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지금] 칸트 무덤은 러시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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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지금] 칸트 무덤은 러시아에 있다
  • 이인선 자주시보 객원기자
  • 승인 2023.01.2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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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는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폴란드, 서쪽으로는 발트해와 접해있는 곳에 러시아 영토가 있다. 이름하여 칼리닌그라드주(州)로 러시아 본토와 떨어져 있어 ‘섬처럼 고립된 러시아 영토’라고 불리기도 한다.

칼리닌그라드주의 면적은 1만 5천 제곱킬로미터로 강원도 남한지역 면적(1만 6,800제곱킬로미터)보다 약간 좁은 정도다. 주의 중심지는 칼리닌그라드이고, 인구는 1,027만여 명으로 러시아인(86.43%), 우크라이나인(3.67%), 벨라루스인(3.64%), 리투아니아인(1.09%) 등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다.

칼리닌그라드주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있다. 특히 중심지인 칼리닌그라드는 우리가 익히 들어봤을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와도 깊은 연을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 세계에 매장된 호박(보석)의 약 90%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칼리닌그라드주는 러시아에 적대적인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둘러싸여 있어 종종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지난해 이른바 ‘우크라이나 전쟁’을 명목으로 대러 제재가 가해지면서 러시아 본토와의 교역로가 막혀 물자 수급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런 칼리닌그라드주와 칼리닌그라드에 얽혀진 이야기를 풀어본다.

쾨니히스베르크

‘쾨니히스베르크’라는 지명을 들어본 적이 있을까?

이 지명을 들어본 적은 없어도 학창 시절 들어봤던 ‘다리 7개를 한 번에 건너는 문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살았던 곳’을 이야기하면 모두가 “아 그 지역!”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칸트의 고향이자 사망지인 쾨니히스베르크는 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의 중심지 칼리닌그라드가 되었다.

이 땅은 본래 발트해 주변에 살던 프로이센인의 영역이었다. 13세기 초 교황이 북유럽 십자군을 선포한 이래 폴란드의 가톨릭 세력이 이곳으로 진출하려다 실패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다 폴란드 마조프셰 지역의 공작이었던 콘라드 1세가 1226년 튜턴 기사단에 도움을 청하면서 쾨니히스베르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해를 거듭하며 튜턴 기사단은 프로이센인의 땅으로 진격했고 1255년 이 지역에 요새를 건설했다. 

튜턴 기사단이 정복한 땅은 십자군 원정 개시 이전에 기사단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맺은 조약을 명분으로 튜턴 기사단의 영지가 되었다. 이들은 이렇게 정복한 영토에 독일 기사단국(또는 ‘튜턴 기사단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쾨니히스베르크는 ‘왕의 산’이라는 뜻으로 튜턴 기사단에 성 건설 자금을 지원해 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오타카르 2세를 기리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초기 쾨니히스베르크는 북방 십자군의 기지 역할을 했던 쾨니히스베르크 성을 기반으로 발달한 도시였다.

그러다 1454년 폴란드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수도였던 마리엔부르크를 폴란드에 내주고 쾨니히스베르크를 기사단국의 새 수도로 선정했다. 이후 1525년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이 기사단국을 프로이센 공국(훗날 독일의 일부)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쾨니히스베르크에 수도를 두었다.

시간이 지나 수도가 베를린으로 바뀌었음에도 쾨니히스베르크는 프로이센 국왕들이 대관식을 진행하고 1945년까지 국가기록보관소를 둘 정도로 독일 주요 도시인 베를린, 포츠담과 더불어 위상이 높았다.

▲ 과거 쾨니히스베르크 다리가 있던 곳. 현재 가운데 섬은 칸트의 묘와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등이 있어 이른바 '칸트 섬'이라 불린다.

이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칸트(1724~1804)가 생애를 보냈다. 그리고 칸트가 매일 아침 산책하며 건넌 일곱 개의 다리를 토대로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가 만들어졌다.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는 어떤 경로를 선택해도 7개의 다리를 한 번씩만 지나면서 건널 수 없는 데서 나온 문제였다. 당시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은 나이 든 칸트가 다리를 여러 번 건너며 돌아오는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칸트가 집에서 한 번씩만 다리를 지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경로를 찾아내고자 수학자 오일러(1707~1783)에게 해결을 의뢰했다.

그 후 오일러가 이 문제의 해답이 수학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면서 이 문제는 훗날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 1741년 오일러의 논문에 그려진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 그림.

쾨니히스베르크는 19세기 프로이센과 러시아 간의 철도망이 개통되면서 곡물·씨앗·아마 등 러시아의 작물을 수출하는 기지로 번성했다. 그리고 해군·육군의 1급 요새로 성장했다.

1945년 나치 독일 패망 후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프로이센 동쪽 일대가 소련에 귀속되었다. 소련에 귀속된 이후에도 잠시 쿄니그스베르크라는 이름으로 쾨니히스베르크의 러시아어 발음을 유지하다 1946년 미하일 칼리닌 소련 최고평의회 상임간부회 의장이 사망한 후 그의 이름을 따 칼리닌그라드(칼리닌의 도시)로 이름을 바꿨다.

▲ 쾨니히스토르.
▲ 보헤미아 왕국 국장(왼쪽), 프로이센 왕국 국장(가운데),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국장(오른쪽).  

1960년대 이후 독일의 군국주의 잔재를 없앤다는 명목 아래 쾨니히스베르크 시절의 유적들이 많이 없어졌지만 몇몇 대표적인 곳들은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칸트 무덤과 칸트 동상을 비롯해 과거의 유산들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건물, 쾨니히스베르크역,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증권거래소, 쾨니히스토르(왕의 문), 칸트 동상 등이 있다. 특히 쾨니히스토르에는 프로이센 공국의 상징인 검은 독수리 문양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고립된 칼리닌그라드주

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엔 지금의 벨라루스와 발트 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러시아 본토에서 칼리닌그라드주까지 가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1991년 벨라루스와 발트 3국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칼리닌그라드주는 북·동유럽 국가들에 둘러싸인 채 고립된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러시아는 이를 고려해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벨라루스와 서로의 국가를 비자 없이 지나갈 수 있도록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만 준수하면 러시아 본토에서 칼리닌그라드주로 육로를 통해 이동하는데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폴란드와 라트비아가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유럽연합 대다수 회원국이 맺은 솅겐조약이다. 조약은 회원국 국민에게는 역내에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지만 유럽연합에 소속되지 않은 국가 국민에 대해선 비자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국민과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은 그 중간지대를 경유할 때 비자를 받아야만 한다. 이에 러시아는 어려움을 감수하고 벨라루스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을 통과하는 육로(이른바 ‘수바우키 회랑 지대’)를 확보해 물자 수송을 해왔다.

수바우키 회랑 지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 인근에 있는 폴란드 마을 ‘수바우키’에서 이름을 딴 국경 지대다.

© 이인선 객원기자

그럼에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에 적대적으로 나오고 있어 어려움은 여전하다. 지난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을 개시한 후 서방의 대러 제재로 인해 종종 물자 수송이 막히기도 했다.

하나의 예로 지난해 6월 17일 리투아니아 철도 당국이 유럽연합의 대러 제재를 명목으로 수바우키 회랑 지대를 막겠다고 칼리닌그라드주 철도 당국에 통보한 일이 있었다.

당시 운송 중단 품목은 건설 자재, 콘크리트, 금속 등으로 리투아니아를 경유하는 전체 화물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것들이었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의 결정에 대해 물자와 사람의 이동을 보장하기 위해 2004년 러시아와 유럽연합이 맺은 협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또 러시아에서 생산된 물자를 러시아 영토로 보내는 것이라서 유럽연합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연방 안전보장회의 서기는 “적대적 행위에 당연히 대응하겠다”라며 “리투아니아 국민에 매우 심각하고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연합도 되도록 러시아와 충돌을 피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주제프 보렐 유럽연합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6월 21일 리투아니아를 옹호하면서도 “규정을 완전히 준수하고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 법적인 측면을 재확인할 것”이라고 여운을 남겼다. 그러면서 칼리닌그라드주가 완전히 봉쇄된 것도 아니고 제재 대상이 아닌 물자 수송은 계속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유럽연합은 7월 13일 회원국들을 상대로 대러 제재 품목의 철도 운송을 금지하지 않는 것으로 하겠다고 지침을 보냈다. 그러면서 리투아니아를 지나 칼리닌그라드주로 향하는 화물에 대한 제재는 도로에만 적용된다며 러시아가 리투아니아 철로를 이용해 칼리닌그라드주에 시멘트, 목재, 술 등을 실은 화물을 운송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유럽연합의 제재 완화는 리투아니아의 운송 제한 조치가 유럽 지역의 안보 불안을 오히려 높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러시아가 “실질적인 보복 조처에 나설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자 일각에선 우크라이나에 이어 이 지역이 제2의 화약고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특히 독일 정부는 리투아니아에는 독일군이 주둔하고 있어 발트해 지역에서 분쟁이 생기면 독일도 연루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럽연합의 지침에 따라 리투아니아는 더 이상 철로 화물 운송을 막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만타스 두바우스카스 리투아니아 국영철도 화물 운송회사 대변인은 2022년 7월 23일 “오늘 일부 화물이 운송될 수 있다”라며 운송 재개를 알렸다.

 

전략적 요충지 칼리닌그라드

칼리닌그라드는 발트해에서 유일하게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이다. 그래서 소련 시절부터 발트 함대의 근거지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러시아는 칼리닌그라드를 러시아와 동유럽을 잇는 산업·어업·상업의 중심지로 만들면서도 해군기지를 둬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를 견제하는 전략적 위치로 만들었다.

지난해 5월 러시아가 칼리닌그라드에서 가상의 적을 핵탄두 미사일로 공격하는 모의 훈련을 진행해 주목받기도 했다.

사실 소련 해체 이후에도 러시아가 이곳에 군사력을 강화한 이유는 나토가 지난 20여 년간 칼리닌그라드주 일대에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스웨덴, 핀란드, 우크라이나로까지 영향력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 2016년 나토 군사위원회가 공개한 나토 회원국별 병력 배치 계획도.

나토 군사위원회는 2016년 6월 8일과 9일 양일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폴란드와 발트 3국에 4개 대대 병력 4천 명을 주둔하기로 했다. 러시아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에 있는 수바우키 회랑 지대를 점령하면 나토 가입국인 발트 3국과 폴란드가 서로 차단되어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폴란드에선 미군이 부대 지휘권을 행사하고, 영국군은 에스토니아, 독일군은 리투아니아, 캐나다는 라트비아에서 각각 부대 지휘를 맡기로 했다. 또한 해당 국가들이 공격받거나 위험 상황에 빠지면 나토의 신속 대응군 5천여 명을 즉각 투입하기로 약속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당시 “이번 파병 결정은 냉전 종식 이후 나토 차원에서 실행되는 최대 규모의 군 병력 지원”이라며 “나토는 동맹국 중 어느 한 나라가 공격받으면 전체가 이에 대응할 것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러시아군 서부군관구는 2016년 10월 8일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단거리 탄도미사일인 ‘9K720 이스칸데르-M’ 미사일을 칼리닌그라드에 실전 배치했다. 서부군관구는 칼리닌그라드를 포함해 유럽과 접하고 있는 러시아 서쪽 영토 대부분을 관할하고 있다. 

앞서 미국 정부가 유럽 미사일 방어 체계 구축 계획을 추진하며 폴란드 등에 요격미사일을 배치했을 때 러시아는 칼리닌그라드에 이스칸데르-M을 배치해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서방은 경고를 무시하고 칼리닌그라드 일대에서 군사력을 늘렸고 러시아와의 대결·적대 분위기를 더 조장했다. 러시아도 군사적 대응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상황과 함께 이 지역에서 러시아와 나토 국가 간의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아르비다스 아누사우스카스 리투아니아 국방장관은 2022년 4월 11일 자국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이 현재 이 지역에 주둔 중인 나토군을 대대(300~1,000명 규모)에서 여단(2,000~5,000명 규모) 단위로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또한 나토는 스웨덴, 핀란드도 끌어들이며 발트 3국 등 유럽의 안보 위기 상황에 대비한다며 현재 4만 명인 신속 대응군을 30만 명 수준으로 대폭 증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 러시아 이스칸데르 탄도미사일.

러시아 국방부는 2022년 5월 4일 이에 대응해 칼리닌그라드에서 핵탄두를 탑재한 이동식 이스칸데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모의 훈련을 진행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리투아니아와 물자 운송 관련 충돌 이후 러시아는 각종 전략무기 배치 등 군사력 증강에 나서면서 서방의 압박에 맞서고 있다. 2022년 8월 18일에는 극초음속 미사일 ‘킨잘’을 탑재한 미그-31 전투기 3대를 추가로 칼리닌그라드에 배치하며 “해당 전투기는 전략적 억제를 위한 추가 조치의 하나로 배치됐으며, 앞으로 24시간 비상근무 체제로 운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을 토대로 보건대 우크라이나 상황과 서방의 대러 적대 정책이 해소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칼리닌그라드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서방 간 충돌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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