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웹자서전, 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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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웹자서전, 어린시절
  • 충청메시지 조성우
  • 승인 2021.11.18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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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오지에 한마리 담비처럼
◇별난족속
◇뺨 스물일곱 대
◇엄마가 믿고 싶었던 점바치의 힘
◇삼계초 5학년은 싹 다 수학여행 간다.

◇이토록 오지에 한마리 담비처럼

내 고향은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이다. 첩첩산중 산꼭대기 기막힌 오지, 화전민들의 터전. 지금도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50,60대 남성들의 로망을 그려내는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 배경으로 맞춤한 곳.

​삼계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왕복 12킬로미터 산길을 걸어야 했다. 초딩의 그 짧은 다리로 걸어 다니자니 결석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형, 오늘 날씨 참 좋으네?”

내가 말하면 앞서가던 형이 슬쩍 뒤돌아보았다. 그리곤 하늘 한 번 쳐다봤다.

​“그래, 날씨가 지나치게 좋은 감이 있다, 그자?”

나는 형의 입만 바라보았다. 허가가 떨어지길 기다리며...

“뭘 가냐? 그냥 놀자.”

​못 가는 날도 많았지만 그렇게 자체결석 처리하는 날들이 꽤 있었다. 폭우로 다리 잠기면 못 가고, 눈보라 치면 못 가고...

​겨울이면 먼저 간 장난꾸러기들이 징검다리에 물을 뿌려놓기도 했다. 얼음 언 징검다리는 고무신 신고는 건널 수 없었으니 그 역시 '중간 하교'를 하는 이유가 되었다. 무수한 핑계들이 그 멀고 험한 등굣길을 피하는 이유가 되곤 했다.

​등하굣길은 멀기도 했지만 바쁘기도 했다. 오가는 길에 징거미 잡아먹고 더덕 캐먹고 개복숭아도 삶아 먹어야 했으니까. 가재는 수준이 좀 떨어진다. 진정 귀하고 고급진 음식은 징거미다.

​개복숭아에는 또 나름 구슬픈(?) 사연이 있다. 보통 개복숭아가 어디 열리는지는 모두가 위치를 알았다. 말하자면 오픈된 먹잇감이었던 셈이다. 익을 때까지 기다리면 선수를 놓치므로 씨도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따먹어야 했다. 여물지 않은 복숭아는 쓰고 독해 삶아 먹는 방식을 개발했다. 그러면 좀 먹을 만했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자연과 별 구분도 되지 않는 몰골로, 한 마리 야생동물인 양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아침이면 이슬에 젖어 축축 늘어진 나뭇가지 아래로 기어 다니곤 했는데, 가을이면 천지가 노란색, 빨간색 단풍이었다. 새파란 단풍잎과 함께. 놀라운 건 색에 흠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쥐어짜면 빨강 파랑 노랑 물감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순수’였다.

​그 풍경들은 아직도 내 마음속 작은 다락방에 남아있고 나는 그곳에서 가끔 위로를 받는다.

​고향을 떠난 건 초등학교 졸업식 직후 1976년 2월 26일인가였다. 3년 앞서 성남으로 떠난 아버지를 따라온 식구가 상경을 했다. 고향을 떠난 데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지통마을 그 오지에도 한때 도리짓고땡이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맞다, 20장의 동양화로 하는 그 놀이. 아버지도 마을주민과 어울리며 잠시 심취했고, 덕분에 그나마 있던 조그만 밭떼기마저 날려버렸다. 아버지의 상경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성남과 나의 인연의 시작이다.

◇별난족속

둘째 형인 재영이 형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상도 사람들이 좀 무뚝뚝하잖아요. 우리 형제도 그랬어요. 나나 재선이는 물론이고 재명이보다 밑인 여동생이나 막내도 어머니에게 안기고 애교 부리고 그러질 못했어요.

그런데 재명이는 안 그랬어요. 재명이는 학교에 다녀오면 꼭 엄마, 하고 달려와서 살갑게 안겼죠. 그러니 어머니가 재명이를 아주 애틋하게 여겼어요.”

​“엄마~!”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언제나 엄마를 먼저 찾았다. 멀리 밭에서 김매던 엄마는 나의 호명을 접하면 호미를 쥔 채 일어나 기다렸다. 그다음 내가 할 일은 총알처럼 달려가 엄마 품에 꽂히는 것.

​엄마 품은 푸근했고 좋은 냄새가 났다.

“도서실에서 재밌는 책 빌려왔어.”

엄마 앞에서 나는 한없이 텐션이 높고 수다스러운 아이였다.

​내가 독하게 일만 잘한다는 평이 많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건 내 일부이지 전부는 아니다. 누구나 그렇듯 외부에 드러나는 면모와는 다른 면이 내게도 있다.

​사실 나는 살갑고 애교 많고 장난기도 많은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러하다. 그러하다고 주장하겠다. 또 앞으로 이야기를 통해 증명해 보일 생각이다. 다시 재영이 형이 덧붙인다.

​“어머니와 재명이가 너무 살가워서 나머지 형제들은 우린 같은 자식 아닌가 싶어 섭섭해했죠.”

​손가락 중에서도 유독 사랑을 많이 받으려 드는 손가락이 있다. ‘배타적 사랑 독점권’이라고 하면 그렇고 어쨌든 성장하는데 좀 더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그래서 사랑받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그런 ‘별난 족속’이 있는데 내가 딱 그 부류다.

​평생 가장 열심히 하고 배워야 할 것 중 하나가 ‘사랑’이라 생각한다. 사랑은 경험이고 노력이며, 또 배우는 것 ‘학습’이다. 사랑은 표현한 만큼 자란다. 나는 환갑 가까운 나이지만 남들이 믿기 어려워할 만큼 아내와 장난치고 수다 떨며 논다. 내가 이렇게 살아오고 살 수 있는 것도 결국 엄마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은 덕분일 거다.

​물론 아버지는 내가 검정고시 공부하고 있으면 전기 아깝다고 불을 끄고 버스비 아깝다고 시험 성적 확인하러 수원 가는 것도 막고... 그래서 너무나 원망스러웠지만 내게 그런 가족사만 있는 건 아니다.

​경제적 어려움이 감히 사람의 사랑을 훼방 놓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가난해서 불우한 가족, 가난해서 사랑을 포기하는 청년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는 것이 내 꿈이다. 이상적인가?

​하지만 그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뺨 스물일곱 대

아버지가 성남으로 떠난 뒤, 어머니 혼자 우리 남매들을 키웠다.

​어머니는 화전을 일구거나 남의 밭일을 해주고 좁쌀, 보리쌀을 받아왔다. 그 보리쌀도 자주 부족해 겨를 얻어다 겨떡을 쪄먹었다. 겨는 보리의 껍질이다. 보리개떡이라 불렀던 겨떡은 아무리 잘 씹어도 삼킬 때 날카로운 보리껍질이 목을 찌른다. 개떡 같다는 말의 ‘개’를 멍멍이가 아니라 '겨'라고 내가 생각하게 된 이유다.

​먹기 힘든 음식이었지만 나는 맛있는 표정으로 열심히 씹어 삼켰다. 엄마 표정을 슬쩍슬쩍 살피면서... 목구멍 따갑다고 투정부리는 남동생 여동생에게는 흘겨보는 것으로 눈치를 줬다.

​크레파스나 도화지 같은 준비물을 학교에 챙겨간 적이 없다. 무슨 강조기간도 많아 그때마다 리본을 사서 달아야 했는데 그것도 못 챙겼다. 또 봄가을이면 논밭에서 벼나 보리 이삭을 한 되씩 주워오라 했다. 아무리 열심히 주워도 쭉정이 한 홉 채우기조차 버거웠다. 아이들은 집에서 한 됫박씩 퍼오곤 했는데, 나는 몸으로 때웠다.

​학교의 요구나 지시를 상습적으로 어긴 나는 매를 맞거나 왕따를 당하거나 화장실 청소로 대속했다. 엄마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다.

​아이들이 산과 들로 특활을 나가면 크레파스도, 도화지도 없는 나는 홀로 교실에 남아 있곤 했다. 적막한 교실엔 햇살만 푸졌고, 그 사이로 쓸쓸함, 외로움, 약간의 슬픔 같은 감정이 먼지처럼 부유했다.

​인싸에 낄 수 없는 아싸, 주류가 아닌 비주류. 내 비주류의 역사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한 번은 새마을운동으로 마을 길가에 코스모스를 심는 환경미화작업을 했다. 나는 엄마를 도와 땔감을 해오고 밭일을 하느라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게 딱 걸렸다. 선생님에게 내 사정은 통하지 않았다.

​손바닥이 내 머리통을 향해 날아왔다. 선생님의 손이 퍽퍽 얼굴에 감기는데 정신이 아득했다. 미화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맞아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맞으면서도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많이 맞았을 것이다.

​그날 내가 맞은 따귀는 스물일곱 대였다. 친구가 세어줘서 알았다. 먼 친척인 친구는 그 장면을 오래 기억했다. 나보다 더...

​내 초등학교 성적표 행동란에 이런 게 적혀 있다. 칭찬하는 말 뒤에 달라붙은 한 마디.

‘동무들과 사귐이 좋고 매사 의욕이 있으나 덤비는 성질이 있음’

​덤비는 성질이 있음.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무엇에 덤빈다는 뜻이었을까? 무턱대고 도전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가난 때문에 더 빨리 자랐고 더 빨리 세상을 알게 됐다.

​가난이 죄가 아닐진대 가난하다고 겪어야 했던 부당함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부당한 일을 당하면 예민하게 반응했던 듯하다. 부당함에 대한 민감도가 남달랐다고나 할까. 그렇지 않고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지도...

​덤벼야 지킬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엄마가 믿고 싶었던 점바치의 힘

고된 노동에 아홉이나 되는 아이들을 낳아 일곱이나 키웠기 때문이었을까? 어릴 적, 어머니가 내 생일을 잊어버린 적이 있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애들 밥 굶기지 않는 게 중요하지 생일이라고 뭘 대단하게 챙겨줄 수도 없었으니... 음력 22일인가, 23일인가 헷갈리던 어머니는 고민 끝에 점바치(점쟁이)를 찾아 생일을 물어봤다.

​그 일을 두고 다 커서는 이렇게 엄마와 농을 주고받곤 했다.

​“엄마, 너무하네. 귀한 아들 생일도 잊어버리고...”

“이자뿐 게 아이라니까.”

“그럼 점바치에게 왜 물어봐요?”

“확인 차 한 번 물어본 거라.”

“아는 걸 확인하는데 그 귀한 겉보리를 한 되씩이나 갖다 바치시나요?"

​어쨌든 겉보리 한 되에 우주의 기운을 모은 점쟁이는 내 생일을 23일로 확정했다. 문제는 이 점술가께서 내 생일을 정하며 팔자도 간명하게 정리했다는 것.

​“얘 잘 키우면 나중에 호강한다.”

​서비스로 했을 그 뜬금없는 말에 어머니는 반색했다. 그 얘기는 평생을 간 나에 대한 남다른 기대와 믿음의 가장 큰 원천이었다.

​여기에 보태 먼 친척 되는 어르신 한 분도 나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이놈, 귓불 자알 생겼다. 봐라, 성냥개비가 두 개나 들어간다. 크게 될 놈일세. 크게 되것어!”

엄마는 점바치와 어르신의 말을 믿었다. 아니 한 올 희망조차 갖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반복해서 새기고 되뇌는 것으로 그 말을 신앙으로 진실로 만들어갔다.

​"니는 잘 된다 캤다, 아이가..."

​엄마가 하는 그 말은 어느새 불가사의한 힘이 되어 내게도 세상이 던져준 유일한 ‘자기확신’ 같은 것이 되었다. 상황논리로는 불가능한 도전을 내가 끊임없이 시도하는 의지와 용기의 원천이었다.

후에 성남시장이 되었을 때 시장실을 방문한 아이들마다 꿈이 무엇인지를 묻고 꼭 꿈을 이루라며 일일이 적어주곤 했다. 아이들에게 내 글이 확신의 도전의 근거가 되길 기원하면서...

신난 표정으로 그 한 장의 종이를 가슴팍에 품고 돌아가던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간절함은, 확고한 믿음은 꽤 힘이 세다.

​상정하기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막연하지만 나는 잘될 거란 믿음에 기반한 어쩌면 무모했을 도전 덕이다.

​그리고 사실 그 믿음에 진정한 힘을 부여한 것은 점바치가 아니라 엄마다.

​프레스에 손상당한 성장판 때문에 내 팔이 조금씩 휘어갈 때도 내 팔을 쓰다듬으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한 엄마의 점바치 얘기는 오히려 내게 위안이었다.

​엄마는 혹여나 내 일상에 불운이 깃들 조짐이 보이면 점바치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불운 따위 원천봉쇄하려 했다. 남매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이에 공장생활을 시작했고 가장 많이 다친 넷째아들을 보며, 이 아이에겐 잘 될 일만 남았을 거라는 믿음과 기대의 힘은 그 무엇보다도 강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건 그냥 엄마의 힘이었다.

◇삼계초 5학년은 싹 다 수학여행 간다.

초등학교 때, 험한 선생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5학년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은 내게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주신 고마운 분들이다.

​“모두 가는 수학여행인데 재명이가 빠지면 되겠습니까? 아니, 우리 교장선생님께서 그렇게 방침을 세우셨다니까요. 삼계초등학교 5학년은 싹 다 수학여행을 간다, 이렇게요!”

​산골짜기 화전민 소개집까지 쫓아온 선생님은 그렇게 열변을 토하셨다. 수학여행비는 어떻게든 해결해보겠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남의 신세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온 어머니는 슬프고 복잡한 표정으로 수학여행 참가동의서에 동그라미를 쳤다.

​돌아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은 못내 존경스럽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선생님을 바래다주며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화전민 소개집을 선생님께 보인 것이 부끄러웠다. 소개집은 강제로 이주당한 화전민들을 위해 시멘트블록으로 지은 방 두 칸짜리 허술한 집이었다.

​교장선생님이 모든 학생은 수학여행을 간다는 방침만 세운 건 아니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 사정을 살펴 스스로 수학여행비를 벌게 해주셨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아이 둘을 하천가 개간한 돌밭에서 돌을 고르거나 고사리손으로 보리 베는 일을 따내 품삯을 받아 저축하게 해주셨다. 품삯도 어른들 임금의 절반에 가까운 큰돈이었다.

​학교 매점을 학생들이 직접 운영하게 하고 가난한 아이들몫의 수익금을 수학여행비로 저축했다.

​지금 생각하면 시대를 앞서가신 선생님들이시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는 아이들의 자존감을 건드리지 않고, 스스로 성취하게 해주셨던 셈이다. 깊은 배려와 세심한 사랑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5학년은 가난 때문에 빠지는 학생 없이 모두가 생전 처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거기서 여름에도 얼음이 있다는 걸 1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처음 알았다. 생선뼈째 갈아만든 진짜 어묵의 맛도...

​내 유년의 환상 같은 한 장면도 교장선생님이 만들어주셨다.

​머리를 묶은 여성교장님이 한번은 한겨울에 전교생 모두를 학교앞 논바닥으로 나오라 하셨다. 멀리서 군용 헬리콥터 한 대가 날아왔는데, 놀랍게도 그 거대하고 신비한 비행물체가 우리 눈앞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우리의 돌팔매질 대상이던 그 육중한 쇳덩어리를 가까이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이었는데, 교장선생님이 조종사와 얘길 나누더니 손을 흔들어 아이들을 불렀다.

​“만져봐라! 이걸 타면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단다.”

​교장선생님의 그 말은 마법처럼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제일 먼저 다가가 헬리콥터의 차가운 동체를 만져보았다. 가슴이 저릿하고 온 몸이 붕 떠올랐다.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져버린 헬리콥터는 미지의 광대한 세계에 대한 꿈을 만들어 주었다.

​가난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가는 것. 그 간결하고도 아름다운 기준.

​아마도 내가 주장하는 보편적 복지는 그 최초의 경험에서 싹을 틔웠을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이 매점을 운영하고 그 수익을 수학여행비로 나누어 가진 일은 협동조합과 보편기본소득에 대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삶은 가끔씩 예상을 벗어나 경이로울 때가 있다. 내 안에 사랑 넘치는 그 선생님들이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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