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지금] 러시아가 보는 아프가니스탄ㆍ탈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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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지금] 러시아가 보는 아프가니스탄ㆍ탈레반
  • 이인선 연구원
  • 승인 2021.09.12 2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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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시보] 2001년 9·11 사건 이후 미국은 범행 배후로 알카에다를 지목하며, 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이 오사마 빈 라덴 알카에다 지도자를 숨겨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간을 침공했다. 당시 아프간의 정권은 탈레반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미국과 탈레반의 전쟁은 2021년 8월 30일 미군이 철수하면서 20년 만에 공식적으로 탈레반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영국·캐나다·독일 등 서방국들과 한국·일본 등 친서방국은 잇따라 아프간 주재 대사관 직원을 철수·감축하거나 자국민이 귀국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카불 주재 대사관을 폐쇄하거나 인근 국가로 이전한 여러 국가와는 달리 여전히 현지에 자국 대사관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도 탈레반을 아프간 정부에 대항하는 테러단체로 지정했지만 이전부터 탈레반 지도부와 접촉ㆍ협상을 이어왔다. 이 때문에 탈레반도 러시아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대표단을 파견했다.

러시아는 러시아ㆍ아프간 수교 100주년을 기념해서 2019년 5월 28일부터 이틀간 모스크바에서 아프간 평화를 모색하는 비공식회담을 열었다. 러시아는 이 회담에 아프간 정치인들과 탈레반을 함께 초청했고,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을 비롯한 14명의 탈레반 대표단이 회담에 참석했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에 따르면 탈레반 대표단은 2021년 7월 8일에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탈레반 측은 러시아와의 회담에서 러시아 접경지역은 물론 러시아와 동맹국인 타지키스탄 국경 지역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러시아와 아프간ㆍ탈레반은 어떠한 관계를 맺어온 것일까?

이번 글에서는 러시아를 통해 아프간과 탈레반을 이야기한다.

▲ 탈레반이 참석한 아프칸 평화회의 모습 (2021년 3월 18일).  © 이인선 연구원

소련과 아프간

소련과 아프간은 항상 좋은 관계였다. 소련은 1920년대부터 아프간에 재정원조뿐만 아니라 물질원조도 제공해왔고 1950년대에는 아프간에 대한 대규모 경제원조 계획을 이행했다. 이로써 아프간은 1954년부터 1978년까지 소련으로부터 약 20억 달러를 받았다.

소련은 아프간에 학교·병원·도로·공장을 건설했고 수백 명의 소련 외교관과 고문이 아프간에 있었다. 그리고 아프간 지휘관들은 소련의 고등교육기관에서 훈련을 받았다.

1973년 왕의 사촌이었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의 쿠데타로 아프간 정치 상황은 불안정해졌다. 다우드 칸은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 추진과 동시에 군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던 사회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반사회주의 정책을 펼치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탄압했다. 이에 다우드 칸 정권은 이슬람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반발을 동시에 사게 되었고 끝내 1978년 4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이후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소련에 호의적이었던 아프간 인민민주당이 권력을 잡았다. 소련은 아프간 정부에 개입하지 않고 개혁과 국정운영을 조언했다. 하지만 카불의 사회주의자들은 권력투쟁으로 힘을 소진하고 있었고 개혁 실패로 국민의 지지를 잃어갔다. 

소련을 견제하던 국가들은 이 분위기를 이용했다. 

아프간 안의 갈등으로 이익을 본 국가는 미국·파키스탄·사우디아라비아·영국·중국·독일·프랑스·이집트·이라크·아랍에미리트·일본·이스라엘·리비아·터키·이란 등이었다. 해당 국가들의 지원으로 아프간의 반정부 세력이 파키스탄, 미국, 영국 영토에서 훈련을 받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아프간 정부는 소련의 군사 지원을 원했다.

알렉세이 코시긴 당시 소련 장관회의 의장은 타라키 아프간 대통령의 군병력 파견 요청을 거절했다. 코시긴 의장은 “우리는 군 병력을 파견하는 것이 중대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당신 나라의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반대로 더 나빠질 것이다. 우리는 외부 세력뿐만 아니라 당신 나라 사람들 대다수를 상대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국민은 절대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거절 이유를 말했다.

그러나 1979년 3월 이란과 접경한 헤라트에서 반정부 시위 도중 소련 군사고문 1명과 민간 소련인 2명을 학살하고 시체를 막대기에 꽂아서 거리에 전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타라키 대통령은 당내 경쟁자들과의 목숨을 건 권력투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타라키 대통령은 당내의 같은 칼크파인 하피줄라 아민 외무장관 겸 혁명위 부의장과도 반목했다. 타라키 대통령이 1979년 9월 모스크바로 간 틈을 타 아민 부의장은 타라키 축출을 계획했다. 결국 타라키 대통령은 귀국 후 아민과 총격전을 벌인 권력투쟁 끝에 결국 체포됐다. 몇 주 뒤 타라키 대통령은 카불의 한 병영에서 집중 사격을 받고 최후를 맞는다. 

아민은 집권 후 거만해졌다. 당시 소련 고문관들이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아민 정권이 오히려 공산주의를 민중들에게 악이 되는 방향으로 주입 중이라 조속히 교정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안드로포프 국가보안위원회 의장은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에 보낸 개인적 보고서에서 “올해(1979년) 9월 쿠데타와 타라키의 살해 뒤 아민이 자행한 대규모 탄압의 결과로 당·군·정부의 기구들이 근본적으로 와해되면서 상황이 격화되고 있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어 안드로포프 의장은 아민이 아프간 주재 미국 대사관의 대리 대사인 브루스 암스튜츠를 5번이나 개인적으로 만난 것과 관련해 “동시에 서방으로의 정치적 편향 가능성을 미리 경고하는 아민의 비밀 행동들에 대한 경고성 정보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라고 보고했다.  

그럼에도 아민은 잔악한 정치를 벌여 나갔고 결국 외부 자금지원을 받는 반대파 세력이 강해졌다. 특히 서방국들은 소련을 아프간 반정부 세력과 전쟁하도록 엮어 자신들의 무기를 배치하고 싶었기에 정부 반대파, 일명 무자헤딘 지원에 주력했다.

소련은 아프간 국경 일대에서 테러 행위가 퍼져나갈 것을 우려했다. 결국 소련은 아민 정권을 교체하고 아프간 사회에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 남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일부 파견대의 투입을 결정했다. 다만 아프간에 오래 머무를 계획은 아니었다. 드로즈도프 소련 정보기관 KGB 전 수장의 말에 따르면 1980년 소련군 철수 계획이 존재했고 소련군이 수비대가 되어 기타 중요 산업시설을 보호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렇게 소련은 1979년 12월 25일 15시(모스크바 시간) 아프간 국경을 통과했다.

소련은 타라키와 아민에게 밀려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있던 파르참파의 바브라크 카르말을 새 대통령 자리에 앉혀 새로운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무자헤딘은 소련의 개입을 기회로 여기고 카르말 정권을 공격했다.

무자헤딘은 대다수의 이슬람 샤리아 율법을 고수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타국 이슬람교도도 참전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들에게 서방국들의 금전적·물질적 지원이 주요한 역할을 했고 주변국 중 파키스탄의 군부 정권이 적극적으로 일조했다. 특히 미국은 ‘돌풍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무자헤딘에게 파키스탄 정보부를 통해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프간과 국경지대였던 파키스탄 북서부 지역은 반사회주의 세력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카르말 대통령은 소련에 무자헤딘 진압을 위해 “중앙아시아의 소련인들은 아프간인들과 생김새가 유사하니 이들을 투입해 달라”라며 도움을 청했다. 소련은 터무니없는 부탁에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사회주의 정권을 도와주고 아프간 사회의 안정을 위해 전면 개입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몇 달이면 끝날 것으로 생각하고 아프간에 온 소련군은 서방국의 지원을 받는 무자헤딘과 9년간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무자헤딘은 소련과 아프간 정부에 거룩한 신앙 전쟁, 일명 지하드를 선포했다. 하지만 무자헤딘이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1988년 5월 소련군 철수 때까지 무자헤딘은 단 한 차례의 대규모 작전 수행도, 단 한 군데의 도시를 차지하는 것조차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아프간에서 소련의 패퇴를 위해서 파키스탄의 핵개발도 용인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 브레진스키의 제안은 받아들여졌으며 파키스탄의 핵무장으로 이끌었다.

소련은 전쟁보단 화해를 이뤄내고 철군하길 원했다. 그런데 카르말 정부는 소련군 철수를 두려워하고 소련군을 놓아주지 않았다.

9년간의 대결 끝에 유엔의 중재와 소련과 미국의 입회 보증으로 아프간 정부와 파키스탄 정부는 198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무력분쟁 해결 관련 협정에 서명했다. 그렇게 소련은 1988년 5월부터 아프간에서 철수를 시작했고 1989년 2월 15일에 마무리했다.

소련군 제40군의 마지막 사령관 그로모프 상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1979년 말 소련군은 방해 없이 아프간에 들어갔고 베트남에서의 미국과는 달리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조직적으로 고국에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소련군이 철수를 하고 있을 때 서방국들은 소련이 불가능한 전쟁을 벌여놓고 패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초에 이 모든 것이 미국 주도의 계획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브레진스키 미 국가안보 보좌관은 1998년 프랑스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튀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소련의 아프간 개입 6개월 전부터 반정부 세력이었던 무자헤딘을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브레진스키는 인터뷰에서 “그때의 기밀 작전은 기발한 구상이었다. 그 작전은 소련을 아프간의 함정에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후회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소련이 아프간 국경을 넘었던 그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우리는 지금 소련을 베트남 전쟁으로 몰아세우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라고 썼다”라고 말했다.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당했던 것처럼 소련도 아프간에서 대가를 치르기를 희망했다. 그러면서 카터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정책 조언을 했다고 한다.

“아프간에서의 저항을 지속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는 반군들에 대한 무기 선적과 기술적 지원뿐만 아니라 더 많은 자금을 의미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는 파키스탄을 설득해서 반군을 지원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이는 파키스탄에 대한 우리의 정책 재고를 요구하며, 더 많은 무기 지원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에 대한 우리의 안보정책이 핵 비확산 정책에 의해 좌우되지 않음을 확신시켜야 한다. 우리는 중국이 반군을 지원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반군을 지원하는 선전 활동과 비밀공작에서도 이슬람 국가들과 협력해야 한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5년 3월 15일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정책, 프로그램 및 전략’이라는 이름의 비밀 ‘국가안보정책지침-166’(NSDD-166)에 서명했다. 이 문서는 아프간과 관련한 미국의 개입 목적을 변경하는 것이었다. 즉 카터 대통령 시절 설정한 정책목표인 소련군에 대한 ‘교란’에서 ‘승리’로 격상시키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문서는 미국의 궁극적 목적이 아프간에서 소련군의 철수고, 철수가 어려우면 소련이 개입의 대가를 최대한 치르게 만드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철수하는 소련군에 꽃다발을 전해주는 아프간 국민들.  © 이인선 연구원
▲ 철수하는 소련군에 꽃다발을 전해주는 아프간 국민들.  © 이인선 연구원

탈레반은 어떻게 아프간을 장악했나

소련군 철수 후에도 소련의 군사원조를 받던 아프간 나지불라 정권은 무자헤딘이 저지른 전쟁범죄로 친족이 죽거나 피해를 입었던 피해자 유가족들과 수도인 카불 시민들을 정치적 지지층으로 확보해 무자헤딘의 공격에도 건재했다.

나지불라 정권은 내전 기간 무자헤딘 진압을 앞세우면서 한편으론 무자헤딘에게 평화회담을 제의하거나 정부군으로의 항복·귀순을 권유하여 투항한 무자헤딘 출신 반군병을 정부군 소속 민병대로 편입시키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1990년 나지불라 정권을 겨냥한 정부군 장성들의 군사 쿠데타 시도가 실패한 이후 정부군의 군사력이 약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지원도 끊겼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나지불라 정권은 1992년 4월 무자헤딘의 카불 대공세로 무너졌고 무자헤딘이 아프간의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3년 무자헤딘 수장 부르하누딘 라바니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정권은 소수의 무자헤딘 성원을 중심으로 군벌 정권으로 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거점을 기준으로 많은 지지자를 보유하며 점점 이권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변해버렸다.

권력 다툼은 크게 라바니와 마수드가 이끄는 자미아티 이슬라미와 굴부딘이 이끄는 헤즈비 이슬라미 세력으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이때 내전을 종식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겠다며 1994년 등장한 단체가 탈레반이다.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중심으로 빠르게 민중의 지지를 얻었고 많은 군벌이 그들에게 무릎을 꿇거나 협력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렇게 탈레반은 1996년 라바니 정권을 무너뜨리고 수도 카불을 비롯한 아프간 90%를 통치하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선포했다.

탈레반 정권 수립 이후에 무자헤딘은 탈레반에 협력하는 자와 탈레반에 반대하는 자로 양분되었다. 탈레반에 협력하던 이들은 탈레반에 그대로 흡수되었고 반대하던 자들은 북부동맹이라는 반 탈레반 조직을 만들고 탈레반과 싸웠다.

이런 상황에서 2001년 9·11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간에 있다며 침공했다. 

 

러시아와 아프간

러시아는 미국과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했고 2003년부터 탈레반을 불법 테러단체로 지정해왔다. 그리고 러시아는 군사·교육·인도적 지원 등에서 아프간 정부와 협력을 강화했고 2007년에는 110억 달러에 이르는 아프간의 채무를 탕감해주었다.

아프간 정부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16회에 걸친 러·아프간 정상회담 등을 통해 양국 간 우호 관계를 형성했다.

러시아는 아프간 정세 불안정이 중앙아시아로 전이·확산할 가능성을 경계해왔다. 이에 러시아는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아프간 내부대화를 통해서만 분쟁 해소가 가능하다며 다양한 방식으로 아프간 평화 체계 구축에 앞장섰다.

러시아는 미국 주도 4자 회의(미국·아프간·중국·파키스탄)의 효과가 제한적이라고 보고 2016년 러시아 주도 6자 회의(러시아·아프간·중국·파키스탄·이란·인도)를 열었다. 이 회의 결과 ‘모스크바 협상체(Moscow format)’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어 러시아는 2016년 12월 “IS를 격퇴하기 위해 탈레반과 군사협력을 하고 있다”라고 밝히며 탈레반과의 협력을 시사한 바 있다.

모스크바 협상체는 2017년 4월, 2018년 11월 두 차례 열렸다. 아프간 정부는 두 차례 모두 불참했지만 탈레반은 모두 참석했다. 탈레반이 국제회의에 최초로 공식 참석한 일이었다.

이후로도 아프간 정부 인사와 탈레반 대표 간의 회동 계기가 마련되었고 2020년 2월 미국·탈레반 평화 약정 체결, 3차례의 아프간 정부·탈레반 평화협상이 이뤄졌다. 2021년 3월 18일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아프간 평화회의가 열렸고 탈레반 대표단도 참석했다. 

▲ 모스크에서 열린 아프간 평화회의에 참석한 탈레반 대표단(2021년 3월 18일).  © 이인선 연구원
▲ 모스크에서 열린 아프간 평화회의에 참석한 탈레반 대표단(2021년 3월 18일).  © 이인선 연구원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7월 8일 백악관 브리핑에서 “아프간에서 미군의 임무는 8월 31일 종료될 것”이라며 아프간 미군 철수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게 20년간의 미국·아프간 전쟁이 끝나고 탈레반이 아프간 전역을 되찾았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영국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2021년 8월 15일 트위터를 통해 미군의 아프간 탈출이 미국의 지정학적 영향력의 쇠퇴, 미국 패권의 퇴보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드미트리 쥐르노프 아프간 주재 러시아 대사는 15일 러시아 국영 방송 채널1에서 “탈레반이 우리 대사관을 포함하여 외국 외교공관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말했다”라고 설명했다. 쥐르노프 대사는 러시아 대사관에 직접적인 위협은 없다고 강조하면서 “우리는 차분하게 정상적으로 대사관에서 업무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쥐르노프 대사는 러시아 에코 모스크비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탈레반 통제 하의 카불 상황이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시절보다 낫다고 말했다. 또한 쥐르노프 대사는 “15일에는 정권이 붕괴해 무질서하고 권력 공백이 느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약탈자들이 생기기도 했지만 현재 카불 시내는 평화롭고 모든 게 진정됐다. 등교도 재개했고 여학생들도 학교에 다시 나가고 있다”라고 아프간 상황을 전했다.

러시아는 아프간의 내전 당시부터 모든 분쟁 세력, 모든 인종·종교 집단이 참여하는 전 민족 대화를 통해 대표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언급해왔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021년 8월 17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탈레반을 합법 정부로 인정하는 일을 서두르지 않는다며 아프간의 모든 정치 세력이 참여하는 거국적 대화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라브로프 장관은 “탈레반이 다른 정치 세력을 포함한 정부를 꾸리겠다고 밝히고, 여성 교육과 관련된 작업과 함께 이전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정부에서 일한 관리들도 등용하는 등 국가통치와 관련된 작업을 계속하겠다고 밝힌 점 등 희망적인 신호들을 보고 있다”라고 아프간 상황을 전달했다.

이어 라브로프 장관은 민족 대화를 통해 구성될 대표 정부가 아프간 국민의 지지를 받아 다민족 국가인 아프간의 최종 국가체제에 관한 합의를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견해에 탈레반도 긍정적인 반응이다.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2021년 9월 6일 기자회견에서 새 정부 출범과 관련해 “최종 결정은 이뤄졌고 조만간 새 정부가 발표될 것이며 약간의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작업 중”이라고 밝혔다. 이어 무자히드 대변인은 출범식에 다른 나라도 초청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앞서 아프간 현지 언론 1TVNews, 아랍권 알자지라 등은 탈레반이 새 정부 출범식에 중국·터키·러시아·이란·파키스탄·카타르 등을 초청했다고 보도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탈레반 측의 초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라브로프 장관은 “만약 아프간 새 정부가 포용적이라면 러시아는 관련 초청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전했다.

 

아프간ㆍ탈레반을 바라보는 러시아

러시아는 소련 시절이던 1979년 아프간 상황에 개입해 전쟁을 치르고 부침을 겪었다. 그렇지만 아프간 내 수많은 혼란 속에서 러시아는 섣부르게 개입하는 것 보다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아프간 정부뿐만 아니라 탈레반과 소통·협력을 이어왔다.

러시아는 아프간 내부 문제 해결과 더불어 외부 문제 해결에도 나서고 있다.

러시아는 아프간의 불안이 중앙아시아로 번지지 않도록 차단하는 동시에 탈레반 체제가 다른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의 발판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사실 이 점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아프간 주변국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이에 러시아는 집단안보조약기구(러시아·벨라루스·아르메니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및 상하이협력기구(중국·러시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인도·파키스탄) 회원국들과 협력하며 우발 상황을 대비하고 있다.

발렌티나 마트비옌코 러시아 상원의장은 현 상황에 대해 “탈레반이 아프간의 영토 전체를 통제하고 있고 오늘날 아프간의 새 정부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마트비옌크 상원의장은 “현재로서 아프간 정부가 어떻게 작동할지, 국가 구조가 어떻게 될지, 국가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국제 관계를 어떻게 구축할지를 결론 내리기 어렵다”라고 덧붙였다.

타스통신은 9월 10일, 탈레반 문화위원회 소속 에나물라 사망가니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아프간 새 정부의 출범식이 취소되었음을 알렸다. 사망가니는 “지도부는 국민에게 더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내각의 일부를 발표한 것”이라며 내각의 업무는 이미 시작했다고 밝혔다.

앞으로 탈레반 정부가 아프간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확답할 수 없다.

하지만 러시아와 아프간·탈레반의 관계를 보면 탈레반 정부의 정착이 멀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점이 우리가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들과 아프간·탈레반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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