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칼럼] 오욕과 공포의 해방 정국, 빨갱이가 등장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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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칼럼] 오욕과 공포의 해방 정국, 빨갱이가 등장한 이유
  •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
  • 승인 2021.01.1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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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즉시 철수 하라!", "망국 단독선거 절대반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 "조국통일 만세!", "투옥 중인 애국인사 석방하라!"... 1947년 3월 1일, ’삼일절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려 2만 5천~3만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나온 구호들이다. 

제주4·3항쟁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공식 발표한 사망자만 14,363명… 그러나 학자들은 제주 도민의 8분의 1 이 죽거나 행방불명된 희생자는 3만 명에서 8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4·3항쟁으로 희생된 사람 중에는 10세 이하가 770명이나 되고 11~20세가 2,464명, 21~30세가 5,461명, 31~40세 2,291명, 41~50세가 1,383명… 심지어 70세 이상이 344명이나 된다. 국가권력에 의해 당한 폭력. 제주4·3민중항쟁은 노무현 정부 이전까지는 ‘민중봉기가 아닌 공산폭동’ 혹은 ‘제주반란사건’이라고 했다. 

무고한 양민이 미군과 군경에 의해 학살 당한지 74년이나 지난 제주4·3항쟁은 촛불정부로 자처하는 문재인정부에서조차 제대로된 진상규명과 희생자에대한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역사를 왜 배우는가?>

산업사회에서는 자본, 자원, 노동 등 물질의 소유가 힘의 근원이었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지식과 정보를 생산해 내는 인간의 창의력과 인터넷을 통한 네트워크 및 미디어 활용 능력이 모든 힘의 근원이 되는 사회다. 

인터넷과 사람의 결합, 컴퓨팅의 유비쿼터스화와 저장 공간의 무한 확장, 사물인터넷의 전개,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부상, 공유경제 확산, 물질의 디지털화...시대를 살아갈 청소년들에게 아날로그 지식을 암기시키는 교육으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오늘날 학교교육이 다 특히 역사교육은 아직도 고색창연한 지식주입이다. 정권의 시각에 맞춘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세대들은 현대사를 모른다. 선사시대, 중세, 근대, 현대... 와 같이 시대 순, 양반 중심의 영웅사관과 친일사관으로 씌여진 역사를 배운 세대들은 현대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학살자는 누구였을까?>

제주4·3항쟁이 시작된 것은 미군정기간인 1947년부터 이승만정권시절인 1954년 9월 21일까지다. 미군철수, 단독선거 반대, 조국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국노들인가?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은 애국양민을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워 무차별학살한 명백한 국가 폭력이다. 

해방정국에서 일어난 사건은 제주4·3항쟁뿐만 아니다. 동족을 죽일 수 없다면 출동을 거부하다 11,000여명의 군과 민간인이 희생된 여순항쟁(1948년 10월 19일), 1950년 12월11일에는 아사자,병사자,동사자만 무려 5만-9만여명에 달했던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인 1950년 국군·헌병·반공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10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살해당한 보도연맹 학살사건, 역시 전쟁 중인 1950년 군·경에 의해 1800명 이상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산코발트탄광 학살사건, 그리고 어린이와 노약자를 포함해 719명이 군경에 의해 희생된 거창 양민 학살사건, 마찬가지로 1950년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10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이 살해당한 보도연맹사건...이 일어났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 빨갱이...>

해방과정에서 국민들이 북한에 호의적이었던 가장 큰 이유는 토지개혁 때문이었다. 이승만정부의 토지정책은 ‘유상매입, 유상분배’에 비해 북한의 토지정책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다. 일제시대 피땀흘려 일한 민중들은 소출의 대부분을 왜놈들이 앗아가고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들에게는 내 땅을 갖는게 소원이었다. 

그들이 유상분배정책에서 소외됐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일제가 차지한 땅은 미군정이, 미군정이 차지했던 적산땅은 친일분자들이 소유하게 되고 그들은 또다시 친일분자들의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정책의 북한에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승만이 국부..? 애국자...?>

35년간 일제치하에서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조국해방이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38이남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 분단을 획책하고 단독정부를 수립을 원했던 세력은 누구였을까? 만약 국가보안법이 없었다면 남한만의 단독정부이 가능했을까? 집권에 눈이 어두운 이승만은 미군정이 필요했던 친일세력들 그들과 손잡고 하나된 조국을 반대해서라도 집권을 위해 친일세력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일제 강점기 시절 친일세력과 지주 그리고 군장성 법조인, 지식인, 친일언론인 그리고 변절한 종교세력과 결탁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제주4·3항쟁에서 왜 ‘단정, 단선 반대’라는 구호가 등장했는지 알만하지 않은가? 왜 민중들이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미군정과 이승만정부에 반기를 들었는지 토지정책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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