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보훈의 달, 대전현충원의 적폐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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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 보훈의 달, 대전현충원의 적폐를 찾아서
  • 충청메시지 조성우 기자
  • 승인 2017.06.1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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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에 안장된 국가유공자들 사이에는 적폐인물 52기가 섞여 있다.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민족의 성역인 대전현충원을 찾았다.

국립대전현충원은 36년의 일제 강점기에는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또는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희생된 독립유공자와 6.25 한국전쟁 등 국토방위를 위해 전사, 순직한 국가유공자,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무명용사와 시신을 찾지 못한 호국영령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바친 영혼들의 안식처다. 

▲ 김창룡 묘

이와 같이 민족의 얼이 서린 신성한 호국 보훈의 성지에도 적폐세력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창룡이다. 이역만리 만주땅에서 우리민족을 괴롭히고 독립군을 소탕하며 악질로 소문난 "헌병보조원출신" 이다.

▲ 민족반역자 김창룡의 묘지에는 "국군기무사령관 중장 조현천" 의 꽃다발이 눈길을 끈다.

김창룡은 해방 후 북한에서 친일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하여 남한으로 내려와 육사 3기생으로 입교했다. 그는 육군특무대를 만들어 사건을 조작하여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하며 이승만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 김창룡의 명령에 의해 총살되는 보도연맹 민간인들

한국전쟁 때는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등 전국의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을 지시한 인물로 약 2만 5천여 명을 처형했다며 그의 업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출근길에 허태영대령에 의해 총살되기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암살사건 배후에는 항상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특히 지난 1992년에 안두희는 김구 선생 암살 당시 '실질적 지령' 을 내린 인물로 '김창룡' 을 지목했다.

출처-오마이뉴스

한편 지난 6월 6일 현충일에는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69호에 안장된 김창룡 묘역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 이장퍼포먼스를 벌렸다.

◈ 대전 현충원에 없어야 할 적폐인물이 김창룡 뿐일까? 

대전현충원에는 적폐인물 52기가 안장되어 있다고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사에서 밝혔다.

◈ 어찌 이런일이 있을 수 있을까?

역사의 중심에는 민족의 반역자 이승만이 있었다. 1948년 9월 7일 국회에서 재석의원 141명 중 103명 찬성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 이 제정되었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됐다. 

▲ 친일 반역자 이승만

이승만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친일파 처단보다 나라의 토대를 튼튼히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며 친일파 처단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1949년 당시 남대문로 2가(현 롯데백화점 맞은편 명동 쪽)에 있던 반민특위 청사. 특위 해산 후 국민은행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승만정권은 결국 반민특위 청사에 50여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1949년 6월 6일, 친일청산을 위한 정부조직인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친일청산 뿌리를 뽑아버린 근대사에 가장 치욕적인 날이다.

▲ 반민특위 습격 다음날인 6월 7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관련 기사. 제목에서 특위 ‘습격’ 대신 ‘돌연수색’ 이라 적고 있다.

또한 이승만정권은 그날부터 20일 후인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까지 암살함으로써 반민특위를 무력화 시켰다. 그후 두달 뒤 1949년 8월 31일 자로 반민특위가 문을 닫는다. 친일청산의 꿈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와 같이 반민특위 해체와 김구선생의 암살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승만과 친일세력에 의해 치밀하게 기획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정권는 1956년 4월 대통령령 제1145호로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건」을 개정하여 근대사의 물결을 바꾼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함으로써 치욕의 역사를 감췄다. 그러나 진실을 감출수 있겠지만 역사에서 지울수는 없다.

출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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