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지금] 체첸 전쟁과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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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지금] 체첸 전쟁과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
  • 이인선 자주시보 객원기자
  • 승인 2022.10.2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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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새벽(현지시각) 러시아와 크림반도를 잇는 크림 대교(케르치 해협 대교)가 폭발해 끊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고문은 이날 트위터에 “크림, 대교, 시작이다. 불법적인 모든 것은 파괴되어야 하고 훔쳐진 모든 것은 우크라이나에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에 점령당한 모든 것은 해방되어야 한다”라고 올리며 크림대교 폭발을 기뻐했다.

이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러시아 수사당국은 크림대교 폭발 사건을 우크라이나 특수기관의 소행이라고 지목하고 이를 ‘테러 행위’로 규정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보회의 부의장은 돈바스 지역 매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범죄에 대한 러시아의 유일한 대응은 테러리스트들을 직접 패망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러시아의 이러한 대응은 소련 해체 이후 진행된 두 차례의 체첸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두 차례에 걸쳐 체첸 전쟁을 살펴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에 어떠한 생각으로 임하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이인선 객원기자
©이인선 자주시보 객원기자

1차 체첸 전쟁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1985년 취임 때부터 1991년 소련 해체 때까지 개혁·개방 정책(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을 추진하며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고 국가의 개입을 줄이고자 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이러한 정책에 자극받은 소련 내 공화국들은 분리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9년 발트 3국(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 조지아(그루지야), 우크라이나가 분리독립을 요구한 데 이어 러시아도 1990년 6월 12일 분리독립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흐름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속의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하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에서도 분리독립 움직임이 늘어갔다.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 내 분리독립 세력 중 하나가 1990년 생겨난 ‘체첸인 전민족대회’이다. 이들은 소련과 러시아에서 독립해 체첸인만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체첸인 전민족대회 집행위원회 의장이었던 조하르 두다예프 전 소련군 장성은 1991년 6월 8일 ‘노흐치최 체첸 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이어 두다예프 의장은 동년 7월 노흐치최 체첸 공화국이 소련과 러시아에 소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반면,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 지도부는 소련 해체에 반발해 쿠데타(일명 ‘8월 쿠데타’)로 생겨난 소련 국가비상사태위원회(1991년 8월 19~21일 존속)를 지지했고 러시아에 존속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하지만 8월 쿠데타가 실패하자 두다예프 의장은 1991년 9월 6일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에서 체첸인만 따로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추동된 두다예프 의장의 지지자들이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 최고위원회 건물과 방송국들을 습격해 유혈 점령하면서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을 사실상 해체했다.

이 습격으로 40명 이상의 의원이 구타당했고 비탈리야 쿠첸코 그로즈니시 시의회 의장은 창문 밖으로 내던져져 사망했다. 이에 대해 도쿠 자브가예프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 최고위원회 의장은 1996년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회의에서 “전쟁은 쿠첸코 그로즈니시 시의회 의장이 대낮에 사망했을 때 시작되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두다예프 의장과 분리주의자들의 통제하에 1991년 10월 27일 대통령 선거와 의원 선거를 실시했고 두다예프 의장이 노흐치최 체첸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11월 초 취임과 동시에 러시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보리스 옐친 초대 러시아 대통령은 이들의 분리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1991년 11월 7일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과 관련해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옐친 대통령이 2,500명의 병력을 투입하고 두다예프 대통령이 주민 총동원령을 내리면서 유혈 충돌이 발생했으나 이 법령이 러시아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서 3일 만에 일단락되었다.

공화국 내 두다예프 지지자들은 1992~1993년 600건 이상의 학살을 자행하고 철도와 마차 등을 약탈했다. 1993년에만 559대 이상의 열차가 이들의 공격을 받았고 1994년에는 1,156개 이상의 마차와 527개 이상의 컨테이너가 약탈당했다.

또한 1993년 6월 4일 공화국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체첸 북부 지역에서 러시아 연방에 잔류하길 원하는 반두다예프 무장투쟁 조직이 태동했다. 

노흐치최 체첸 공화국 지도부는 1994년 1월 14일 헌법을 개정하며 국명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으로 바꿨다. 하지만 러시아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테러와 내전으로 점철된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을 공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1994년 여름부터는 두다예프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군대와 러시아의 지지를 얻은 반두다예프 무장투쟁 조직인 ‘체첸 공화국 임시평의회’가 충돌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94년 10월과 11월 우마르 아브투르하노프가 이끄는 임시평의회 부대들은 수도 그로즈니시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가 패퇴했다. 

두다예프 대통령은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옐친 정부가 임시평의회 부대들을 배후 조종했다며 70여 명의 러시아인 포로를 인질로 잡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힘을 합쳐 러시아의 침략을 물리치겠다며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을 이슬람 국가로 전환하겠다고 선포했다.

이에 옐친 정부는 체첸 지역을 안정화하겠다며 정규군을 투입했으나 그로즈니시를 공습한 러시아 공군기들이 그로즈니시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며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옐친 정부는 1994년 11월 28일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내전 당사자들에게 48시간 내 휴전과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두다예프 대통령이 끝까지 항전하겠다고 밝히면서 옐친 대통령이 1994년 12월 1일 6시를 기해 러시아군을 대거 체첸 국경에 배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지만 파벨 그라초프 러시아 국방부 장관과 두다예프 대통령이 휴전에 합의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1주일도 채 안 되어 옐친 대통령은 국내외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12월 9일 체첸에 대한 총공세를 명령함에 따라 러시아 정예군 3만 명이 그로즈니시를 향해 진격했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러시아의 대규모 기갑부대 병력이 12월 11일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영토로 진입하면서 양 군대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1차 체첸 전쟁’의 시작이었다.

1차 체첸 전쟁에서 그로즈니시가 폐허가 된 것은 물론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들, 두다예프 대통령이 사망했고 전 세계 이슬람 무장 조직이 합류한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측의 테러가 이어지면서 러시아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결국 옐친 대통령은 1996년 6월 러시아 대선 공약으로 이치케리야 체첸군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내걸며 체첸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러시아군을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알렉산드르 레베드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 서기는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이 수복한 그로즈니시를 여러 차례 방문했고 1996년 8월 체첸과 인접한 러시아 연방 소속 다게스탄 공화국 하사뷰르트에서 평화협상을 이뤄냈다.

이후 1997년 5월 12일 옐친 대통령과 아슬란 마스하도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대통령이 크렘린궁에서 만나 러시아군의 철수와 2001년 12월 31일까지 5년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의 독립 문제 논의를 유보하기로 하는 내용이 담긴 ‘평화와 상호 관계에 관한 조약(이른바 하사뷰르트 협정)’에 서명했다.

 

2차 체첸 전쟁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이 이끄는 이치케리야 체첸 정부는 1차 체첸 전쟁 때 들어와 영향력이 커진 무자헤딘 세력 앞에서 무력하기만 했고 공화국 내부는 온갖 군벌들이 판치는 상황이었다.

마스하도프 정부는 1997년 이슬람 샤리아법과 공개처형 제도를 도입했고 동년 11월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을 이슬람 국가로 전환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면서 체첸 전역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운 와하브 운동을 명분으로 테러·납치 등 범죄가 횡행하게 되었다.

1997년 5월엔 아르비 바라예프의 이슬람 특수 연대가 또 다른 군벌 지도자인 살만 라두예프를 인터뷰한 러시아 NTV 여기자 옐레나 마슈크를 납치했다. 아르비 바라예프는 젤림한 얀다르비예프 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대통령의 부하로 알 카에다 등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과 연계를 가졌던 인물이다. NTV 측은 바라예프 집단이 요구하는 200만 달러를 내줬고 납치된 엘레나 마슈크는 101일 만에 풀려났다.

1997년 7월엔 영국 구호단체 심리상담가였던 존 제임스와 카밀라 카가 전쟁 피해로 인해 고통받는 체첸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체첸으로 왔다가 이슬람 특수 연대에 납치당했다. 이슬람 특수 연대는 이들에게 먹을 것도 제대로 안 주고 계속 구타했으며 카밀라 카가 존 제임스의 연인임에도 불구하고 카밀라 카를 강간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러시아 주재 영국 대사관의 도움 요청을 받은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이슬람 특수 연대에 돈을 준 덕분에 풀려났다.

1999년 8월 또 다른 군벌 지도자인 샤밀 바사예프 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제1부총리가 이끄는 테러 집단은 러시아 연방 소속 다게스탄 공화국의 마을 세 곳을 점령하고, 이곳을 발판으로 체첸과 다게스탄 지역을 통합해 이슬람 공화국을 만들고자 했다. 이들은 또한 1999년 9월엔 러시아 모스크바와 볼고돈스크의 아파트, 쇼핑몰에 테러를 감행했다.

옐친 대통령은 이 시기 연방보안국 국장이자 연방안보위원회 서기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을 신임 총리로 임명했다.

푸틴 총리는 1차 체첸 전쟁과 달리 계속되는 테러 행위에 강경하게 대응하면서도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했다.

푸틴 총리는 1999년 9월 15일 “아파트 테러리스트들이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땅으로 숨어들고 있다”라며 하루가 멀다고 증가하는 러시아 내의 테러로 지역 안전에 위협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러시아군을 투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푸틴 총리는 다게스탄 공화국에서의 대(對)테러 작전을 지시했고 9월 16일 이고르 세르게예프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다게스탄이 테러 집단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라는 보고를 받았다.

▲ 1999년 해방된 다게스탄 공화국을 찾은 푸틴 대통령
▲ 1999년 해방된 다게스탄 공화국을 찾은 푸틴 대통령

이후 옐친 대통령의 비밀 법령 서명으로 1999년 9월 23일 창설된 북캅카스 연합군이 체첸 그로즈니시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진행했고 9월 30일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영토에 진입했다.

이렇게 2차 체첸 전쟁이 시작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러시아군이 테러를 일으키는 이치케리야 체첸군을 진압하고 이들의 점령 지역을 해방하는 대테러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연합군은 1999년 10월 체첸 테레크강 북쪽 지역을 완전히 해방한 이후 11월에는 체첸 구데르메스를 해방했다. 푸틴 총리는 이로써 “이제 체첸에서의 대테러 작전은 효과적으로 종료되었다”라고 선언했다.

옐친 대통령이 1999년 12월 31일 사임한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푸틴 총리는 여전히 체첸 내 대치 중인 지역으로 향했고 장병들에게 “(우리의 목적은) 러시아의 명예와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러시아 연방의 붕괴를 막으려는 것”이라며 말하며 2차 체첸 전쟁의 목적을 재설정했다.

 

푸틴 총리는 어떠한 이유에서 목적을 재설정한 것일까?

당시 이치케리야 체첸군은 중동이나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미국의 지원으로 성장해온 무자헤딘, 알 카에다 등과 함께 러시아를 상대로 테러를 벌였다. 즉 기존 테러와의 전쟁에서 나아가 테러 집단을 지원하며 러시아를 공격하는 미국과의 전쟁이 된 것이다.

이치케리야 체첸군의 행각은 더욱 심해졌다. 이들은 민간인들을 방패로 사용했고 1999년 12월에는 화학무기를 두 차례 이상 사용했다. 이에 푸틴 권한대행은 2000년 1월 7일 잠시 공격을 중지하며 그로즈니시 시민들을 우선 피난시키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이치케리야 체첸군의 극단적 행위에 돌아선 민족주의 성향의 체첸군은 2차 체첸 전쟁에서 러시아를 도왔다. 러시아군은 이들의 도움으로 산악 지대를 이용해 작전을 벌였고 2000년 2월 그로즈니시를 해방했다. 그렇게 이치케리야 체첸군은 힘을 잃고 산으로 후퇴했다.

2000년 4월 전면적인 군사작전이 종료된 이후에도 체첸 영토와 주변 지역에서 무력 공격과 테러 공격이 계속되었고 러시아군과 러시아를 지원하는 체첸군은 이치케리야 체첸군에 맞서 싸웠다.

2000년 5월 7일 푸틴 권한대행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당시 러시아 국민 83%는 푸틴 대통령이 2차 체첸 전쟁에서 보인 강경한 태도를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이는 곧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 상승으로 나타났다.

 

계속된 테러

이치케리야 체첸 정부가 무너진 이후에도 이치케리야 체첸군은 러시아에 테러 공격을 계속했다. 

2002년 10월 23~26일에는 체첸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테러리스트 42명이 모스크바 오페라 극장에 난입해 공연을 관람하던 시민 850명을 인질로 억류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다.

이러한 이치케리야 체첸군과는 달리 체첸 사람들은 2003년 3월 23일 주민투표를 진행했고 95.97% 찬성률로 체첸 공화국 구성을 공식화하고 러시아 연방으로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러시아는 체첸 공화국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했고 체첸 공화국을 러시아 연방 소속으로 명시하는 새 헌법도 통과시켰다.

이후 체첸 공화국 임시정부 수반으로 활동하던 아흐마트하지 카디로프가 2003년 10월 5일 러시아 연방 소속 체첸 공화국 수반으로 공식 취임했다.

이치케리야 체첸군은 이에 반발해 2003년 5월 12일 체첸 즈나멘스코예 나드테리치니주 정부 청사 앞에서 차량 폭탄 테러를 벌였고 이 사건으로 59명이 죽고 300여 명이 다쳤다. 이들은 5월 14일 일리스한-유르트 마을의 이슬람 사원에서 열린 이슬람 명절 예배에 참석한 카디로프 수반을 살해하기 위해 자살 폭탄 테러를 벌여 30명을 죽이고 150명을 다치게 했다.

이치케리야 체첸군은 이후로도 테러 행위를 이어가다 2004년 5월 9일 그로즈니시 디나모 경기장에서 지뢰 폭탄을 터뜨려 카디로프 수반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이들까지 총 7명을 죽이고 50명 이상을 다치게 했다.

사고 당시 경기장에는 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 열병식과 음악회를 보러온 군중들로 가득 차 있었고 터지지 않은 폭탄이 하나 있었기에 자칫 사상자가 더 나올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 2004년 5월 9일 그로즈니시 디나모 경기장에서 지뢰 폭탄이 터져 카디로프 수반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이들까지 총 7명이 죽고 50명 이상이 다쳤다.
▲ 2004년 5월 9일 그로즈니시 디나모 경기장에서 지뢰 폭탄이 터져 카디로프 수반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이들까지 총 7명이 죽고 50명 이상이 다쳤다.

이치케리야 체첸군은 2004년 9월 러시아 남부 북오세티야-알라니야 공화국 베슬란의 한 학교를 점령하고 777명의 아동을 포함한 1,100명을 인질로 삼은 채 체첸의 분리독립 승인과 러시아군 철수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는 3일 동안 이어져 최소 331명의 사망자를 내었고 그 중 과반수가 어린이였다. 

푸틴 대통령은 이런 이치케리야 체첸군에 대한 완전한 소탕을 명령했고 2005년 3월 8일 베슬란 인질극 사건의 배후였던 아슬란 마스하도프 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대통령이, 2006년 7월 10일 샤밀 바사예프가 러시아군과의 전투 중 사망했다. 이후 이치케리야 체첸군은 여러 세력으로 흩어졌고 점차 힘을 잃어 갔다.

이치케리야 체첸군 잔존 세력은 다게스탄 공화국, 인구셰티야 공화국, 카라차이-체르케시야 공화국 출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함께 ‘카우카즈 이슬람 토후국(캅카스 에미리트)’이라는 국가를 만들었지만 제대로 된 세력이나 실질적이고 고정적인 영토를 가지지 못했다.

오늘날도 이들은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의 지원과 우크라이나

현재 이치케리야 체첸군 중 일부는 우크라이나 정부 편에서 싸우고 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정부를 도와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친러 성향의 주민들을 공격하는 데 일조해왔다.

그중 조하르 두다예프 대대를 이끄는 아담 오스마예프는 지난 2022년 2월 영상을 통해 자신의 전투원들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동참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체첸 공화국 군인들을 체첸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맞서 람잔 카디로프 수반이 이끄는 체첸 공화국은 러시아 편에서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을 진행하고 있다.

람잔 카디로프는 2022년 9월 4일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에서 “특별 군사작전 초기부터 체첸 부대들은 사령부가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며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라며 우크라이나 ‘나치주의자’들을 제거하고, 돈바스 지역 민간인들을 보호하며 지원을 제공하는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이러한 이치케리야 체첸군의 활동을 미국이 지원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집권 15주년을 맞아 2015년 4월 26일 러시아 국영방송 러시아 1이 방영한 다큐멘터리 「대통령」에서 서방국이 실제로 러시아의 와해를 원한 정황도 있다며 이치케리야 체첸군과 미국 정보요원들의 전화 통화를 감청한 결과 미국이 이치케리야 체첸군에 수송 수단 등을 지원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상황을 말해주니 부시 대통령은 문제의 정보요원들을 ‘혼내주겠다(kick the ass)’라고 답변했다”라면서 부시 전 대통령의 약속이 무색하게 열흘이 지나기도 전에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 “미국은 러시아 내에 있는 어떠한 반군 세력과도 관계를 이어왔고 앞으로도 그런 관계를 이어갈 권리가 있다”라는 서신을 보냈다고 말했다.

람잔 카디로프 현 체첸 공화국 수반은 2009년 12월 21일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치케리야 체첸군 잔당이 서방의 돈과 총으로 유지되고 있다”라며 “나는 소련을 파괴한 데 이어 러시아 연방을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이치케리야 체첸군 뒤에 있음을 공식 선언한다”라고 밝혔다.

▲ 1992년 미국을 방문한 두다예프 대통령(가운데)
▲ 1992년 미국을 방문한 두다예프 대통령(가운데)

실제 두다예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초대 대통령은 1992년 미국을 방문해 빌 클린턴 대통령과 국무부 관리들, 공화당 의원들을 만났다. 두다예프 대통령은 이때 미국과 체첸 유전 개발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합의하면서 미국이 북캅카스 지역에 손을 뻗칠 수 있게 해줬다.

또한 미국 정부는 2000년대 초 이치케리야 체첸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진 않았으나 일리아스 아흐마도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외무장관을 여러 차례 만난 데 이어 미국으로의 망명도 도와줬다.

아흐마도프는 당시 유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유럽 의회, 미국 의회 등을 방문했고 2000년 1월과 10월, 2001년 3월에 미 국무부 관리들을 만났다. 아흐마도프는 2002년 미국으로의 망명을 신청했고 존 매케인 의원을 비롯해 미 상원 의원들의 도움으로 2004년 망명 허가를 받았다. 그는 현재 미 국무부 지원을 받는 국립민주주의기금(NED)으로부터 활동 지원을 받으며 미국에서 살고 있다.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은 2004년 9월 7일 성명을 통해 “미국은 앞으로도 온건한 이치케리야 체첸 지도자들과 접촉을 계속할 것”이라며 이치케리야 체첸군에 대한 지원을 밝히기도 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미국과 서방이 우크라이나군과 우크라이나 편에 선 이치케리야 체첸군 등에게 무기와 훈련을 지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워싱턴포스트와 우크라이나 위기 미디어 센터 등 서방 언론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이치케리야 체첸군이 싸우고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위기 미디어 센터는 미국 대사관 공보부, 국립민주주의기금, 유럽민주주의기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이 지원하는 비정부 조직이다.

▲ 아흐메드 자카예프 이치케리야 체첸 망명정부 지도자(가운데)와 지도부 성원들. 책상 위에 우크라이나 국기와 유럽연합기,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국기가 올려져 있다.
▲ 아흐메드 자카예프 이치케리야 체첸 망명정부 지도자(가운데)와 지도부 성원들. 책상 위에 우크라이나 국기와 유럽연합기,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국기가 올려져 있다.

아흐메드 자카예프 이치케리야 체첸 망명정부 지도자와 지도부 성원들은 2022년 5월 중순 키예프에서 우크라이나 정부 인사들과 의원들을 만났고, 8월 4일 우크라이나 위기 미디어 센터에서 ‘우크라이나 국군의 일부로서 이츠케리아 체첸 공화국 국군의 부활’이라는 주제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의회는 2022년 10월 18일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 영토를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다며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을 공식 국가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과 서방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지원을 이어가며 이런 우크라이나 의회 결정에 큰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갈무리

푸틴 대통령은 2022년 2월 24일 긴급연설을 통해 발표한 대국민 담화에서 체첸 전쟁을 떠올리며 이번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의 의미를 설명했다.

푸틴 대통령은 담화에서 “현대 러시아는 소련 해체 이후 전례 없는 수준의 개방성을 보이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들과 진실한 협력 준비가 되어 있었고 사실상 (러시아가) 일방적인 군축을 했던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끝장내고 부수고 파괴하려고 했다. 그때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으로 이른바 서구 집단이 러시아 남부의 분리주의자들과 용병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때이다”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어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당시 우리는 엄청난 희생과 손실을 겪었고 러시아 남부에 있는 캅카스(역주-체첸도 속한다) 지역에서 국제 테러리즘을 완전히 소탕하기까지 우리는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우린 이것을 기억하고 있고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나토의 동진, 돈바스 지역에서의 학살, 우크라이나 신나치주의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 등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배경을 설명한 후 “자기 나라와 자기 국민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인질로 잡고 우크라이나를 이용하는 자들로부터 러시아를 지키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즉, 체첸 전쟁과 소위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서방의 지원을 받은 세력과 러시아 간의 대결이다.

그래서 현 우크라이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체첸 전쟁과 같은 사건들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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