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하에] 조선 침략을 시작하는 일본 4. 반격의 시작, 임오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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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하에] 조선 침략을 시작하는 일본 4. 반격의 시작, 임오군란
  • 구산하
  • 승인 2022.11.12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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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쌀과 모래

1882년 임오년 6월 5일. 군인들이 들뜬 마음을 안고 선혜청 앞으로 몰려들었다. 1년이나 넘게 밀린 급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급료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1년이나 밀려 있었다니, 나라 꼴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군인들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참았다.

조선 땅의 평범한 민중이었던 그들에게 나라를 지키는 일은 밀린 급여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소중한 마음으로 인내해왔던 고통의 시간. 그것이 끝나는 날이라 생각하니, 오랜만에 가족들과 지어 먹을 따뜻한 밥 생각을 하니 얼마나 설렜을까.

그러나 꿈에 그리던 급료를 받아 안은 군인들은 환호는커녕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1년이 넘게 단 한 차례도 급료를 받지 못하다가 겨우 한 달 치 급료를 받았는데, 그 양이 반이나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급된 나머지 반에는 쌀이 아닌 쌀겨와 모래로 가득했다. 어떤 포대에는 물에 퉁퉁 불어 썩어빠진 쌀이 가득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분노의 원성이 터져 나왔다. 

이따위를 먹으라고 던져준 것인가! 군인들은 급료 수령을 거부하며 이를 나눠준 선혜청 창고지기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자 창고지기는 싫으면 말라며 적반하장의 태도로 나왔다. 더는 참을 수 없던 군인들이 창고지기에 달려들었고 현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시 궁중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선혜청 당상(해당 청을 관리하는 담당자 격의 고위직) 민겸호는 오히려 군인 중에 주동자를 색출해 잡아 가두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그러더니 이들을 사형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민겸호는 나라를 좀먹는 부패한 민비 일당의 핵심 인물로, 앞뒤로 온갖 뇌물을 받아 챙기고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 자기 배를 채우는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평상시 민겸호가 행차하면 사람들 입에서 “죽일 놈”이라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 ‘죽일 놈’이 멀쩡한 사람들을 죽인다니, 소문을 들은 군인들과 백성들은 분개하기 시작했다. 잡힌 군인들의 가족이 나서서 통문을 돌려 군인들의 집결을 호소했다.

 

반격의 시작

그리고 6월 9일, 많은 수의 사람이 모였다. 칼을 뽑아 든 군인들은 “굶어 죽으나 잡혀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차라리 죽일 놈을 잡아 죽여 분이나 풀고 죽자”라고 외치며 땅을 쳤다. 그렇게 분노한 군인과 민중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몰려든 수천 명의 사람은 가장 먼저 민겸호의 집으로 달려갔다. 민겸호의 집에는 인삼이며 녹용, 진주 등 온갖 진기한 보물들이 가득했다.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의 삶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분노한 사람들은 민겸호의 더러운 재물들을 마당에 모아 불태웠다. 놀라운 것은 그 누구도 재물을 탐하거나 손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인들은 “한 푼이라도 손을 대는 자는 죽인다”라며 이를 철저히 단속했다. 항쟁의 상을 흐리게 하지 않으려 했던 민중들의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당시 저항에 나섰던 민중의 대다수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피폐하게 살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판단이 얼마나 수준 높은 정치의식과 도덕의식의 발현인지 숙연해진다. 우리 근현대사에는 외세와 부정한 정치세력에 맞선 숱한 민중항쟁이 있었지만, 그 어떤 항쟁에서도 무분별한 약탈이나 무고한 이들을 상대로 한 범죄는 없었다. 참으로 위대한 민중, 위대한 역사이다.

분노의 불길이 민겸호의 집에서 치솟아 오르는 그때, 더러운 탐관오리는 살길을 찾아 헐레벌떡 담을 넘었다. 사형 운운하던 민겸호에게 본때를 보여준 후 군인들과 백성들은 무기고로 향해 무장을 갖췄다. 그 수가 무려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억울하게 갇힌 동료들을 빼내고 다음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임오군란 시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 임오군란 시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진짜 적, 일본

그들이 찾아간 곳은 바로 일본 공사관이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군인들조차도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비참한 현실의 근본 원인이 다름 아닌 일본의 경제침략에 있었기 때문이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의 쌀과 콩 등 곡식을 무분별하게 약탈한 일본. 값싼 공산품을 들이밀어 조선의 수공업을 몰락시킨 일본. 조선 민중은 자기 삶을 침탈한 진짜 적을 꿰뚫고 있었다.

이처럼 개항의 탈을 쓴 침략으로 일본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데 1881년 조선 정부가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창설해, 일본인 호리모토 레이조 중위를 교관으로 앉히고 일본식 군대훈련을 시작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일본의 큰 그림이었다. 조선 정부의 신식 군대 창설 계획을 탐지한 일본은 소총을 기증하는가 하면, 민겸호 등에 자신들이 교관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섰다. 일본은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를 통해서 일본 육군병 학교 출신의 호리모토를 별기군 교관으로 추천하는 편지를 전달했다. 민겸호는 이를 수용해 고종에게 제안했다. 그렇게 일본은 조선의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자신의 손안에 넣었다. 민중들이 일본의 침략 의도를 바로 보고 시퍼렇게 날이 선 반면, 민겸호를 비롯한 당시 지배층은 얼마나 무감각했는지 한탄스러울 지경이다.

일본인이 우리의 군을 지휘하는 모습은 조선 민중의 강한 반감을 자극했다. 군사 훈련의 책임관뿐 아니라 일본 공사관의 순사들도 훈련을 보조한다는 이유로 수시로 드나들었다. 어떻게 하면 조선을 짓밟고 약탈할지 궁리하는 침략자에게 군을 내주다니,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이를 곱게 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별기군을 가리켜 일본을 낮잡아 부르는 왜라는 표현을 써 ‘왜별기(倭別技)’라고 불렀으며, 별기군 훈련장을 ‘왜놈의 소굴’이라고 수군댔다.

일본의 침략 의도가 반영된 별기군의 창설에 반발한 이들은 별기군 훈련소를 습격하는 거사를 계획하기도 했다. 거사는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시 민중들이 이 사안을 얼마나 심각하게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이 별기군과 기존 군인의 대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기존 군인들은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데, ‘왜놈’이 지휘하는 군대는 신식 장총에 초록색 신식 군복까지 입고 급료도 꼬박꼬박 받으니 군인들은 분노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봉기한 군인들과 민중들이 일본 공사관을 향해 몰려가자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는 부리나케 도망가던 중에 돌에 맞아 죽었다. 그의 시신 위에 분노한 민중들이 던진 돌이 가득해 마치 무덤과도 같았다고 한다. 호리모토 외에도 성안에 있던 7명의 일본인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왜놈을 몰아내자!” 

민중들은 손에 돌이나 몽둥이를 들고 일본 공사관을 에워쌌다. 일본 공사관이 함락되는 것은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민중들에게 무분별하게 총질하고 칼을 휘두르며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하나부사의 만행을 듣고 분개한 민중들은 더 많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민비를 찾아라

일본 공사를 쫓아낸 민중들은 위풍당당하게 봉기 둘째 날을 맞았다. 이들은 그동안 자신을 수탈했던 부패한 권력자 중 한 명인 영돈녕부사 이최응을 처단하고 창덕궁으로 향했다. 부패한 권력의 심장을 향해 파죽지세로 돌진한 것이다. 궐에 숨어있던 민겸호는 민중에 붙들려 처참한 말로를 맞았다. 지난날 선혜청 당상을 지내며 군인의 원성을 샀던 김보현 역시 처단당했다. 민중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탐욕스러운 지배층의 끝은 오늘날의 역사에서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다음 목표는 민비였다. 당시 봉기에 참여했던 민중들은 민비가 나라를 망치는 원흉이라 보았다. 민비 본인과 그 척족세력의 부정부패가 이미 나라를 거덜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민 씨의 민 자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그런 민 씨 일당이 급기야 외세까지 끌어들여 망국의 길을 걸으려 하니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민비는 자신을 찾아 궁을 샅샅이 뒤지는 민중을 피해 가까스로 탈출했다. 민비는 이후 거처를 여러 차례 옮기며 충주까지 피신한다.

흥미로운 것은 봉기한 이들이 흥선대원군을 찾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이 사건을 기획했다고 보기도 한다. 과연 봉기한 군인과 민중이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요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편에서 임오군란의 역사적 의의와 이후 일본의 대응과 함께 자세히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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