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환 칼럼] 경제공격을 자행하는 일본의 숨겨진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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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환 칼럼] 경제공격을 자행하는 일본의 숨겨진 의도
  • 문경환 주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9.08.06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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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한국 재판부의 일제강점기 강제노역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임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공격을 단순히 재판 결과 하나에 대한 반응으로 봐서는 안 된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서 출발한 일본 군국주의화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1. 미국은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부추긴다

(1)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서 중심은 일본

미국은 동북아 정책의 기본 거점으로 일본을 중시한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일본을 중심으로 동북아 정책을 펼쳐 왔다.

미국은 일본에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이자 패전국이었지만 독일과 달리 분단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응징하기보다 유라시아대륙에서 급성장하는 사회주의를 억제하는 데 관심이 집중돼 있었다. 그래서 일본을 자신들의 불침항모(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로 삼기 위해 일본 전체를 점령했고 대신 우리를 분단시켰다.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처벌도 관대했다. 미국은 전범 처벌을 위한 도쿄 재판에 25명을 기소, 전원 유죄를 선고했으나 7명만 판결대로 교수형을 집행하고 나머지는 사면해주었다. 또한 수많은 전범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다.

이들 가운데 기시 노부스케(아베 총리의 외조부)는 후에 총리가 되었고, 고다마 요시오, 사사가와 료이치도 후에 우익 실세 정치인이 되었다. 생체 실험으로 악명높았던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 부대장 역시 재판도 받지 않고 석방됐다. 미국 검사 키넌은 “지식의 보호는 인류의 책임”이라며 불기소 처리했고 이들의 생화학무기 자료는 미국 연구소로 옮겨졌다.

미국은 일본의 경제 부흥도 도왔다.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처음에 78개의 재벌 대기업을 전범 취급하며 해체해 주식을 일반인에게 판매했다.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부 기업은 기업명 사용도 금지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사회주의권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재벌을 부활시켰다.

미쓰비시의 기업명 부활도 허락했다. 이들 재벌은 미군에 군수물자를 납품하면서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요시다 시게루 당시 총리는 한국전쟁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군을 한반도에 투입하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연인원 1,450명의 일본 군인이 미군의 지시에 따라 원산, 군산, 인천, 해주, 진남포 등에 투입되었고 442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다고 한다.

또 731부대 출신 요원들이 세균전을 지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나아가 일본은 한국전쟁 참전 대가로 미국에 한반도 재식민지화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일본군이 이 땅에서 작전을 펼친 천인공노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1952년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하고 연합군최고사령부를 해체, 이후 1957년 미 국방부의 통합사령부계획에 따라 주일미군을 창설했다. 1960년에는 미일상호협력및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해 주일미군의 영구주둔을 확보했다. 또 주일미군을 보조할 군대의 필요에 따라 1950년 경찰예비대를 창설하고 1954년 이를 사실상 군대조직인 자위대로 발전시킨다.

국방비를 아끼고 자국 피해를 줄이기 위해 현지 군대를 육성, 활용한다는 미국의 국방정책에 따라 미국은 시종일관 일본의 재무장을 적극 지지해왔다. 2014년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해 중일 분쟁지역인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가 미군의 방어 대상이며 일본의 집단 자위권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지난 5월 28일 일본 요코스카 해상자위대 기지를 방문해 준항공모함인 이즈모급 호위함 ‘가가호’에 승선, 아베와 함께 자위대원을 격려했다.

▲ 미국 대통령 최초로 일본 자위대 함정에 승선한 트럼프.

미국은 동북아 전략에서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중요 수단으로 삼고 있지만 둘의 지위는 결코 동등하지 않다. 2017년 3월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일본을 ‘가장 중요한 동맹국’으로, 한국을 ‘하나의 중요한 파트너’로 차등 규정해 논란이 일었다. 이후 미 국무부가 한, 일 모두 중요한 동맹이라고 정정했지만 미국이 한국보다 일본을 더 중시한다는 점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런 동향은 최근 동북아 질서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래 미국의 동북아 전략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통해 북·중·러를 포위 압박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한국은 일종의 ‘돌격대’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런데 북한의 핵억지력이 성장하면서 미국이 힘에서 밀리게 됐다. 북미 군사 대결에서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으나 미국이 직접 핵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한국의 돌격대 역할에 변화가 불가피해진 것이다.

또 한국 사회에 자주적 기운이 성장하고 남북관계가 발전해 남북정상회담까지 하다 보니 한국을 대북 돌격대로 내세우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의 최대 무역상대국으로 중국이 부상하면서 한국 정부가 중국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는 것도 한국의 돌격대 역할을 방해한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한국보다 일본에 더 무게중심을 두게 되었다. 미일동맹을 축으로 한미일 삼각동맹을 재편하려는 것이다. 이는 최근 유엔사에 일본을 포함시키려는 주한미군의 움직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 무게중심을 두다보니 일본의 재무장, 군국주의화가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2) 한일 결탁을 강요해온 미국

한미일 삼각동맹의 완성을 위해서는 일본의 재무장과 함께 한일 군사 결탁이 필요하다. 미국이 한일 군사 결탁을 추진해온 대표적 사례를 살펴보자.

첫째, 박정희가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한일협정은 미국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자 케네디 미 대통령은 사무엘 버거 주한미대사 지명자에게 서울에 가서 한일관계 개선에 집중하라고 지시한 뒤 자신도 이케다 일본 수상에게 한일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한일협상을 주도하던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일본이 독도 문제를 들고 나오자 폭파해버리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미국의 압박으로 일본에게 면죄부를 안겨주는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당시 시위대 내에서는 “양키 입 닥쳐”라는 구호가 나오기도 했다. 한일협정을 둘러싼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는 김연철 통일부장관이 2016년 펴낸 『협상의 전략』에도 잘 나온다.

둘째, 전두환 정권 시기 안보경협 40억 달러 지원 역시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 

겉으로는 전두환 정권이 일본에게 안보비용으로 100억 달러를 요구하고 일본이 거부하면서 협상 끝에 40억 달러의 차관·융자를 일본이 제공하는 것처럼 정리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동북아 안보에서 일본의 역할을 높여 자신의 부담을 줄이고 한일 군사 결탁을 강화하자는 미국의 구상 아래 1981년 2월 한미정상회담, 3월 미일외교장관회담을 통해 조율된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 군사지원을 직접 하면 강력한 반발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경제협력의 탈을 씌워 한일 경제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안보경협을 계기로 일본 자본의 한국 유입이 급격히 늘어났다.

셋째, 박근혜 정권이 체결한 한일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도 미국의 독촉이 있었다. 

한일 사이의 최초 군사협정인 GSOMIA는 2010년 일본의 제안으로 처음 등장해 이명박 정부가 몰래 처리하려다 국민의 반발로 무산된 전력이 있다. 이에 2016년 4월 한미일 3자 정상회의에서 미국이 연내 체결을 독촉하자 박근혜 정부가 신속히 나서서 11월 22일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6년을 끌었던 사안을 미국의 한 마디로 반년여 기간에 해치운 것이다. 그리고 최근 일본의 경제공격에 GSOMIA 파기 가능성이 거론되자 미국은 “GSOMIA가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압박했다.

넷째, 박근혜 정권의 한일 위안부 합의 역시 미국의 압력에 의한 졸속 합의였다.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태스크포스’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한일관계 악화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략에 부담으로 작용함으로써 미국이 양국 사이의 역사 문제에 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조속히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았다”고 한다.

한일 위안부 합의가 미국의 압박에 떠밀려 이뤄진 합의라는 뜻이다. 실제로 “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이 양보하지 않아 진전이 없다’고 미국을 설득했고, 미국이 다시 한국의 양보를 압박하는 악순환이었다”고 한다. (「“미국이 개입해 박근혜 정부 압박… 한일 위안부 합의 졸속 타결”」, 한국일보 2017.12.27.)

이처럼 미국은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한일 군사 결탁을 압박해왔으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올해 2월 존 설리번 미 국무부 부장관이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에게 “한일관계를 부탁한다, 사이좋게 지내달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일 사이의 갈등은 일본의 과거사 부정, 군국주의 재무장에 원인이 있음에도 미국은 한국의 양보를 요구하며 일본 중심의 한일 관계를 추진하고 있다.

지금 자행되는 일본의 경제공격도 미국이 부추긴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미국이 일본에게 직접 경제공격을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일 갈등 상황에서 노골적인 일본 편들기는 일본이 마음 놓고 한국을 공략하도록 등을 떠밀어준 셈이 됐다.

지금도 미국은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독도에 대해서도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고 있다. (관련내용은 [아침햇살32]친미의존안보 혁파하고 통일안보로 가야 한다② 참조) 일본이 경제공격을 하며 한일 갈등을 확대하는 목적에는 군국주의화가 중심에 있는데 이 역시 미국이 추진하고 지원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최근 사태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2. 일본은 군국주의에 매달린다

(1) 군국주의에 매달리는 정치적 이유

일본의 근대화를 열었던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침략을 통한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군국주의가 일본 정계에 유행하였다. 한반도를 정벌하자는 정한론도 이 때 나왔다. 당시의 메이지 유신 세력의 후예가 1950년대 등장한 자민당이다. 그리고 자민당은 2009~2012년 민주당 정권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일본을 통치하였다.

일본 정치는 세습으로 유명한데 전체 중의원의 20% 이상이 부모에게서 지역구를 물려받은 세습 정치인이며 자민당은 30%가 넘는다. 이들 세습의원은 2대, 3대는 물론 4대째 세습을 하는 이들도 있다. 지금의 아베 총리도 3대 세습 정치인이다.

자민당의 주류는 이들 세습 정치인이 차지하고 있다. 정치 노선은 물론이고 세력, 인맥까지도 100년 이상 교체가 되지 않은 셈이다. 그러니 일본 정치계가 자기 부모, 조부모가 저지른 과거사, 즉 전쟁 범죄와 식민지배에 대해 반성하거나 사과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일본과 달리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세력이 정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전후 독일과 일본이 과거사 청산에서 전혀 다른 길을 간 이유가 여기 있다.

(2) 군국주의에 매달리는 경제적 이유

2차 세계대전 패배로 일본 경제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기아에 빠진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연합군최고사령부가 미국에 긴급 구호물품을 요청할 정도였다. 그런 일본이 한국전쟁 기간 미군에 군수물자를 납품하면서 고속성장을 하였다.

일본 총리가 한국전쟁을 ‘신이 내린 선물’이라 한 것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일본 경제는 전쟁으로 성장한 전쟁친화경제다.

그랬던 일본이 1985년 플라자 합의를 계기로 장기불황에 빠졌다. 당시 심각한 무역적자에서 벗어나려는 미국이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높이는 환율조정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는 장기불황을 겪었고 그 후로도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해 ‘잃어버린 20년’에 이어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그나마 2010년대 후반에야 불황에서 탈출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으나 다시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 정책으로 인해 위기를 맞게 됐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 무역적자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나라와 무역분쟁을 벌이고 있으며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5월 25일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은 가장 먼저 일본 주요 기업인과 만찬을 갖고 “앞으로 몇 개월 안에 몇 개의 커다란 발표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미일 양자 무역협정인 상품무역협정(TAG) 협상을 몇 개월 안에 끝내라는 압박이다. 미국은 자동차·농산물 관세와 환율 등에서 일본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미국이 경제위기를 겪을 때마다 ‘일본 쥐어짜기’로 벗어나다보니 일본은 대외팽창을 통해 미국에 ‘상납’한 만큼을 벌충하려고 한다. 그 외에는 일본을 회생시킬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일본은 원래 독점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제국주의 국가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지만 일본의 제국주의 속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이 군국주의 해외 팽창에서 경제위기의 해법을 찾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3) 군국주의 부활의 현장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은 크게 3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전쟁을 할 수 있는 법적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일본은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되려고 하고 있다. 일본 헌법 제9조는 “국권의 발동에 의거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치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무력행사도, 군대 보유도, 교전권도 포기했기에 일본 현행 헌법을 평화헌법이라 부른다. 이 헌법 규정 때문에 세계 10위 안에 드는 막강한 자위대도 정식 군대라 부르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이 조항을 무력화하여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승격하고 다른 나라와 자유롭게 전쟁을 할 수 있는 교전권도 되찾으려 하고 있다. 헌법 개정이 논란을 부르고 쉽지 않자 헌법은 그대로 둔 채 해석을 교묘히 바꿔 실질적으로 헌법을 지키지 않는 ‘해석개헌’이라는 편법을 동원하기도 하고, 교전권을 확보하기 위해 2014년 7월 1일 ‘집단적 자위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다.

지금의 경제공격이 개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영채 게이센여대 교수는 7월 9일 “이번 (수출규제) 조처가 보수표 결집에 큰 효과가 있는 게 사실이다. 아베 정부는 이번 선거만이 목표가 아니고 중의원 선거까지 추가로 이겨 (그 동력으로)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생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 개정을 자신의 필생의 과업이라고 밝혀왔다. (「아베, 경제보복 노림수 끝엔 ‘평화헌법 개정’ 있나」, 한겨레, 2019.7.10.)

둘째는 전쟁에 대비해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지금 일본 자위대는 상비군 25만 명에 전차 700대, 장갑차 3000대, 공군기 900기, 헬리콥터 741기, 전투함 131척, 국방비 500억 달러 이상의 막강한 무장력을 갖추고 있다. 여러 기관들은 일본의 자위대 순위를 세계 10위 안에 포함시킨다.

2010년대에 이르러서는 각종 미사일을 도입하는 등 공격용 무기 개발과 구입에 힘을 쏟고 있으며 항공모함 보유도 추진하고 있다. 또 자위대 해외 파병 경험을 꾸준히 쌓고 있다. 1991년 걸프전에 해상자위대를 파병했고 남수단에도 평화유지군으로 들어갔다. 미국 주도의 각종 연합훈련에도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셋째는 군국주의를 위한 국내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한 욱일기는 패전 후 사용이 금지됐지만 1954년 해상자위대 창설과 함께 다시 사용되고 있다. 일본인들은 국제 스포츠대회에도 일장기와 함께 욱일기를 들고와 응원을 한다. 군국주의 문화를 자연스레 유포하고 있는 것이다.

매년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마찬가지다. 군국주의 교육의 상징인 교육칙어를 부활시키고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명시, 체육시간에 총검술을 가르치도록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거 전쟁범죄와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거부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물론 과거 일본의 몇몇 총리나 장관이 과거사를 반성하는 발표를 한 적은 있다. 하지만 강제징용과 ‘위안부’, 식민지배에 대한 내용을 빠트리거나, 무엇을 반성한다는 것인지 혹은 누가 반성하는 것인지 모호한 표현으로 사과를 해서 논란을 키워왔다.

의회나 내각의 비준이 없어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게다가 입으로는 반성한다고 하고서 행동으로는 군국주의화를 추진한다거나, 배상을 거부하는 등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습도 보였다. 지금 한국에 대한 경제공격을 하는 직접적인 명분도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또 일본은 사죄와 배상은커녕 과거사 자체를 부정하고 지우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자국 교과서에 전쟁범죄를 삭제하고 과거를 미화하는 내용을 채워 넣거나, 다른 나라 교과서에서 ‘위안부’ 문제를 삭제해달라고 로비를 하고, ‘위안부’를 기리는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

이처럼 일본은 군국주의화에 매달리며 모든 국력을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

 

3. 미국과 일본의 충직한 앞잡이, 자유한국당

(1) 친일하면 삼대가 흥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8월 14일 청와대 오찬에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사라지게 하겠다”고 하였다. 대통령이 직접 언급할 정도로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대대로 잘 살고 있는 현상은 심각한 사회 문제다.

이런 현실을 보며 누가 친일을 거부하고 반일을 하려 하겠는가. 그러나 누구보다 훌륭한 우리 국민은 일본의 경제도발에 맞서 ‘독립운동은 안 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면서 반일운동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친일하면 삼대가 흥하는 현실은 누가 만든 것일까?

바로 미국이 만들었다. 1945년 해방 후 이 땅에 진주한 미군은 일제를 위해 일한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했다. 일제 관료들이 본국으로 돌아갔으니 미국에게 잘보이기만 하면 다들 승진하게 되었다.

친일파에게 해방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었던 셈이다. 이런 축복을 만든 건 미국이다. 친일파들은 태생적으로 친일과 함께 친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완용이 죽기 전 자식에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라는 유언을 남길 만도 하다.

일본 역시 친일파 삼대가 흥하는 데 일조했다. 한일협정 체결 당시 박정희가 열성 친일분자였음을 확인한 일본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후원했다. 미 중앙정보국(CIA) 특별문서에 따르면 박정희는 일본 기업에게서 6600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친일파들이 계속 득세할 수 있도록 후원해준 것이다.

일본은 한국 지식인에게도 거액을 후원하며 국내에 친일 논리를 유포하도록 유도한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A급 전범 사사카와 료이치가 설립한 일본재단이 연세대에 출연한 75억 원으로 1995년 만들어진 아시아연구기금이 있다.

일본에서도 양심 있는 지식인은 일본재단 돈을 받지 않을 정도로 악명 높은 재단의 돈으로 여러 교수들이 지금도 연구를 하고 있다. (「20년째…일본 우익 기금으로 연구하는 교수들」, 한겨레, 2015.8.19.)

이런 미국과 일본의 지원 아래 친일파들은 한국을 친일파 세상으로 만들어나갔다. 일단 권력을 잡은 친일파들은 대대로 자손들이 기득권을 누릴 수 있도록 법, 제도를 정비하고 사회 분위기를 왜곡시켰다.

이들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습격해 끝내 해체시켰고, 친일재산환수법 재정에도 무더기 반대표를 던지며 방해했다. 친일파들은 자신의 과거를 덮기 위해 반공반북에 매달렸고 이를 명분으로 국가 훈장을 받고 현충원에 묻힌 이들이 부지기수다. 친일 정치인, 친일 기업인, 친일 언론인이 서로 결탁해 대대로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이처럼 미국과 일본이 키워준 친일파는 자신들의 운명이 미·일에 있음을 잘 알고 그들의 충실한 앞잡이가 되었다. 미·일을 위해 국익을 팔아먹으며 대대로 부와 권력을 누리는 게 친일파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겠다.

(2) 박정희

자유한국당이 신처럼 떠받드는 박정희는 한국 정치에서 친일결탁의 큰 획을 그은 자다. 박정희는 거물 친일파이면서도 쿠데타로 권력을 틀어쥐어 한국을 친일파의 나라로 만들어버렸다. 이승만까지만 해도 친일파가 득세하기는 했어도 이승만 자신은 반일독립운동 경력을 내세웠기에 노골적인 친일 정책을 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거침없는 친일행각을 벌였다.

원래 박정희는 일본에 ‘개와 말처럼’ 충성하겠다고 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자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반일독립부대를 토벌한 악질 친일파였다. 그는 평소 말이 없다가도 토벌명령만 떨어지면 “요시(좋아)!”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그랬던 자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더니 술에 취하면 일본 군복을 입고 청와대 뜰을 거닐며 일본 군가를 불렀다. 이처럼 박정희는 과거 자신의 친일 행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였다. 당연하게도 일본은 박정희의 쿠데타를 반겼다. 일본군 장교였던 ‘타카기 마사오’가 한국의 대통령이 됐으니 한국이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가 일본을 방문해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등 일본 내 자기 인맥을 만나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의 친일 성향을 드러냈고 특히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인 나구모 신이치로 중장에게는 큰절까지 올려 일본의 환심을 샀다. 1962년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식에 특사로 참석한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는 기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지간을 자인할 만큼 친한 사이”라면서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것은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박정희가 대통령 집권 기간 범국민적 반발을 진압하며 강행 처리한 게 바로 한일협정이다. 1965년 6월 22일 일본 총리관저에서 체결된 한일협정은 여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일본은 한일협정에 1910년 한일합병이 합법적이라는 단서를 남겼다. 즉, 한반도 강점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배상도 하지 않았다. 일본은 배상도 아니고 보상도 아닌 ‘경제협력자금’을 줬을 뿐이다.

이를 토대로 일본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과거사를 미화하고 있다. 예컨대 1995년 와타나베 외상은 “일본은 한국을 통치한 적이 있지만, 식민지 지배라는 말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등의 공문서에는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한일병합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으로, 무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망언을 하였다.

다음으로 한일협정은 일제강점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을 어렵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일본에게 받은 돈의 5%를 개인보상에 사용했는데 부상자는 아예 제외했고 사망자도 총 8,552명에게만 보상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대일 재산청구권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서 모든 청구권이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명시한 사실을 숨겼다.

한일 청구권 협정의 세목이 공개된 건 40년 만인 2005년 노무현 정부 때다. 이렇게 박정희는 일제강점 피해자의 청구권을 막아버렸다. 이로 인해 일본 본토에 연행된 한국인 72만 명과 한반도에서 고통 받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해자들은 아무런 구제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박정희는 한일어업협정을 통해 한국 어장을 일본에게 내어주었다. 또 일본 어민이 한국 영해에서 불법 어로작업을 해도 일본법에 따라 일본 법정에서 재판하는 ‘기국주의’에 합의해버렸다. 이를 통해 우월한 장비를 갖춘 일본 어선은 일방적으로 동해를 휩쓸 수 있었다.

또 한일협정은 재일동포의 권리를 포기해버렸다. 당시 65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남아있었다. 일본에서 재산을 가지고 나갈 수 없게 금지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재일동포 문제가 자신의 한반도 강점에서 비롯됨을 인정하지 않고 차별대우를 하였다. 박정희는 이 문제를 일본 정부에게 알아서 하도록 맡겨버렸다.

이렇게 박정희는 일본에 대한 예속과 굴종의 터전을 닦았다. 오늘날 한일 사이의 모든 문제는 그 뿌리를 여기에 두고 있다. 한일 군사 결탁을 바라는 미국 입장에서 박정희는 이승만보다 훨씬 유용한 인물이었으며, 군국주의를 추구하는 일본 입장에서도 박정희는 자기에게 충성하던 신하의 본분을 계속 간직한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였다.

(3) 박근혜

박정희를 그대로 이어받은 박근혜 역시 한일 관계에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물론 박근혜 정권 초기에는 일본의 망언 등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되어 정부 간 교류가 막히기도 했다. 그러나 겉으로 냉랭해 보인 것과 달리 박근혜는 한일 결탁을 위한 심각한 조치들을 과감히 추진하였다.

2015년 박근혜는 이른바 ‘위안부 합의’를 통해 일본에 면죄부를 주었다. 이 합의는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를 철저히 배제하고 정부 마음대로 결정한 것이며,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와 반성도 없었고(이듬해 아베 총리는 위안부 강제연행 증거 없다는 망언을 또 했다), 10억 엔이라는 ‘푼돈’을 배상이 아닌 지원금 형식으로 받았고, 그럼에도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합의해버렸다. 게다가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소녀상을 철거하는 등 굴욕적인 합의까지 하였다. 당시 우리 국민은 이 합의를 을미늑약(2015년이 을미년)이라 불렀다.

이와 함께 박근혜는 일본 기업에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양승태 대법원장을 통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판결에 개입하기도 했다. 2016년 11월 23일 박근혜는 이명박이 실패한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 체결을 강행했다. 박근혜는 조약이 아닌 행정협정으로 처리해 국회 비준 절차를 거치지 않도록 했다.

이 협정은 한일 사이의 첫 군사협정으로 이후 한일 군사 결탁의 시작을 알리는 성격을 갖는다. 실제로 이 협정 이후 한일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체결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 협정으로 일본은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인정받는 효과를 보았고 평화헌법 개정에 유리한 조건을 얻게 되었다. 또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에도 한 걸음 다가갔다.

이처럼 한일 군사 결탁의 길로 빠르게 진입하던 박근혜는 끝내 국민의 분노를 받아 탄핵 당했다. 그러나 박근혜가 구속된 후에도 박근혜의 후예들은 친일 행각에 여념이 없다. 이번 일본의 경제도발을 두고 온 국민이 일본을 규탄하는데도 유독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친일정치인들은 일본의 논리로 일본을 비호하기 바쁘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정부의 대응이) 구한말의 쇄국정책과 다를 게 없다”며 수출제한을 한 일본이 아닌 문재인 정부를 공격했다.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위안부 합의를 뒤집었기 때문”이라며 일본편을 들었다. 자유한국당 소속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아예 “지금은 우리나라가 마땅히 친미, 친일을 해야”한다고 했다.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도 “경제와 안보를 위해서는 협력해야 할 이웃이 일본”이라며 자신이 친일파임을 숨기지 않았다.

(4) 토착왜구부터 척결해야

위기의 순간에는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보다 위험하다. 일본이 우리를 업신여기며 경제도발을 하는 배경에는 우리 내에서 일본편을 들 우군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우군, 즉 친일적폐세력의 중심에는 자유한국당이 있고 그 주위에 조선일보, 중앙일보 같은 적폐언론 등이 있다. 지금 친일적폐세력은 일본과 공동작전을 진행 중이라고 봐야 한다.

자한당은 미국, 일본의 지지를 받고 지원을 얻어야 자신들이 집권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한일 경제전쟁에서 일본편을 든다. 아무리 정부와 대립하는 야당이라도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거국적으로 힘을 모으는 일반적인 현상이 자한당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자한당은 대한민국의 야당이라기보다는 일본 자민당의 한국지부에 가깝기 때문이다.

자한당은 문재인 정부를 공격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자한당의 태도를 보면 정부 공격보다 일본 비호에 더 집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지난 7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의 회동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소재·부품산업 지원책을 제안했다.

소재·부품산업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면 국력도 키울 수 있고 일본의 경제도발에 면역력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황교안 자한당 대표는 소재·부품산업 지원책을 반대했다. 설사 자신이 여론의 지탄을 받더라도 일본에 불리한 내용은 합의할 수 없다는 것일까?

국내에서 자유한국당 같은 친일적폐세력이 사라지면 일본이 함부로 우리를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자유한국당 해체 투쟁은 대일 경제전쟁의 승패가 달린 굉장히 중요한 투쟁이다.

 

4. 결론

일본의 경제공격은 미국, 일본, 자한당의 합작품이다. 미국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완성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촉구하고, 일본은 군국주의화 부활을 위해 한일 갈등을 유도하고, 자한당은 국내에서 열심히 일본을 대변하고 있다.

한일 경제전쟁은 내년 총선으로 이어진다. 미국과 일본은 총선에서 자한당을 밀어줘 압승하게 만든 뒤 2022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일 군사결탁을 완결하고 한미일 삼각동맹을 완성, 그 힘으로 북미 대결에서 승리하고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여 동아시아를 완전히 자신들 손아귀에 넣겠다는 게 미국의 꿈이다.

아마도 일본은 경제도발을 통해 문재인 정부를 흔들고 경제를 악화시키면 정부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내년 총선에서 자한당에게 유리한 상황이 펼쳐지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이처럼 똘똘 뭉쳐 반일행동에 나설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은 저들의 예상과 달리 우리 주도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만족하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아직 미국의 구상은 변하지 않았고, 일본의 경제공격은 끝나지 않았으며, 자유한국당은 건재하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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