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선 문화산책] 조선 상권의 중심 강경 역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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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선 문화산책] 조선 상권의 중심 강경 역사 기행
  • 충청메시지 조성우
  • 승인 2022.02.0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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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선 의장과 함께

자연의 만물은 흥망성쇠로 윤회가 되풀이 된다. 구한말 평양시장과 대구시장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시장으로 조선팔도의 상권을 좌지우지했던 강경읍내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옥녀봉에서 역사기행을 시작했다.

강경은 서해의 밀물과 함께 바닷물이 들락날락하던 지형적 특성으로 내륙 깊숙한 곳에 있던 포구로 원산포구와 함께 조선의 제2대 포구로 이름을 올릴 만큼 해산물을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여 조선의 3대 시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강경역사관(구 한일은행 강경지점)

당시 강경에는 1만5천여명의 주민이 거주했지만 강경장날 유동인구수는 10만여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한일은행 강경지점을 비롯하여 13개 은행이 성업을 했을 정도로 강경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당시에는 군산에 한일은행 강경지점 출장소를 두었을 정도로 정도로 강경의 입지는 대단했다.

강경역

그러나 1904년 12월 27일 경부선 철도가 완공된 후, 1912년 3월 강경~익산간 호남선 철도와 익산~군산간 군산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강경시장은 교통 환경의 변화로 쇠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경의 특산품인 강경젓갈 만큼은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고 근대 역사거리 등 새로운 관광자원 개발로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강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옥녀봉에는 ▲옥녀봉 봉수대 ▲기독교 한국침례회 최초 교회 ▲강경 항일 만세운동 기념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옥녀봉 봉수대

옥녀봉의 옛 이름은 강경산이다. 금강이 감돌아 흐르는 강 언덕에 자리한 강경산은 예로부터 풍치가 아름다웠고 그 산정에는 수운정(垂雲亭)이라 부르는 정자와 함께 옥녀봉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다.

봉수(熢燧)란 높은 산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나라에 큰 일이 있을때 밤에는 봉(햇불), 낮에는 수(연기)를 피워 위급한 소식을 궁궐에 전하던 통신시설물로 옥녀봉 봉수대는 익산군 용안면 광두원산의 봉수를 받아 ▶황화산성 봉수대(논산시 등화동), ▶노성봉수대 ▶공주 월성산 봉수대로 전달됐다.

구본선 의장(강경 항일 만세운동 기념비)

1919년 3월 10일 강경 장날을 이용하여 약 500여명의 군중들이 강경 옥녀봉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펼쳤고, 3월 20일 제2차 만세운동에 1,000여명의 주민들이 동참하여 일본을 긴장시켰던 만세운동의 장소이기도 하다.

기독교 한국침례회 최초 교회
기독교 한국침례회 최초 교회

1897년 미국선교사 폴링이 강경침례교회를 설립한 곳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다. 이 교회는 한강 이남에 지여진 최초의 ‘ㄱ’자 교회로써 당시 남녀칠세부동석, 남녀유별이 엄격한 유교전통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1906년 펜윅 선교사는 이곳에서 침례회 최초 총회를 열었으며 당시 개설한 성경학교는 현재 대전에 소재한 침례신학대학으로 발전했다. 3.1운동(1919년) 이후, 일제는 우리민족 말살정책과 항일사상의 근거지를 없애려는 의도로 전국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결국 교회는 일제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증여형식으로 부지와 교회를 일제에 넘겼다. 일제는 1943년 교회를 폐교 방화하고 신사당부지로 사용했다. 현재 침례교회 전국총회에서 이 곳의 가옥을 “침례교단 사적지”로 지정했다.

구본선 의장(죽림서원)

돌산전망대 옆에는 죽림서원(문화재자료 제75호)이 자리하고 있다. 죽림서원은 사계선생이 율곡(이이)과 우계(성혼)을 모시기위해 설립했고, 육현(▲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을 제사 지내는 사(祠)와 양반의 자제를 교육하는 재(齋)로 구성된 사설 교육기관이다.

이 서원은 인조 4년(1626) 지방 유림들이 이이, 성혼, 김장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황산사(黃山祠)를 모태로 현종 5년(1665)에 죽림이라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고종 8년(1871) 대원군에 의해 사원이 철폐된 후 1964년 제단을 설치하고 1965년에 사우(祠宇)를 복원했다.

임리정(유형문화재 제67호)
임리정(유형문화재 제67호)

죽림서원에서 대나무 숲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임리정(유형문화재 제67호)이 자리하고 있다. 1626년(인조 4년)에 사계 김장생(1548~1631)선생이 건립한 건물로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임리정기비(臨履亭記碑)

원래는 황산정(黃山亭)이라 하였으나 임리정기비(臨履亭記碑)에 의하면 시경의 “전전긍긍(戰戰兢兢) 여임심연(如臨深淵) 여리박빙(如履薄氷)” “두려워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하는 것같이 하며, 엷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 하라”이라는 구절에서 임리정이라 하였다 한다.

즉 항상 자기의 처신과 행동거지에 신중을 기하라는 증자의 글에서 나온 말이며 이처럼 몸가짐을 두려워하고 조심하라는 선인들의 가르침이다.

팔괘정(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
팔괘정(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전망대 남쪽에 위치한 팔괘정(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은 조선 인조때 우암 송시열이 세운 건물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제자들에게 강학(講學 )하던 곳이다.

송시열은 스승인 김장생 선생이 임리정을 건립하고 강학을 시작하자 스승과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임리정과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팔괘정을 건립하게 되었다 한다.

돌산전망대

황산근린공원에 입구에 분수공원과 박범신 문학비가 있으며 분수대 사이로 돌산을 오르면 금강과 강경 읍내를 조망할 수 있는 돌산전망대가 우뚝 서 있다.

강경시내가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옥녀봉과 함께 돌산의 황산근린공원이 강경의 랜드마크로 자리하고 있다. 

황산근린공원 주변에는 죽림서원, 임리정, 팔괘정, 분수공원과 박범신문학비, 시민들의 산책로, 소공원 등이 강경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구본선 의장(황산대교)

1,050미터의 황산대교는 이음매가 없는 연속교량이다, 1987년 6월에 완공된 교량으로 강경측 교대(橋臺) 뒤편에서 상판을 한번에 16.7미터씩 연결ㆍ제작하여 수직 작기로 조금 들고, 교각마다 미끄럼판을 댄 후 400톤급 수평 작기로 밀어내는 공법으로 64회를 반복하여 연결함으로서 당시에 이음매가 없는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긴 연속교량이라 전해진다.

<박성범 앵커가 진행한 황산대교 준공식 KBS 9 뉴스> 준공식에 많은 시민을 동원한 것은 군부독재의 전형적인 상징물이다.

1987년 6월 23일 전두환 대통령은 황산대교 준공식에 참석했다. 이날 준공식 장면은 그 옛날 강경장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을 만큼 방송과 신문 지면을 통해 전 국민에게 전달되었다. 강경을 세상에 알리며 강경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구본선 의장(미내다리)

강경 미내다리(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는 길이 30m, 너비 2.8m, 높이 4.5m로 크지도 넓지도 않고 아담한 3개의 홍예(虹霓:무지개모양)로 된 돌다리인데 미내천(지금의 강경천)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인 은진미교비(恩津渼橋碑)에 의하면, 조선 영조 7년(1731)에 건립되었고 강경촌에 살던 석설산(石雪山)송만운(宋萬雲) 등이 주동이 되어 황산의 유승업(柳承業), 설우(雪遇), 청원(淸元) 등이 이 공사에 진력하여 1년이 못되어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예전에 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고 해서 조암교(潮巖橋) 또는 미교(渼橋)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미내교는 조선시대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의 하나였지만 일제 강점기 수로정비로 물길이 바뀌면서 현재는 제방 제내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8년에 해체하여 2003년에 원상 복원했다.

구본선 의장은 강경산책을 마무리하며 "강경의 문화관광발전을 위해서는 충남의 젓줄인 금강을 활용해야 한다"면서 "금강하구둑을 복원함으로서 강경에 뱃길을 복원하고 뱀장어, 황복, 재첩, 게 등 바닷물과 민물이 오가는 기수지역 등을 삶의 터전으로 서식하는 어종과 웅어(우여)처럼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모천회기 본능을 가진 소하성 어류들이 금강에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생태계를 복원하는 정책개발이 급선무"라고 밝혔다.

옥녀봉과 금강

【옥녀봉 유래】

옛날에는 이 산 아래로 강물이 어찌나 맑았던지 고기가 노는 것도 보였고 조약돌이 손에 잡힐 듯 했으며 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는데다 넓은 들판으로 그 경치가 더없이 아름다웠기에 하늘나라 선녀들이 달 밝은 보름이면 이곳에 내려와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목욕을 하고 놀던 장소로 전설에 의해 전해진다.

이곳에서 옥황상제 딸도 목욕을 하며 놀다가 그 절경에 심취해 올라갈 시간이 늦었고 하늘의 나팔소리에 서두르다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해 한쪽 가슴을 들어낸 체 올라가게 되었고 하늘에서 그 모습을 보게 된 옥황상제가 크게 노하여 딸을 내 쫓았다.

이 땅에 내려온 선녀를 옥녀라 했으며, 하늘나라에 올라가기 위해 기도하다 죽게 되는데 옥녀가 죽은 자리를 옥녀봉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녀가 들여다보던 거울은 바위로 변하여 용영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옥녀봉의 저녁놀

       강경산(옥녀봉)        

                                 나익(那益) 서우선          

 

옛 승운정(乘雲亭)자리에 오르니

구름타고 누리를 내려다보는 듯

풍광이 한눈을 확 메운다.

 

산 아래 새 나루

굽이쳐 흐르는 경관(景觀)

손에 잡힐 듯 아름다우며

저 멀리 고군산 열도까지

 

아득히 멀어져 가는 강변에

채색한 구름 비단강 돋 보이여

창조(漲潮)의 운동이 낳은

흙빛 곱고 수려(秀麗)한 채운들

 

씨 뿌리고 거두는 삶이 좋아

승천(昇天)의 나팔소리 뒤로하고

용영대(龍影臺) 바위 머무른

선녀의 전설 또한 곱고

 

길섶 꽃들 흙 내음 보듬고

어둠을 지우는 속살로

옥녀 웃는 선경(仙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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