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웹자서전] ep.21 대학, 길이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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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웹자서전] ep.21 대학, 길이 열리다
  • 충청메시지 조성우
  • 승인 2021.12.27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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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서 길을 잃은 나는 평범한 소년공으로 돌아갔다. 공장에서 책을 보는 일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 TV를 보며 놀고 있는데, 술을 한잔 걸친 재영 형이 불쑥 한 마디 던졌다.

​“나처럼 평생 공돌이로 썩으려면 공부하지 마라, 임마.”

​형의 말이 아프게 나를 찔렀다. 누구보다 대학에 가고 싶은 나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과외금지령을 내렸다. 과외로 학비를 벌어야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가난한 형편의 학생들은 길이 막힌 셈이었다.

​목표도 없이 공장이나 다니는 내 모습이 동생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싶기도 했다. 동생들은 저녁 시간이면 화장실을 지키는 엄마와 교대를 서주곤 했다. 창피할 텐데도 불평이 없었다.

​막막해진 나는 성일학원 김창구 원장님을 찾아갔다. 검정고시를 준비할 때 무료로 학원을 다니게 해주었던 그분 말이다. 원장님은 본고사를 폐지하고 사지선다형인 학력고사만으로 시험을 보게 된 것은 나 같은 검정고시 출신에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했다. 또 학비 문제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조금 있어 봐라. 군바리들이 국민들의 인심을 얻으려고 뭔가 화끈한 대책을 내놓을 거야.”

​원장님의 말에 작은 희망이 생겼다. 나는 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다시 공부를 하기로 했다.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든 못하든...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런 의지 때문이었을까?

1981년, 과외금지령에 대한 원성이 빗발치자 국보위가 보완책으로 사립대학에 특별장학금 제도를 도입하라고 지시했다. 공부는 잘하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의 경우 등록금 전액면제에 생활보조금까지 지급하는 파격적인 장학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그 대신 국보위는 모든 대학의 입학정원을 대폭 늘려줬다. 대학 입장에서는 정원이 늘면서 생겨나는 등록금 수입이 장학금을 상쇄하고도 남을 수준이어서 ‘남는 장사’였다.

​나는 당장 대입학원에 등록했다. 아버지도 공장을 계속 다니는 조건으로 학원을 동의해주었다. 월급에서 2만 원만 집에 가져다주고 나머지는 학원비와 책값으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주어진 시간은 8개월이었다. 3년 공부를 8개월에 해야 했고 장학금을 받으려면 260점은 받아야 했다. 등수로 따지자면 수험생의 약 0.5% 이내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에게도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가슴이 뛰었다.

 

[이재명의 웹자서전] ep.22 야밤의 전력질주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치열한 시간이 시작됐다.

​공장에서 퇴근하면 바로 학원으로 달려갔다. 저녁 7시부터 3시간 수업을 듣고 오가는 버스에서 영어단어를 외웠다. 버스에서 졸다가 종점까지 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 통금시간에 걸리지 않으려고 독서실까지 전력질주했다.

공부방이 없던 나는 독서실에서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까지 공부하고 집으로 와 3시간쯤 눈을 붙였다.

​공장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독서실로, 그리고 집에서 다시 공장으로... 시간과 싸우고 졸음과 전투를 벌이는 매일매일이었다.

​갈 길이 까마득한데 설상가상으로 공장에서 맞아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일이 생겼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의사는 가만히 누워 통원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럴 시간도, 돈도 없었다. 결국 치료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재영 형에게 맞은 사실을 말했다. 그때까지도 형을 비롯한 가족들은 내가 공장에서 맞는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형은 펄쩍 뛰며 공장으로 찾아가 동생 때린 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형 덕분에 사과는 물론 치료비까지 받았다. 의사도 폭행으로 인한 상해는 의료보험이 안 되는 것을 사고로 해서 보험처리 해주겠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갈비뼈가 부러진 채로 출근도 하고 학원에 가고 밤새 공부했다.

절박함이 있었다. 죽으려 했으나 죽지도 못하고 팔은 불구가 됐으니 해볼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내일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하지만 학원을 두 달 다니고 또 그만둬야 했다. 아버지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집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학원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월급의 일부를 집에 가져다주는데도 그랬다. 부러진 갈비뼈도 막지 못한 학원행을 돈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나도 이번에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제부터 제가 번 돈은 제 공부에 쓸 거예요!”

​그것은 선언이었다. 공장을 벗어나겠다는 선언이자, 당장의 집 말고 미래에 투자하겠다는 선언. 그것은 합당해 보였다. 그렇게 나는 월급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시 학원에 복귀한 것은 두 달 뒤. 3개월 월급을 모아 가능했다.

​남은 시간은 이제 4개월. 더 이상 공장 다니면서 장학금 받을 성적을 낸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오리엔트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야간반이 아닌 주간반에 등록했다.

​4개월 동안 원 없이 공부했다. 친구 심정운도 마음을 다잡고 함께 공부했다. 우리는 같은 독서실에서 서로를 깨워가며 밤을 새웠다.

​독서실까지 전력질주하던 그 밤을 생각한다. 달려가야 할 곳이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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