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858기 사건 30주기] ③ 만들어진 테러범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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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858기 사건 30주기] ③ 만들어진 테러범 김현희
  • 진실의 길
  • 승인 2017.10.10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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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국 신부

폭파 사건의 조작, 전두환의 무지개 공작, 사고 조사는 없었다

 

 

◈ 폭파 사건의 조작

문 21) 신원 미상의 인물 김현희에 대해서는 후반부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고요. 정말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인 사고 조사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고 싶네요. 전두환 정권의 사고조사 어떻게 했나요?

답) 대부분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하여 ‘KAL858기 테러 폭파 사건’ 으로 알고 있지요. 사실상 국정원은 이 사건을 처음부터 ‘테러 폭파’ 라는 프레임 속에 가두어 버렸어요.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기획하에 사건을 만든 것이지요.

‘테러 폭파’는 사고조사와 전혀 무관하게 국정원이 만들어낸 사건의 성격 규정입니다. 우리는 ‘KAL858기 실종 사고’, 또는 ‘KAL858기 사고’ 라고 사용해야 맞습니다.

우리의 진상규명이 국정원이 의도적으로 만든 ‘테러 폭파’라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제대로 된 진상조사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백지상태에서 밑그림을 그려가야 합니다.

이 사건은 제대로 된 사고조사도 하지 않았고, 폭발물에 의한 사고라는 물증도 없으며, 김현희의 신원도 대부분 세탁되었습니다.

문 22) 일반적으로 폭파 사건으로 알고 있는데, 폭파사고가 아니었나요?

답) ‘폭파사고는’ 폭파와 관련하여 객관적인 물증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 사건은 폭파사고라고 발표했지만 폭발물에 대한 아무런 물증과 증거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뿐 만이 아니라, 자기들이 폭약이라고 했던 것들조차 거짓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대국민 사기극으로 귀결된 사건입니다.

문 23) 한 걸음 더 들어가서 폭발물 사기극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은 뭐가 있나요?

답)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모든 기체 잔해에 대한 화학적 감정을 한 적이 있지요. 감정 결과는 모든 잔해에서 ‘폭파 흔적 없음’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1987년 12월 13일에 사고 해역 부근에서 구명보트 한 개가 발견되어 잔해라고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구명보트에 대하여 국립과학수사 연구소가 감정한 결과 ‘아무런 폭발흔적이 없다’ 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상 ‘폭파에 의한 사건’ 이라는 국정원 발표는 객관성도 없고 과학적으로도 무너졌습니다. 나중에 발견된 61점의 잔해에서도 국과수의 감정결과는 ‘61점 모두 폭파 흔적 없음’ 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문 24)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폭파사고라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는데, 사기쳤네요?

답) 사기극이 여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1988년 1월 15일의 국정원 수사 발표때 제시한 ‘폭약 이름과 양’도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습니다. 김현희 일행이 이 여객기에 PLX 700cc와 C4350g을 설치해서 폭파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표한 국정원이 2007년 10월에 국정원 발전위원회를 통해서는 말을 바꿉니다. “폭약의 이름과 양은 김현희 진술을 토대로 수사기관에서 임의로 추정한 것이다.”

1988년 1월 15일 국정원의 수사결과 발표때에는 PLX와 C4를 사용하여 폭파시켰다고 발표하더니 20년이 지난 후에 와서 발뺌하면 인간 생명을 가지고 장난친 것인가요?

국민들을 농락한 것인가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지요, 엉터리로 수사한 사람들, 장난친 사람들 모두 책임지게 해야지요. 그러나 아무도 책임진 자가 없어요.

문 25) 어이 상실입니다. 국정원의 말바꾸기와 거짓말이 난무하네요. 사고 조사에 대해서 검토해봅시다. 당시 정부는 사고조사를 어떻게 했나요?

답) 사고 수색과 조사는 없었습니다. 당시 KAL858기 사건에 대한 국정원의 공작이 ‘무지개 공작’ 인데 이 공작에 따라 사고 조사의 지침과 방향이 나왔습니다.

이 공작 문건을 보면 이 사고를 ‘테러 폭파 사고’ 로 만들고, 그에 맞추어 정부 각 부처는 사건 방향을 잡도록 실행 지시를 내립니다.  그렇다면 정부 조사단은 사고 수색과 조사를 굳이 할 필요가 없었지요.

 

◈ 전두환의 무지개 공작

문 26) 자국민들이 탄 대형 여객기 사고가 났는데, 정부가 어떻게 이런 식으로 무지개 공작을 만들고, 지침과 실행 방안을 내리고 정말 기가 막힙니다.

답) 정부가 왜 존재합니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고, 국토를 수호하기 위함 아닙니까? 이러한 여객기 사고가 났을 때 정부는 즉각적으로 수색과 인명 구조활동과 사고 조사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인명구조와 사고조사는 뒷전이고, 무지개 공작이나 만들어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노태우 당선을 위해 이 사건을 어떻게 잘 활용할까만 궁리했으니 전두환 정부와 국정원은 범죄집단이었습니다.

문 27) 당시 국민들은 사고 초기에 정부 합동조사단이 꾸려지고, 사고 현장에 가서 수색 활동과 사고 조사를 한다는 언론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고 조사와 수색을 했다는데 너무 허술했고 사고 조사단이 열흘 만에 돌아온 것도 납득이 안됩니다.

답) 정부 조사단은 아무 성과도 없이 서둘러 돌아왔습니다. 조사단은 성과가 날 때까지, 현지 수색을 계속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사실은 현지 수색과 사고 조사는 없었다고 보면 됩니다. 왜 그랬나? ‘무지개 공작’ 때문입니다. 무지개 공작은 KAL858기 사건의 목적, 대응 방안, 실행방안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KAL858기 사건을 다루는 가이드라인이며 실행사항입니다. 정부 합동 조사단은 이 공작의 지침에 따라 사고 조사의 원칙을 세우고 움직였습니다. 이미 무지개 공작 문건에서 사고의 원인과 결과를 냈는데, 공작에 벗어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잖아요.

조사단은 사고 조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두환 정권 상부의 지시에 따라서 현지에 가서 요식적인 퍼포먼스만 해주고 시늉만 하고 돌아오면 됩니다. 곧 무지개 공작이 사고 조사였고, 결과였다고 보면 됩니다.

정부 조사단은 김현희가 한국에 들어온 직후 해체됩니다.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나요? 피해자 가족들은 피해자의 시신과 잔해발견을 무시하는 한국정부의 태도에 항의하여 단식투쟁과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문 28) 무지개 공작은 무슨 공작이고 언제 공개 되었나요?

답) 무지개 공작이 최초 공개된 것은 2006년 8월 1일에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의 ‘KAL858기 사건’ 조사결과 중간 보고서를 통해 이 공작의 문건이 처음 공개가 됩니다. 그러나 일부만 공개되었습니다.

무려 19년간 국정원 비밀 창고에 감춰져 있다가 2006년 8월에 알려진 것입니다. 이 공작은 13대 대선 플랜을 위해 국정원이 만든 공작인데, 주요 골자는 KAL858기 사건을 활용하여 대선을 유리하게 치룬다는 내용입니다. 

후반부에서 무지개 공작을 세부적으로 다루게 되니 여기서는 간략한 요지만 이야기 합시다. 국정원의 무지개 공작 문건을 보면 ‘이 사건을 13대 대선에 적극 활용하라’, ‘이 사건을 북한에 의한 테러 폭파 사건’으로 규정하고 대국민 여론전을 펼치라는 실행지시가 나옵니다.

정부는 사고 조사단에게 사고 조사를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지요. 조사단의 임무는 국정원의 들러리 역할만 수행하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지개 공작이 말해줍니다.

 

◈ 사고 조사는 없었다

문 29) 13대 대선에서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이 중요하다 해도 115명이 탑승한 여객기 사고인데 대선과는 별개로 사고 조사를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해할 수가 없네요?

답) 이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불가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 투성이입니다. 정부 조사단의 구성부터 살펴봅시다. 항공기와 철도 사고의 주무부처는 국토부입니다.

당시는 교통부였습니다. 그런데 정부 합동조사단에 국토부(교통부) 직원은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통부 안에 항공사고를 담당하는 주무과가 있었습니다.

이 사고가 항공기 사고 아닙니까? 그런데 정부는 항공 사고 전문가들을 모두 배제하고 외무부 중심으로 조사단을 구성합니다.

정부 합동 조사단. 조사단장 : 외무부 제 2 차관보 외무부 : 2명, 경찰 : 1명, 노동부 : 1명, 대한항공 : 18명 조사단 구성을 보십시오, 정부 조사단인데 정부 공무원은 5명이고, 대한항공 직원이 다수입니다. 대한항공 직원이 국가 공무원인가요?

▲ 입에 자살방지용 재갈이 물린 김현희가 부축을 받으며 걸어서 입국하고 있다.(1987.12.15)

외무부 직원들의 주도하에 무슨 수색을 하고, 조사를 하나요? 조사단 구성부터 정부 측 조사 의지가 어떠했는지 확연히 드러납니다. 외무부 주도하에 조사단이 꾸려진 이유는 무엇인가? 외무부의 임무는 김현희 신원확보입니다.

사고 조사는 뒷전이고, 바레인에 있는 김현희를 한국으로 빨리 압송하는 임무가 주어졌지요. 즉 무지개 공작 실행은 김현희를 조속히 한국으로 압송하는 것입니다.

대선 전날인 12월 15일에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 트랩을 내리는 그림이 필요했습니다.

문 30) 정부가 사고 조사 의지가 있었다면 국토부 중심의 합동 조사단을 구성하고, 별도로 김현희 일행 압송을 위한 외무부 중심의 외교 협상팀을 만들어 투트랙으로 가동할 수 있지 않았나요?

답) 바로 그게 상식이고 그게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이 사건을 대선용으로 기획하여 비밀리에 공작을 펴고 있는데, 만일 국토부 조사단이 제대로 된 사고조사를 할 경우, 정부가 이미 만들어놓은 무지개 공작과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공작은 차질을 빚거나 실패하게 됩니다. 정부가 조사단 구성에서부터 국토부 직원들을 모두 배제한 무슨 이유가 있었지 않나요? 사고 조사와 결과는 무지개 공작으로 이미 끝난 것이니 국토부는 뒤치다꺼리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 국토부 항공과에 근무하던 직원인 최00국장의 증언은 이를 뒷받침합니다. “저는 복사기와 팩스만 돌렸습니다. 저희들이 실제로 할 일은 없었지요” 그분은 2005년 11월 8일 정청래 국회의원실에서 개최한 국회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던 건교부의 고위 공직자 출신인데 토론회에 참석하여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조사단은 사고조사뿐 아니라 바레인에 머물고 있는 김현희를 조속히 데려와서 대선에 적극 활용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외무무가 조사단의 주무부처로 나선 것입니다.

외무부와 관련하여 좀 더 설명을 한다면, 정부는 바레인 정부에 동경협약등 재판관할권을 주장하며 ‘마유미(김현희)’의 신병 인도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레인 당국은 KAL858기 폭파범으로서의 물증도 부족하고 KAL기 잔해의 미발견으로 사건 해결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마유미의 신병 인도를 일차로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외무부가 미국을 통해 바레인 정부를 설득하여 김현희의 한국 인도를 성사시킵니다.

 

◈ 엉터리 사고 조사

문 31)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정부 조사단 구성부터 문제가 많았는데, 사고 수색과 조사 과정에서 어떤 사례들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답) 당시 KAL858기는 실종 사고였지요. 모든 방송과 언론에서 그렇게 보도했습니다. 사고 위치도 모르고, 어떤 사고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가장 먼저 사고 위치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골든타임을 놓치면 안됩니다.

사고 위치의 정보를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먼저 사고 지역의 관할 국가의 관제소에서 입수한 교신기록과 레이더상 항공 정보를 입수하는 일이 중요하지요. 사고 지역이 해상인지, 육상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이 여객기가 실종되었을 때 인도양 상공에서 실종된 사고라는 보도가 많았습니다. 당시 태국과 미얀마의 항공 정보에 의하면 KAL858기가 레이다에 포착이 안되었다고 합니다. 즉 이 여객기가 아직 두 나라의 관할 영토에 진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KAL858기는 육지에 진입하지 못하고 해상 항로에서 비행중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나라의 정보로 한국 정부는 이미 사고 지점이 해상이었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 조사단은 태국과 미얀마가 제공한 정보를 무시하고 산악지대로 가서 수색활동을 벌입니다. 열흘 중에 무려 7일간 육지 수색에만 매달립니다. 바보입니까? 아니면 공작 수행입니까?

문 32) 사고 관할 지역 국가들이 제공해준 중요한 정보는 해상 지역에서 사고가 났다는 것인데 이를 무시하고 조사단이 육지 수색을 벌였다니 어이가 없네요. 왜 그랬나요?

답) 항공 사고 조사의 기본 매뉴얼이 있는데 이를 전면 무시한 조사단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항공기는 항로상에 위치 통보 포인트(교신 지점)에서 관할 구역 국가의 관제탑과 교신을 합니다.

당시 사고 관할국인 태국 돈무앙 국제공항 관제소는 안다만 해역의 해상사고라는 정보를 우리 정부에 제공했습니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항공기가 벵골만 해역으로 ‘해상사고’ 라고 보도합니다.(12월 5일자) 사고 초기, 사고와 관련한 정보들은 모두 해상지역이었는데, 왜 한국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무작정 육지 수색에만 골몰했는가?

조사단은 사고 수색의 대부분을 육지 수색으로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골든타임(황금시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도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았다면 모든 학생들과 탑승자들을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사단이 해상사고 정보를 받았으면 즉시 해상 지역 수색과 구조활동을 펼쳐야지 왜 엉뚱한 산악지역으로 가서 허탕을 치고 빈손으로 돌아왔는지 이해 불가입니다. 당연히 수색 실패, 인명 구조 실패, 기체 잔해 수거 실패라는 최악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문 33) 조사단의 무능, 실패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조사단의 사고 의지에 대한 물음이 생깁니다. 사고 의지가 있었다면 제공한 정보대로 해상 지역으로 가는 게 맞는 거 아닙니까?

답) 동의합니다. 조사단의 조사 활동을 비유하면 부산에서 교통사고가 났다고 통보를 받았는데, 서울에 가서 사고 조사를 하는 격입니다. 사고 위치를 모르는데 무슨 사고조사를 할 수 없습니다.

조사단이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대의 육지 수색을 펼친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사고 조사를 회피하기 위한 의도성이 강해 보입니다. 전두환 정부의 사고 조사 지침은 사고 조사 할필요 없다는 것 아닙니까?

문 34) 조사단이 11월 30일에 현지로 가서 12월 9일에 사고 조사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12월 9일 귀국하면서 사고 위치를 아직 모른다. 성과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이 사고에 대한 뉴스가 연일 보도되는데, ‘북한에 의한 테러 폭파 사건’ 이라는 정부의 발표가 쏟아져 나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답) 정말 말이 안됩니다. 사고 위치도 모르면 사고기의 동체도 못찾으니 사고 조사를 못하는 조사 불능상태입니다. 조사단이 ‘아무 것도 못찾았다’ 고 실토하고 복귀한 날이 12월 9일입니다.

그런데 12월 2일에 대통령 전두환이 임시 국무회의에서 ‘북한에 의한 테러 폭파’를 언급합니다. 이어서 외무부 장관, 문공부 장관이 ‘북한에 의한 테러 폭파 사건’이라고 사고내용을 공식 발표합니다.

차라리 합동 조사단이 귀국 기자회견을 통해서 발표했다면 그래도 신뢰가 가겠지만 전두환이가 뭘 안다고 발표합니까? 조사단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는데, 장관들이 무슨 근거로 ‘테러 폭파’로 발표합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결국 전두환 정권은 “우리는 이 사건이 정말 필요해서 우리가 만들었고, 우리의 기획 작품이다” 고 자백한 것으로 해석하면 딱 들어맞습니다. 그 증거물이 바로 ‘무지개 공작’ 입니다. 이것 말고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계속>

 

[KAL858기 사건 30주기] ① 만들어진 테러범 김현희

[KAL858기 사건 30주기] ② 만들어진 테러범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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