쫓는 무능한 정치 세력,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 세력은 필연적으로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내 힘이 없으니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 정치 현실이 겹쳐 보인다.

부패한 고종과 민비 일당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울 힘을 갖추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외세에 맞서 싸우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미국도, 프랑스도 물리쳤던 조선이 일본에 제대로 된 저항도 없이 굴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조선으로 향한 일본

▲강화도 조약 당시 일본은 회담장 근처에 4대의 기관총을 설치하고, 군사를 배치하는 등 무력을 과시하였다.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강화도 조약 당시 일본은 회담장 근처에 4대의 기관총을 설치하고, 군사를 배치하는 등 무력을 과시하였다.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운요호 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 침략에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운요호 사건과 관련한 회의를 열어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보호와 운요호 포격 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 통상조약 체결을 위한 군함과 전권 대신을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역시나 운요호는 조선 침략을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친일 학자들은 조선이 일본에 빌미를 주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지만, 제국주의의 침략 행위는 늘 얼토당토않은 명분을 수반한다. 실제 일본이 운요호 사건이 있기 전에 이미 수습책을 마련해놓았다는 것도 밝혀졌다. 운요호 사건은 치밀하게 계획된 일본의 도발이었다.

1876년, 조선의 바다에 일장기를 휘날리는 일본의 군함이 다시 등장했다. 총 7척으로 구성된 함대는 중무장 상태였고 800여 명의 군인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이 회담에 응하지 않을 시, 바로 서울로 진격하겠다고 통보했다. 말이 좋아 회담이지 무력을 앞세운 겁박이었다. 

부패한 조선 정부는 일본에 맞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 우리의 해안에 멋대로 침입해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던 침략자가 사과는커녕 총칼을 들고 이 땅에 다시 들어왔는데도 말이다.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신헌을 그 책임자로 결정한다. 회담 장소는 강화도였다. 일본은 회담 장소인 강화도에 중무장한 군인 400여 명을 대동했다. 

그렇게 강화도의 연무당에서 조선과 일본의 대표단이 마주 앉았다. 일본의 전권 대신인 구로다는 회담 내내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당시 회담을 기록한 고종실록에 따르면, 구로다는 ‘우리 배 운양함이 작년에 우장으로 가는 길에 귀국의 영해를 지나가는데, 귀국 사람들이 포격을 하였으니 이웃 나라를 사귀는 정의가 있는 것입니까?’라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한발 나아가서는 ‘이제 운양함이 우리 배라는 것을 알았으니 옳고 그른 것이 어느 쪽에 있으며, 그때 포격을 한 변경 군사들을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라며 우리 군인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본은 조약 체결을 강하게 압박했다.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시 조선에 대한 군사행동을 감행할 것을 대놓고 드러냈다. 결국 1876년 2월 26일, 조선과 일본 사이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일수호조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강화도 조약이다.

 

조약이 아닌 침략

▲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의 제1조 부분. [사진 출처-국사편찬위원회]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최악의 불평등 조약으로 꼽힌다. 조약의 내용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협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일본이 사전에 만들어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 조약은 조선 침략을 위한 발판이었다. 

강화도 조약은 전문과 12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 내용은 고종실록에 실린 조약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제1관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京城)에 가서 직접 예조 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한다. 조선국 정부도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한다.

제3관

이후 양국 간에 오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한문으로 번역한 것 1본을 별도로 구비한다.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관

지금은 종전의 관례는 혁파하여 없애고 새로 세운 조관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또 조선국 정부는 제5관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별도로 개항하여 일본국 인민이 오가면서 통상하도록 허가하며, 해당 지역에서 임차한 터에 가옥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은 각각 그 편의에 따르게 한다.

제5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 지명을 지정한다.

제6관

이후 일본국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큰 바람을 만나거나 땔나무와 식량이 떨어져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곳에 따라 연안의 지항(支港)에 들어가 위험을 피하고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며, 선구를 수리하고 땔나무와 숯을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고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은 특별히 신경을 써서 가련히 여기고 구원하여 보충해 주지 않음이 없어야 할 것이며 감히 아끼고 인색해서는 안 된다. 

제7관

조선국 연해의 도서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지도를 제작하여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관

이후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국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토의하여 처리한다.

제9관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의 백성들은 각자 임의로 무역하며 양국 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각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 죄를 범한 것이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리하여 판결하고, 조선국 인민이 죄를 범한 것이 일본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 조사 판결하되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근거하여 심문하고 판결하며, 조금이라도 엄호하거나 비호함이 없이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관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은 이상 별도로 통상 장정을 제정하여 양국 상인들이 편리하게 한다. 또 현재 논의하여 제정한 각 조관 가운데 다시 세목을 보충해서 적용 조건에 편리하게 한다. 

제12관

이상 11관 의정 조약은 이날부터 양국이 성실히 준수하고 준행하는 시작으로 삼는다. 

주요한 조항을 중심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모든 조약의 첫 항에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이 담기기 마련이다. 강화도 조약의 첫 항은 조선이 일본과 평등한 자주국임을 명시하고 있다.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이 조선이 자주국임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함이다. 조선이 청나라에 종속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명시해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공식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을 넘어 대륙으로의 침략을 꿈꾼 일본에는 침략의 포석과도 같은 조항이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조항은 조선의 개항과 관련이 있다. 두 개의 주요 항구를 추가로 개항해 일본의 상인이 조선에 자유로이 진출하도록 한 것이다. 조약을 체결하던 당시에는 조선 측의 요구로 지역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이후 차례로 부산과 원산, 인천이 개항 대상이 되었다. 개항된 항구 각각의 지리적 특성을 살펴보면 일본의 의도를 더 정확히 볼 수 있다. 우선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부산의 개항은 경제적 침략의 의도가 담겨있으며, 원산의 개항은 당시 남하정책을 펼치던 러시아를 겨냥한 군사적 목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인천은 서울과 가까운 곳으로 정치적 침략의 의도가 엿보인다. 개항된 세 곳을 지도에서 살펴보면 일본의 침략 야욕이 조선을 포위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곱 번째 조항은 조선 해안을 자유로이 측량해 지도를 만들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해안 측량은 그동안 조선이 열강들과 갈등을 빚어온 주요한 문제였다. 이는 명백한 영토 주권 침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화도 조약은 일본이 조선의 바다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도를 만들도록 허락한 것이다. 게다가 이 측량의 담당은 군함이다. 한마디로 일본의 군함이 언제든 조선 앞바다에 자유로이 드나들고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기 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보장한 것이다. 

아홉 번째 조항은 조선을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로 떠미는 조항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사람들이 자유로이 무역하고 그 어떤 간섭도 하지 못하게 했다. 다시 말해 관세와 같은 국가적 보호 장치 없이 일본에 조선의 시장을 개방한 것이다. 이전에 크게 논란이 되었던 한미FTA 협상 과정을 생각해보면, 자유로운 무역이 얼마나 허황한 말인지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국가 사이에도 경제적 체급 차이가 존재하고, 하물며 자유 무역을 부르짖던 미국이 앞장서서 자국 중심의 보호무역을 펼치는 판인데 당시는 오죽했을까. 이미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공업화가 이뤄진 일본과 수공업 단계에 머물러 있는 조선의 경제적 체급은 같을 수 없었다. 이것은 무역이 아니라 침략이다. 실제 이 조항은 조선 민중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게 된다.

열 번째 조항은 일본인이 조선에서 저지른 범죄를 조선 정부가 처벌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정한 몇몇도 아니고 조선에 드나드는 모든 일본인에게 이런 특권을 부여했다. 강화도 조약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치외법권 조항이다. 우리 땅에서 우리 국민을 상대로 자행된 범죄를 우리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나라를 주권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내용이다. 더군다나 일본이 자기 나라 국민의 범죄에 대해 제대로 처벌할 리도 없다. 

충격적인 것은 이와 유사한 불평등한 조항이 오늘날의 한미관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지휘협정(SOFA)은 미군에 치외법권을 부여하고 있다. 주한미군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을 비롯해 강간, 살인, 강도 등 숱한 주한미군의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강화도 조약은 조약이 아닌 침략, 그 자체였다. 운요호가 올린 침략의 닻이 강화도를 시작으로 조선 곳곳에 내려지고 있었다. 결국 그 고통은 오롯이 조선 민중의 몫이 되어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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