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칼럼] 4·19혁명 62주년을 통해 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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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칼럼] 4·19혁명 62주년을 통해 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 김용택 참교육
  • 승인 2022.04.19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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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 ‘미완의 혁명’ 혹은 ‘4·19의거’로 불리기도 하는 4·19 혁명이 일어난지 벌써 62주년이 됐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 지금은 80세의 노인이 됐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사는 국민들은 4·19혁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지만 교과서를 통해 배워 알고 있는 역사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라는 사건 중심의 지식입니다. 사관(史觀)없이 암기한 지식은 ‘나’의 삶,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바꿔놓을까요? 사관없는 지식,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맹인모상’(盲人摸象)은 아닐까요?

<4·19혁명의 전개과정>

우리가 알고 있는 4·19혁명이란 “1960년 3월 15일 자유당정권의 개표조작애 반발 ‘부정선거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참여한 ‘반독재투쟁’, ‘혁명’이다.”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4할 사전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부정선거를 저지르자 ‘3·15마산의거’에 참여했던 김주열학생이 4월 11일 아침에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 4월 19일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독재 물러가라> <이승만은 하야하라> 등 독재정권 퇴진과 민주수호를 요구하였다. 서울시내가 완전히 무정부상태에 빠지자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 서울에서만 1백여 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하는 희생자를 내자 4·25 대학교수단 데모로 이루어졌다.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고, 이 혁명의 결과로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기 위한 처절한 저항>

1894년 동학농민혁명, 1919년 3·1혁명, 1948년 제주 4·3민중항쟁, 1960년 3·15의거, 4·19혁명,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항쟁, 2016년 10월 26일 ~ 2017년 4월 29일 촛불혁명(박근혜 퇴진운동)...으로 이어지는 선열들의 뜨거운 나라 사랑은 오늘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원동력이었습니다.

일제식민지시대에서부터 우리 선열들은 폭력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해 지켜냈습니다. 군주제 시대는 봉건적 지배계급의 맞서 싸우고 군사정권, 독재권력의 폭압에도 외세에 억압에도 물러서지 않고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지금은 비록 외세에 의해 분단됐지만, 남북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과 장기집권야망>

"이승만은 누구인가?"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다 탄핵당한다. 미군정기에 이승만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미군정기에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1946년 6월 3일에 전북 정읍에서 '남측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의 발언을 한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찬탁과 반탁을 놓고 좌·우세력의 대립, 이듬해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소련측과 미국측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된다. 무기한 휴회된 민감한 상황에서 1946년 6월 3일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라는 반공주의와 '단독정부수립 운동' 정치성향을 드러낸다.

 

<이승만의 집권과정>

식민지시기 대부분을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은 815직후 국내에서 화동하기 위해 조기 귀국한다, 귀국에 앞서 맥아더와 하지(John R. Hodge) 주한 미군정 사령관과 회합, 이 자리에서 38선 이남에서 약세를 보이고 있었던 우익세력들을 강화하는 방안이 논의한다.

이승만은 맥아더 사령부와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면서 정치세력들을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재편하고자 하였다. 맥아더 사령부와 미군정은 한국 내에서의 이승만의 명망을 이용하여 좌익세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약세에 있었던 우익세력들을 강화한다.

8·15 광복 이후 38선 이남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총선거에 참여한 이승만은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를 통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은 1945년의 ‘반공’ 담화, 1946년 6월의 ‘단정’ 발언, 1947년 3월의 ‘단독과도정부’ 발언 등을 통해 비난을 받았지만, 1947년 이래 조성된 세계적 상황 및 한반도 내에서의 냉전의 심화는 결국 38선 이남에서 이승만의 정치적 집권을 가능하도록 하였다.

 

<역사왜곡 어떻게 바로 잡을 것인가?>

수구세력과 수구언론은 1948년 8월 15을 건국절이라 하고 이승만을 국부라고 한다. 4·19를 혁명이라는 그들은 5·16도 혁명이라고 한다. 5·16이 혁명이면 4·19는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가 되어야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도 ‘대한민국 혁명사’를 검색하면 중앙일보는 ‘5·16군사혁명, ‘5·16혁명 9주년’으로 기술한 가사가 자랑스럽게 검색에 잡힌다. 헌법을 부정하고 4·19혁명을 부정하는 언론이 있고 지금도 5·16군사정변을 5·16혁명이라며 헌법도 역사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4·19가 혁명인가 5·16이 혁명인가>

1969년 동아일보는 5·16군사정변을 당당하게도 ‘5·16군사혁명’이라는 기사를 썼고 지금도 검색하면 그대로 나옵니다. 5·16은 정변인가 군사혁명인가? 친일의 후예, 516군사정변애 은혜를 입은 세력들은 지금도 5·16군사정변을 5·16혁명으로 기록한다.

대한민국 헌법 서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한다. 헌법에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혁명을 왜 수구언론과 친일 군사독재의 후예들은 5·16을 혁명 운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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