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안 칼럼] 박정희도 김영삼 치려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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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안 칼럼] 박정희도 김영삼 치려다 죽었다!
  • 유영안 서울의소리 논설위원
  • 승인 2022.10.2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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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권력은 반드시 부패해 망한다.”

  

이 말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말로 특히 정치계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이다. 실제로 절대 권력을 부리다가 최후를 맞이한 정치가가 많다. 아니, 수구들이 집권한 시기에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이승만이 영구 집권을 하기 위해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다 4.19가 일어나 하야했고, 박정희 역시 유신으로 영구 집권을 획책하다가 부하인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광주 시민을 총칼로 죽인 전두환은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명박근혜는 부정부패로 감옥에 갔다.

 

박정희 몰락의 서막 YH사건

2022년 윤석열 정권, 그런데 왜 자꾸만 과거 불행했던 역사가 떠오를까? 특히 김영삼을 치려다 비극을 맞이한 박정희가 떠오른다. 박정희 종말의 서곡은 당시 신민당 당사를 점거해 투쟁하고 있던 YH노동자들이었다.

  

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 서울 마포에 있는 신민당사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4층 당사 안에는 가발 업체인 YH무역 여공 173명이 생존권 투쟁을 하고 있었다. 회사 돈을 빼돌려 미국으로 도피한 사장을 처벌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의 하소연을 들어볼 생각은 하지 않고 경찰을 투입해 가혹하게 진압했다. 비록 독재 정권 시절이지만 함부로 야당 당사에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는데, 박정희 정권은 달랐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여러분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 경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신민당이 여러분을 보호하겠습니다.”라며 노동자들의 당사 점거를 받아들였다. 이에 격분한 박정희가 경찰을 투입시킨 것이다.

당시 YH무역은 한때 수출 순위 15위에 오를 정도로 잘 나가던 기업이었다. 1966년 설립돼 초고속 성장 가도를 달렸다. 수출 진흥책과 중공 핵실험의 반사 이익 덕분이었다. 설립 4년 만인 1970년에는 공장 규모 노동자가 4,000여 명으로 증가하고 철탑산업훈장까지 받았다.

하지만 경쟁이 격화하며 성장세가 확연히 꺾일 무렵부터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던 사주 일가는 회사 자산을 미국에서 외상 수입하고 갚지 않는 방식으로 빼돌렸다. 사주가 앉힌 대리인은 무리한 사업 확장에 실패한 끝에 임금도 밀렸다. 결국 YH무역은 1979년 3월 말 ‘4월 말에 폐업한다’는 공고문을 붙였다.

위장 폐업 철회와 회사 운영 정상화, 생존권 보장을 주장하며 투쟁해온 노동자들은 노동청의 중재가 무위로 끝나고 회사 측이 기숙사의 물과 전기 공급을 끊자 8월 9일 농성장을 마포 신민당사로 옮겼다.

김영삼 총재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정부 부처에 고용 승계와 전직, 회사 정상화 등 대안을 타진했으나 어느 부처도 듣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사태 수습보다 신민당부터 비난하고 나섰다. 여당인 공화당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들의 교섭단체인 유정회(유신정우회)는 “김염삼 총재와 야당이 노사 갈등을 조장한다.”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박정희는 10일 오전 핵심 참모들과 대책 회의에서 강력하게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여당과 청와대 관계자들은 “여공들을 부추기는 불순한 세력이 있다.”라며 안보 차원에서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권의 이런 생각을 대부분 언론은 그대로 받아쓰고 사설에도 올렸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신민당사에 들어와 농성 이틀 밤을 맞는 10일 밤 10시 40분, 여공들은 긴급 총회를 열었다. 경찰이 강제 해산에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여공들은 ‘경찰이 우리를 강제로 해산하겠다면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죽음으로 맞서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투신조’와 ‘할복조’를 정한 여공들의 일부는 울거나 비명을 지르며 창틀에 매달려 ‘물러나지 않으면 뛰어내리겠다’고 소리쳤다.

감정이 복받친 일부는 정신을 잃어 병원에 실려 나가는 초긴장 상태에서 김영삼 총재가 나섰다. “내 이름 석 자와 신민당의 이름을 걸고 조속히 여러분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시키겠다.”라는 김영삼 총재의 말에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그러나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경찰은 총재실 벽을 부수고 김 총재를 먼저 끌어냈다. 여공들 가운데 사망자가 나왔다. 불과 23분에 끝난 진압 작전이 끝난 후 노동자 김경숙이 1층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새벽 2시 30분 숨졌다. 김경숙의 사망 원인은 29년 세월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2008년 과거사 규명을 위한 진실화해위원회는 부검 보고서와 시신 사진을 근거로 ‘손목에 동맥을 끊은 흔적이 없었고, 곤봉과 같은 물체로 가격당한 상처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부산과 마산으로 이어진 민주 항쟁과 유신의 종말

박정희 정권은 ‘배후 세력 색출’을 강조했지만 신민당은 ‘8.11 폭거는 말기적 발악이다. 국민의 분노가 두렵지 않은가’,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플래카드를 당사에 걸었다. 소속 의원들은 농성에 들어갔다.

박정희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미국의 태도였다. 8월 14일 미국 국무부는 ‘한국 경찰의 지나치고 잔인한 폭력 사용을 개탄하며 적절한 문책을 바란다’는 이례적인 대변인 논평을 냈다. 한국 정부가 바로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뉴욕타임스 9월 16일에 실린 인터뷰에서 김영삼 총재는 “카터 행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소수 독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끝내라”며 “미국이 점점 더 국민으로부터 소외된 독재 정권이냐, 아니면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다수냐를 분명하게 선택할 시점이 왔다”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박정희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박정희는 김영삼 총재가 “미국에 의존하는 반민족적, 사대주의 발언으로 국가원수를 모독했으며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 라는 이유로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했다.

10월 15일, 부산대학생들이 먼저 움직였고 이어서 시민들도 가세했다. 부산을 가까스로 진압하니 시위가 마산과 창원으로 번졌다. 학생과 시민들은 ‘유신 종식’과 ‘독재 타도’를 외치며 박정희 정권에 대항했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는 자신의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재판장에서 김재규는 “나는 유신의 심장을 쐈다”란 유명한 말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신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43년 전 악몽 되살아는 듯

2022년 10월 19일 오후 4시, 윤석열 검찰이 민주당 중앙당사를 압수수색하겠다고 들이닥쳤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국정감사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있던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당사로 모여들었고 시민들도 다수 몰려와 검찰을 꾸짖었다.

민주당 민주연구원에 부원장으로 임명된 지 10일도 안 된 김용이 대선 경선 때 유동규로부터 8억을 받았다는 것이 압수수색의 이유였는데, 비상근직인 김용은 사무실에서 3시간 남짓 근무해 압수수색을 해도 나올 자료가 없었다. 그 전에 검찰은 김용을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검찰이 김용을 체포해 놓고도 민주당 중앙당사를 압수수색하려 한 것은 언론에 보여주기 위한 쇼로 보인다. 압수수색을 거부하는 모습을 언론에 노출시켜 여론을 안 좋게 유도하기 위한 꼼수다. 검찰은 8시간 동안 대치 끝에 물러났다.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드디어 윤석열 정권 몰락의 서막이 펼쳐지는구나, 하고 느꼈다.

검찰과 경찰, 국정원을 장악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려는 윤석열 정권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 국민에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유전자가 있기 때문이다. 4.19, 5.18, 6.10, 촛불혁명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김건희와 장모의 비리는 모두 덮고 정적들만 죽이려는 윤석열 정권은 결국 붕괴되고 말 것이다. 민심이 분노하면 군대도 경찰도 천공도 건진도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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