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시 사계고택에서 하룻밤, 새로운 체험관광 명소로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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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시 사계고택에서 하룻밤, 새로운 체험관광 명소로 부상
  • 충청메시지 조성우
  • 승인 2022.07.1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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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 생각(사계고택)
김장생 생가(사계고택)

사계 김장생선생의 생가지였던 사계고택(충청남도 기념물 제190호)에서 ▲사계문화살롱(규방공예, 사계의 전통요리, 사계고택에서 하룻밤/1박2일) ▲사계블루밍축제(어린이 사생대회) ▲사계천하대길지(꿈꾸는 도서관, 계룡역사탐방, 문화재 지킴이) ▲사계전통의례체험(전통성년식, 전통혼례, 리마인드 웨딩촬영) 등 문화유산 향유를 통한 문화활용 사업을 통해 계룡시의 체험관광 명소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지난 9일 사계고택에서 실시된 1박2일 문화의 밤 프로그램에는 초ㆍ중학생을 비롯한 가족과 시민 등이 참여하여 조상들의 풍수와 지혜가 함축된 터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옛 사대부 종갓집의 기(氣)를 받으며 문화를 체험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임시로 마련한 고풍스런 경관등에 어우러진 고택의 멋과 정취에 주변에 사는 시민들도 삼삼오오 찾아와 프로그램 관람 및 산책을 즐기며 평소 느낄 수 없었던 색다른 아름다운 고택의 자태와 멋을 향유하며 400여 전인 1600년 초로 시간여행을 즐기며 유유자적 사계고택 체험에 만족도를 배가시켰다.

사계고택 문화살롱 고택의 하룻밤은 ▲김장생선생 인물탐구 ▲라탄, 무드등, 의복체험 ▲음악회 및 샌드아트 공연 관람 등으로 이어졌다.

이곳은 예학(禮學)의 대가였던 사계 김장생 선생(1548∼1631)이 말년에 후학을 양성하며 30여 년간 살았던 생가로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김선의 원장

김선의(사계선생 14세손) 원장은 어린시절 사계고택에서 살았던 분이다. 김장생 선생의 예학이야기와 효열 김씨부인의 삶의 이야기로 현대에 사는 우리들 가슴을 찡하게 하는 아름다운 효열의 메시지를 전한다.

다음은 계룡의 효열, 염선재(김씨 부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염선재 순천 김씨(1572~1633)는 김종서 장군의 7대손이다. 김종서 장군은 수양대군에 맞서다 3족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역적이 되었지만 손자 1명이 살아남아 가문을 유지하며 신분을 감추고 숨어 살다 김종서 장군 6세손인 김수언은 사계 선생의 제자들과 교류하며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 사계선생이 부인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17세의 딸에게 당대 명문대가인 사계 가문에 시집가기를 당부했다.

평소 효심이 깊었던 염선재(김씨 부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24살이나 많은 사계 선생과 결혼하여 큰아들 영을 낳은 후 친정의 비밀을 고백하며 김종서 장군의 신원을 회복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사계 선생은 단종의 신원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하인 김종서 장군의 신원회복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언젠가는 뜻을 꼭 이룰 것이라며 위로했다.

염선재는 시집와서 43년 동안 슬하에 8남매(아들 6, 딸 2)을 두었다. 1631년 8월 3일, 사계 선생은 부인이 소원하던 조상(김종서 장군)의 신원 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부군의 아침저녁 상식과 소상, 대상의 제사음식을 몸소 살피며 3년 상을 마쳤다.

부군의 3년 상을 마무리한 후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가 없어졌다며 식음을 전폐한 후 1633년 12월 9일, 부군을 따라 생을 마무리했다.

김씨 부인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모두 때가 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조상의 원한을 풀어드리지 못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어찌 감히 내 몸에 훌륭하다는 칭호로 잘못을 더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한다면 임금을 속이고 조상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내가 죽은 후에 너희들이 이 일을 거론한다면 마땅히 내가 눈을 감지 못할 것이고 영혼도 음식을 흠향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뼈에 새겨 잊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염선재는 하늘을 감동하게 하는 효성이 깊은 인물이었고 의리를 알고 그것을 소박하게 실천하는 꾸밈이 없는 인물로 죽기까지 조상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지극정성을 다해 효심을 실천하며 절개를 지킨 열녀였다.

고종황제 칙령

또한 후손들에게 나라에 상을 청하지 않을 것을 유언을 남겼으나 사후 273년이 지난 1906년, 후손 등 123인이 염선재의 효열을 기리는 정려를 청하는 연명상소를 올리고 연산의 유생들도 상소를 올리자 이를 접한 고종은 “충신의 가문에 이와 같은 효열이 있으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라며 염선재 순천김씨에게 효열로 포상하고 정부인의 직을 내릴 것을 명하여 고종황제의 칙령을 받아 광무 십년(1906년) 4월 18일 정부인 순천 김씨라는 교지를 내려 그의 절행을 세상에 알렸다.

명정현판(문원공 사계 김장생 휘장생지 계배 효열부 증정부인 순천김씨지려 광무십년사월)

 

이청환 의원도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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