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웹자서전] ep.25 ‘바이블’을 ‘비블’로 읽는 법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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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웹자서전] ep.25 ‘바이블’을 ‘비블’로 읽는 법대생
  • 충청메시지 조성우
  • 승인 2021.12.27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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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이상했다. 하루에 수업 한두 개가 전부였다. 대입 전까지 늘 시간이 없어 조바심치며 공부했는데 시간이 주체할 수 없이 남아돌았다.

​대신 새로운 복병이 나타났다. 한자였다. 법학, 경제학, 행정학 전공서적을 읽는데 온통 한자였다. 검정고시와 단 8개월 대입준비로 대학 들어온 자는 한자를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옥편을 뒤져가며 끙끙거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도와주겠다며 나섰다. 평생에 없던 진풍경. 아버지는 모르는 한자가 없었다. 낯설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슬쩍 아려왔다.

이후 나는 아예 옥편을 다 뜯어먹어 버릴 작정으로 한자를 공부했다.

​복병은 또 있었다. 교련수업의 총검술과 제식훈련이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교련수업을 받은 동기들에 비하면 나는 형편 없었다. 제식훈련을 할 때마다 발이 틀렸다. 이런 나를 두고 법대 동기생 이영진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교련을 못하는지 몰랐는데 검정고시 출신이라고 하더라구요. 재명이는 학교 다닌 애들이면 당연히 아는 걸 잘 몰랐어요. 근데 교련을 제일 못하면서 교련복은 혼자 입고 다녔죠(웃음).”

​학교 다닌 애들과 다른 점은 또 있었다. 후에 사법고시 1차에서 영어 말하기 시험을 보면서 깨달은 것인데 내 영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즉 문법은 잘했는데, 놀랍게도 아무도 내 영어발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다.

​내게 ‘바이블’은 ‘비블’이었고, ‘아이언’은 ‘아이롱’이었다. 나라 이름은 ‘아일랜드’, 섬을 뜻하는 단어는 ‘이질랜드’인 줄 알았다. 영어를 직접 들어본 적이 없어서 벌어진 참사였다. 버스와 화장실에서 독학한 영어의 최후. 교정이 필요했다.

​미팅도 해보고 고고장도 가봤다. 하지만 대체로 시시했다. 교련복에 고무신 신고 다니는 이 누추한 청년에 관심을 보이는 여학생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나는 20세 미만 대학생 70%가 키스 경험이 있다는 통계를 보고 깊이 충격을 받는 청년이었다. 내게 이성은 머나먼 이국이었다.

​한편, 특대장학금으로 서울에 방을 얻어 재선 형과 공부하겠다는 나의 의지는 실현되지 못했다. 아버지가 끝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대신 아버지와 신사협정을 체결했다.

​‘선 보관, 후 지급’이었던 것을 ‘선 지급, 후 보관’으로, 제도 혁신을 단행한 것이다. 즉 이전까지 아버지에게 월급을 모두 맡기고 필요한 돈을 받았던 것을, 이제 장학금을 받으면 재선 형의 학원비와 우리의 책값과 용돈을 먼저 떼고 아버지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도 거기까진 합의해주었다.

​선지급권을 확보하고 꿈에도 그리던 공부방은 포기해야 했다. 다음에 이사할 때는 집을 사서 가겠다던 아버지의 계획도 어그러져 우리는 다시 지하 단칸방으로 퇴각했다. 2백만 원 전셋집이 너무 허술해 겨울을 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어느 새벽, 여섯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방에서 법학개론을 펼쳤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식구들의 숨소리가 달라 붙었다.

​- 지금 벌써 2시 30분이 넘었다. 엄마, 아버지, 형, 형, 동생, 동생의 숨소리가 들린다. 잠에 깊이 빠진 모습들. 이렇게 한 방에서 고생하며 살지만 정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살았기에 우리 형제는 우애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아버지와는 등지고 살아가는 듯하지만... 우리 가정에도 영원한 행복이 오기를... 1982.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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