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여순 항쟁 서울 유족회장 이자훈 선생이 말하는 여순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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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여순 항쟁 서울 유족회장 이자훈 선생이 말하는 여순의 진실
  • 자주민주평화통일민족위원회
  • 승인 2022.04.16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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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이자훈 여순 항쟁 서울 유족회 회장과 대담을 진행했습니다.

​선생은 여수 출생으로 3살 때 금오도로 이사를 했으며 9살 때 여순항쟁을 겪었습니다. 아버지, 큰아버지, 사촌 형 포함 일가친지 8명이 학살당했다. 아래에 대담 내용을 소개합니다.

​대담은 먼저, 사건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여순 사건’, ‘여순 항쟁’ 등으로 불리는데,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이자훈 회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1995년까지는 역사 교과서에서 반란으로 가르쳤다. 이후 여순 10.19 사건으로 명명됐다. 그런데 ‘사건’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국가폭력과 같은 권력자들의 잘못을 가리기 위해 권력자의 편의에 따라 만든 명칭이 사건이다. 역사적으로 올바른 이름을 짓는다면 ‘여순 민중항쟁’이다.”

선생은 이어 여순 항쟁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이승만 정권 탄생 전, 미 군정 시기인 1948년 4월 3일 제주 민중항쟁이 일어났는데 진압이 어려우니까 군대를 보내자 해서 여수 주둔 14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것을 결정한 날이 10월 19일이다. 그날 저녁 장병들이 항명하고 사병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의 골자는 ‘동족 상쟁 절대 반대’, ‘미군 즉시 철수’였다. ‘우리는 모두 농민의 아들딸이고, 그래서 동족을 살생할 수 없다’,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통일 국가를 만들자’라는 것이었다.”

이어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해방공간에서 민족적 과제 두 가지, 민중적 과제 한 가지를 합쳐 도합 세 가지의 중요한 과제가 나섰다. 첫째는 자주·통일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친일파를 철두철미 척결하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서 토지를 분배하는 것이었다.

당시 농민이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농업 국가였는데, 인구의 7%를 차지하는 지주들이 농토의 68.9%를 소유하고 있었다. 봄이면 춘궁기가 도래하고 절량(양식이 다 떨어지는 것)농가가 속출했다. 경자유전 원칙에 따라 땅을 재분배해야 했다.

민생은 파탄 나고, 친일 경찰이 발호해 대혼란이 일어났다. 민중은 분단을 고착화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나섰다. 이게 전 민중적 과제였다. 제주에서도 민중에 대한 갖은 약탈과 폭력 행사가 이루어졌다. 정당방위 차원에서 민중이 무장을 들고 항쟁을 시작했다. 이것이 걷잡을 수 없이 되자 14연대 파견을 결정한 것이다.”

​“항쟁에 나선 사람들은 ‘모든 불행은 미군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며 ‘미군 철수’를 외쳤다. ‘인민’이라는 말이 지금은 금기시돼 있지만, 당시에는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였다. 여운형 선생이 인민위원회를 건설하고 인민공화국을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위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 과제를 전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실행에 옮기고 있는데, 미군정이 이를 탄압하고 민생을 파탄 냈다. 그리고 이승만을 내세워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이것이 제주 4.3항쟁, 여순 항쟁의 역사적 배경이다.”

선생은 당시 국가폭력이 일으킨 집단 학살의 심각성에 관해서도 말했습니다.

“여순 항쟁 당시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가 공식 통계로만 1만 명이 넘는다. 국가권력이 무차별적 폭력을 행사해 민간인을 집단 학살했다. 국가권력에 의해 약탈, 강간 등 야만적 폭력이 자행되었고, 연좌가 적용되었다. 죄형법정주의 위반이다. 불법, 무법, 위법 학살이 벌어졌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것까지 합하면 규모 또한 더욱더 어마어마했다. 처음에 항쟁이 진압이 안 되니까 시가에 불을 질러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이때 병약자, 노약자 등 신체 부자유한 사람들이 다 죽었다. 이런 것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엄청난 집단 학살이 일어났다. 유족회 측에서는 3만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본다. 야만 국가였다.”

​“전남 동부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보성, 고흥 등 6개 군 유족회가 있다. 그만큼 폭넓게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전남 서부, 경남 지역에도 폭넓게 학살이 벌어졌다. 이걸 외소, 국소화시켜 애매하게 호도해왔다. 국가폭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자세를 유지해 와 현대사의 진실이 옳게 밝혀지지 않았다.”

선생은 진상 규명 움직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항쟁 73년 만인 2021년 6월 29일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2022년 1월 20일부터 2023년 1월 20일까지 유족들의 신청 기간이고, 2025년 1월 20일이 진상 보고서 국회 제출 시한이다.

반드시 진상이 규명되고 명예회복이 되어서 2025년 10월 19일에는 국가 원수가 추도식에 공식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선생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하늘 위에 있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이 바라는 것은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고 정명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역사에 올바르게 기록이 되고 자손들이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것, 야만 국가에서 문명국가로 가는 것, 그래서 두 번 다시 이 같은 가슴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것이다.”

​“특별법을 통과시켰고, 앞으로 할 일은 국가보안법을 폐지시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반문명 법률이다. 반민족, 반민주, 반통일 악법이다. 이것을 없앰으로써 진정한 보통국가, 사람 사는 국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 거기에 매진하려고 한다.”

​“국가보안법은 여순 항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빨갱이라는 용어가 여순 항쟁 때 완성이 된다. 여순 항쟁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그게 1948년 12월 1일이다.”

선생은 마지막으로 4월 12일 시작할 것으로 예정된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대해 “중단이 아니라 폐기해야 한다. 한미연합군사훈련은 작전계획 5015를 연습하는 것인데, 작전계획 5015는 북침 계획이다. 한국전쟁 때 그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이런 일을 다시 벌이겠다는 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은 정치·군사·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간섭하고 있다. 2019년 9월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을 미국 FBI 국장이 만나고 갔다. 지금의 대선 결과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미국은 한국전쟁 때 세균전을 했다. 미국의 개입, 간섭에 의한 이런 반문명적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모두가 각성할 때가 왔지 않나 싶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 이자훈 회장 대담 전체 영상입니다. 선생의 생애에 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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