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분열은 시대요구에 대한 무책임
상태바
진보분열은 시대요구에 대한 무책임
  • 우리사회연구소
  • 승인 2017.04.05 04: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600만의 촛불로 박근혜를 끌어내린 촛불항쟁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끌어내린 4.19 혁명과 자주 비교된다. 1960년과 2017년은 57년의 간격이 있지만 당대의 시대상이 지금과 흡사하기 때문에 그러하리라 짐작된다.

4.19 혁명 정국에서 국민들은 성난 파도처럼 들고 일어나 이승만을 끌어내렸다. 그러나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도망갔지만 한국사회의 봄은 찾아오지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4.19혁명의 성과가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하야시킨 혁명정국이 불과 11개월 남짓한 사이에 군부독재 군화발에 짓밟힌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박정희의 5.16 쿠데타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민들의 혁명기세가 등등했다면, 일개 군부무리들의 반역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5.16 쿠데타는 이승만 하야 이후에도 4.19 혁명의 열기를 지속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허용해버린 측면이 크다.

한 마디로 이승만 하야 이후 민주개혁이 유야무야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민주개혁이 흐지부지된 원인으로 장면내각의 우유부단함을 꼽는다. 하지만 당시 혁신세력을 살펴보자. 혁신계열은 4.19 혁명 정국에 앞장서 싸웠고 이승만 하야의 주역으로 등장하였지만 4.19 이후 내부적으로 끝없이 분열하면서 국민들이 어렵사리 만들어 낸 민주개혁의 동력을 소실해버리고 말았다.

◈ 주도권 싸움에 분열한 혁신계

1983년 4월 18일, 이대학보에는 4.19 혁명정국의 혁신정당이 소개되었다. 그 책자의 분석에 따르면 4.19 이후에 혁신세력은 크게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동지협의회’ 로 분열하여 난상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애당초 혁신계열을 대표했던 정당은 죽산 조봉암의 ‘진보당’ 이었다. 그러나 1956년에 진보당이 강제 해산 당하자 혁신계열은 여러 정당으로 나눠지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정당은 ‘사회대중당’ 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진보당에 몸담았던 김달호, 윤길중, 박기출이 주도하여 당시 민혁당의 서상일계와 제휴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대중당’ 은 진보당계와 민혁당계로 나뉘어져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한편 ‘한국사회당’ 에는 민주사회당계와 김성숙 등 재야혁신세력이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도 인물 중심의 파벌싸움으로 세력을 결집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나머지 혁신세력들이 총선을 앞두고 ‘혁신동지협의회’ 를 묶었다고 한다. 혁신동지협의회는 애당초 유림계의 김창숙, 구근민당계의 장건상, 구독로당계의 유림, 한독당계의 조경한, 민주당계의 정화암, 교수단의 권오돈 등 재야혁신세력을 총망라한 혁신동지총연맹(가칭)을 결성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각 정파 간의 이념 불일치와 주도권 싸움으로 범위가 상당부분 축소되고 말았다고 한다.

4.19 혁명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혁신계열이 이처럼 분열한 상태에서는 총선에서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혁신계열은 1960년 7.29총선거에서 333석의 민의원중 6석에 그쳐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 실패하였다.

당시 혁신계열은 4.19 혁명 승리의 좋은 기세를 민주개혁으로 그대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정국의 중대한 시기를 주도권 싸움으로 허송세월해버렸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혁신계열은 7.29 총선거 참패 이후에도 문제점을 고치지 못하였다. 혁신계열은 이제 총선패배의 책임을 두고 대립하였다. 사회대중당에서 진보당계의 김달호, 윤길중이 비진보당계의 서상일계와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자 최근우, 김창섭, 송남헌, 이동화, 유병묵, 정화 등은 1960년 9월 15일 사회대중당과 결별을 선언하고 한국사회당, 혁신총연맹, 한독당, 노동당 등과 제휴하였다고 한다. 한편 노동인민당 출신의 최우근, 유병묵, 유한종 등은 따로 떨어져 나와 11월 27일, 사회당 결성을 선언하였다. 이러자 진보당계의 윤길중도 김달호와 결별하여 장건상과 함께 혁신당을 창당하였다.

4.19 혁명의 열기가 5.16 군사쿠데타로 짓밟히게 된 것은 이처럼 혁신계열이 민주개혁을 추진하는데 힘을 합칠 대신 주도권 싸움에 사분오열되어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였기 때문이었다.

◈ 사그라진 민주개혁

4.19 혁명의 선봉장을 자처하던 혁신계가 사분오열되었으니 국민들이 고대하던 민주개혁이 제대로 추진될 리 만무하였다. 이승만 하야 이후 정권을 물려받았던 허정 과도정부는 물론이고 이후 내각제 개헌으로 등장한 장면정권도 국민들이 4·19 혁명에서 요구했던 반혁명 인사 처벌, 부정부패자 처리, 민족반역자 재산 몰수 등에 소극적이었다. 4.19 혁명의 직접 원인이었던 3.15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도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급기야 1960년 10월 11일, 4.19 혁명 참가자 가운데 부상자 50여 명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민주반역자 처벌 특별법을 제정해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심각한 경제난도 문제였다. 4.19 혁명의 구호가 “못살겠다, 갈아보자” 였으니만큼 민생문제 해결은 국민들의 당면요구였다. 그러나 혁신계는 세력간 주도권 다툼에 시간을 끌다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생문제를 풀어낼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 진보 단결의 필요성

이제 2017년으로 돌아오자. 1600만 촛불의 열기로 박근혜를 탄핵하였다. 국민들은 이제 부역자 처벌과 적폐청산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정국은 4.19 혁명 당시와 너무나 흡사하다.

그러나 1960년에 불거졌던 혁신계 분열은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한 듯하다. 진보진영은 민중연합당, 정의당, 녹색당, 노동당 등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들은 모두 촛불항쟁의 국면에서 헌신적으로 투쟁하였지만 정작 대선국면에서 진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는 모두 진보가 적폐청산이라는 고리를 중심에 놓고 단결하지 못하고 자파세력의 논리를 앞세우며 주도권 싸움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로 나아가고 있는데 진보진영은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한 채 사실상 현 대선국면의 훈수꾼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지난 4.19 국면에서 혁신계가 단결하지 못하여 민주개혁이 좌초되었듯이, 지금 촛불국면에서도 진보진영이 단결하지 못하면 부역자 처벌과 적폐청산의 요구는 좌초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난 4.19 국면에서 혁신계가 분열해 있다 보니 박정희의 군부쿠데타에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속수무책으로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지금 촛불국면에서도 진보진영이 이대로 분열해 있다가는 한미군당국의 위협적인 대북정책 끝에 휴전선에 비상상황이 발생할 경우 속수무책으로 대권을 빼앗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진보는 정의롭고 신선한 내용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국민의 힘을 하나로 묶어세울 수 있고 사회를 진보적으로 전진시킬 수 있다. <끝>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