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애국자인가 내란 수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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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애국자인가 내란 수괴인가?
  • 김용택
  • 승인 2022.10.26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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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세종본부장
김용택 세종본부장

오늘은 10·26사건이 발발한지 43주년이다. 10·26사건이란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5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부하 경호원이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등 총 6명을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제7차 개헌(유신헌법) 그리고 부마항쟁, 10·26사건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사가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가수 심수봉과 현직 모델 신재순)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곧 국군 서울 지구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군사반란은 헌법을 무너드린 죄로 사형(死刑)· 무기징역(無期懲役)·무기금고형(無期禁錮刑)에 처하게 되는 중죄에 해당하는 반란죄(叛亂罪)를 지은 사람이다.

 

<5·16은 혁명인가? 군사반란인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로 시작한 혁명공약은 유엔헌장준수, 부패와 구악일소, 민생고 해결, 국토통일을 위한 실력배양...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일당은 이런 혁명공약을 내걸고 등장한 5·16군사반란은 4·19혁명으로 세운 대한민국 제2공화국은 출범 9개월 만에 무너뜨리고 정권을 탈취한다.

박정희는 이어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까지 암기하도록 했다.

 

<박정희 묘비에 적힌 용비어천가>

"1945년 건군과 함께 입대, 1961년 5·16혁명을 주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시고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 1963년 제5대로부터 1978년 제9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을 역임하시는 동안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오천 년 이래의 가난을 물리치시고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닦으시어 세계 속의 풍요한 한국을 부각시키셨으며 겨레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시는 등 민족중흥을 이룩하신 영도자로서 민족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시고…삼천 칠백 만 온 국민의 애도 속에 11월 3일 국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시다.“(박정희의 묘비에 적힌 글)

 

<박정희 그는 누구인가?>

1961년 5월 16일에 육군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모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일부 군인들이 제2공화국의 장면 정부를 총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박정희 그룹은 1963년 대선을 치르고 민간정부로 전환되기 전까지 군사정부의 형태로 한국사회를 통치했다. 이처럼 1960년 시민들이 4·19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지 1년 남짓 뒤에 발발한 군사 쿠데타는 한국사회에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과정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다.

군사반란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1979년 10월 26일까지 18년동안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지낸다.

역사는 박정희를어떻게 평가하는가? 박정희하면 5·16군사반란, 국가보안법, 유신헌법, 한일 국교정상화, 7·4남북공동성명, 노동운동 및 야당 탄압...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새마을 운동을 통해서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 사회 혁명을 이뤄내신 분으로 “나라 살린 박정희를 배우겠다”(대한민국 제 20대 대통령 윤석열은 박정희를 이렇게 평가했다)

 

<박정희는 헌법 위에 군림한 군주...?>

1917년 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의 금오산 자락에서 몰락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말기에 효력부위(效力副尉)와 사과를 지낸 아버지 고령 박씨 박성빈과 어머니 수원백씨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였다. 대구사범학교 출신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근무한다,

그 후 만주군관학교 졸업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여 1등으로 졸업, 1942년 3월 만주 괴뢰국 황제 푸의(輝儀)에게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선서를 한다.

 

<빨갱이 원조는 박정희였다>

‘다카키 마사오’, ‘오카모도 미노루’ 박정희... 1945년 항일 독립군을 토벌하는 간도 특설부대에 근무하다 해방 이후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귀국한다. 박정희는 국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셋째형 독립운동가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에 연루되어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형의 친구이자 사회주의자인 이재복의 권유로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한다.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박정희는 사형 집행 10일을 앞두고 당시 정보국장으로 있던 백선엽이 하우스만 미 육군대위와 로버츠 미 육군 준장에게 박정희 구명을 요청했고 살려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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