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고 100년과 ‘교육도시 공주’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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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고 100년과 ‘교육도시 공주’의 미래
  • 민선7기 김정섭 공주시장
  • 승인 2022.07.07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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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년 역사 위에 지나간 자취 / 전설도 무르익은 백제의 고도 /

흩어진 옛 문화를 쌓아올리려 / 모였네, 새 대한의 공주고 건아들.”

올해로 개교 100년을 맞은 공주고등학교의 교가이다. 100년 전 1922년은 어떤 때였던가?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 총독부의 ‘무단통치’가 이른바 ‘문화정치’로 기조를 바꾼 뒤, 1921년부터 충남도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충남에 고등보통학교(인문계 중등학교)를 설립해달라는 청원운동을 벌였다. 홍성·천안 등과 치열한 경쟁 끝에 공주가 1922년 4월, 조선사람을 위한 충청도지역 최초의 중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1602년(선조 35)에 충청감영이 설치된 이후 공주가 줄곧 충청지역의 행정·경제·문화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온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보다 먼저 설치된 대전중학교는 관립 일본인학교였는데,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설립자본은 민간의 기부금이었다. 말하자면 공주고보는 공립과 민립(도민모금)의 합동작품이었던 것이다. 1922년 5월 11일 열린 첫 입학식 당시 신입생은 106명이나 되었지만, 아직 학교건물이 없어 공주공립보통학교(현 중동초) 교실을 빌려 ‘서둘러’ 개교했다.

공주고보의 설립·개교는 1928년 ‘공주공립고등여학교’(현 공주여고)의 설립이 뒤를 잇고 충남도청 대전 이전의 대가로 1933년 ‘공주공립농업학교’(현 공주생명과학고)와 ‘관립여자사범학교’(현 공주교대)를 설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공주는 이미 존재하던 사립 ‘영명학교’(1906년 개교)와 함께 충청도는 물론 전국에서 유학 온 똑똑한 학생들로 북적이는 근대적 교육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공주고보에서는 학생들이 주도한 항일결사운동이 종종 발생했다. 1927년과 1929년, 일본인 교사들의 황국신민화 교육에 항거해 모든 학생들이 참여하는 동맹휴교가 벌어졌다. 1930년대에는 비밀독서회를 만들어 일제통치체제를 부정하는 서적을 읽거나 농민들을 선동해 적발되기도 했다. 공주고보 출신 중 독립유공자는 지금까지 10여 명에 이르는데, 기록이 불충분해 정부의 서훈을 기다리는 대상자들의 숫자가 이보다 더 많다.

공주고등학교 100년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겉과 속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과 분단을 고단하게 넘어왔고 한국전쟁 때에는 학업은커녕 전장에서 나가 희생되어야만 했다. 총 3만여 명에 이르는 공주고 동문들은 산업화와 민주화시기에 공주를 비롯한 충청도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치, 행정, 법조, 경제, 교육, 의료, 예술, 체육 등 각계에서 뚜렷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오는 7월 9일, 100년 성상의 공주고등학교 교정에서 역사적인 백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공주고 100년사> 발간, 100주년 기념관 개관, 100주년 기념공원 조성, 장학기금 마련, 동문 화가 전시회 개최 등 다채롭고 뜻깊은 기념사업들이 함께 펼쳐진다. 하나하나가 충남의 중등교육 100년을 기념하는 표석이다.

공주고등학교 동문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자부심과 연대감이 강하다. 공립학교로서의 특성인지 국가와 지역사회를 향한 참여의식 또한 남다르다. 지역공동체 안에서 압도적인 역사와 전통을 가진 가장 큰 학교 출신으로서 포용력이 돋보인다. 이 특성들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도 지역발전에 큰 밑거름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공주고등학교는 학령인구의 지속적 감소, 수도권과 대도시로의 집중현상, 디지털혁명의 급속한 진전 등 지방학교가 겪는 공통적 어려움에 맞닥뜨리고 있다. 학교와 동문,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함께 넘어야 할 벽이다. 진취적 비전과 담대한 도전이 필요하다. 공론의 마당에서 만나야 한다. 공주고 100주년은 곧 교육도시 공주의 100주년이다. 또다른 100년을 잘 맞이하기 위해 다함께 마음을 모아야 할 때다. 공주고등학교 백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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