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실을 가릴 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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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실을 가릴 순 없습니다
  • 진실의 길
  • 승인 2017.11.25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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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테오도로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세월호 선체에서 뼈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은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조직적 은폐사건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은폐라기 보다는 ‘발견을 알리는 시점에 대한 판단미스’ 로 보입니다. 유족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관료주의가 만들어낸 실수입니다. 그것은 은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은폐해서 득을 볼 사람이 누구인가요?

이걸 가지고 자유한국당이 들고 일어나 온갖 비난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참으로 얼굴이 두껍습니다. 욕을 못하는 사람의 입에서도 온갖 욕이 튀어 나옵니다. (이럴 땐 욕 잘하는 사람, 급 부러움!)

2년 전 오늘 세월호 특조위가 정권과 새누리당의 갖은 방해로 조사활동을 할 수 없을 때 글 하나를 썼습니다. 아주 점잖은 글이지요. 예술로 현실을 비판한 글이니까요. 오늘 그 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가릴 순 없습니다

테오도로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년, 루브르 박물관 소장

데자뷔(déjà vu)라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심리학적 용어가 언젠가부터 심심치 않게 지상(紙上)에서 보인다. 굳이 번역하면 기시감(己視感)이란 뜻이니, 처음 보는 것 같지만 어디선가 이미 본 것처럼 느끼는 정신현상을 말한다. 

이 말이 일상용어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뇌리 속에 남는 유사한 대형사건이 우리사회에서 반복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림공부를 좀 한 사람들이라면 데자뷔를 경험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저 사건 어디서 본 듯한데… 그게 무엇일까” 미술사에서 세월호의 데자뷔? 그게 무엇일까?

오늘 보는 바로 이 그림이다. 1819년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천재라 불리는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이란 작품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19세기 회화 방에 들어가면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 거대한 그림이다. 높이는 5미터에 가깝고 길이는 무려 7미터가 넘는 초대형 역사화다.

그림의 역사적 배경을 몰라도 관객들은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다 위에서 작은 뗏목을 탄 사람들이 먼 바다를 향해 손을 들어 필사적으로 소리를 친다. 그림을 바라본 다음 가만히 눈을 감아 보라. 그들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살려줘요! 우리 여기 있어요! 제발 우리를 살려줘요!”

그런데 자세히 살피면 그런 아우성 중에도 뗏목에선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아니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마지막 고비를 버티지 못하고 이미 세상과 작별한 사람들이 뗏목 위에서 엎어지고 자빠진 채 뒹굴고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배경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1816년 7월 2일 아프리카 식민지 세네갈로 향하던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가 망망대해에서 난파되었다. 메두사호의 승선원 400명 중 250여명은 구명보트에 탔지만 나머지 선원과 승객 149명은 뗏목을 급히 만들어 바다로 뛰어들었다.

13일 동안 이들은 물도 식량도 없이 표류하면서 죽음과 질병, 광기와 폭동, 기아와 탈수를 경험하고 마침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구출된 생존자는 오로지 15명. 사람이 살아 있으면서 지옥을 경험한다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제리코는 이런 절대 절명의 상태에 빠진 이들이 13일의 표류 끝에 수평선 멀리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을 이 그림으로 묘사했다.

세월호 사건의 첫 번째 데자뷔는 메두사호가 난파되면서 보여준 선장과 선원들의 태도였다. 세계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선장은 배와 운명을 같이 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 메두사호의 선장이란 놈(!)과 고급선원 그리고 당시 이 배에 타고 있었던 귀족과 돈 많은 승객들은 배가 난파되자 자신들만 살겠다고 배에 실려 있던 구명보트에 먼저 타 버리고 말았다.

원래 선장과 고급선원들은 구명보트에 먼저 탄 다음 앞에서 뗏목을 끌고가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험한 바다에서 그게 어렵다고 판단한 이 선장이란 놈은 뗏목으로 이어진 밧줄을 끊어 버리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바로 이 대목이 세월호 선장 이준석과 몇몇 선원들이 보여준 행동과 오버랩 되는 부분이다. 한국에 메두사호 선장과 선원들이 환생한 것은 아니었을까.

세월호 사건에서 두 번째 데자뷔는 메두사호 사건이 일어난 전후의 정권의 태도다. 이 사건은 당시 나폴레옹을 쫓아내고 막 복귀한 부르봉 왕조로선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참사였다. 메두사호의 난파와 뗏목의 비극을 만들어낸 이 선장 놈은 애당초 선장될 자격이 없었던 자다.

선장으로 임명되기 전 20년 동안 거의 배를 몰아본 경험이 없었음에도, 왕당파라는 이유로 거함을 지휘하는 선장이 되어, 남들 앞에서 거들먹대던 천하의 모자란 놈이었다. 수백 명의 승객을 싣고 가는 정기여객선 세월호에 무책임한 비정규직 선장을 고용한 것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부르봉 왕조는 이런 무자격자를 선장으로 임명한 것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 시민들이 메두사호 난파 내막을 안다면 정치적으로 부르봉 왕가는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당시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을 철저히 함구하고 더 나아가 은폐를 시도했다.

바로 이 같은 모습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후 대한민국에서 똑 같이 벌어지고 있다.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피해자 가족과 국민의 여망이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는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진상규명을 위해 만들어진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은 관련부서의 비협조, 집권여당의 방해, 여당추천 특조위원들의 정권에 대한 충성심으로 파행에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 상황은 마치 이승만이 친일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만든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대관식’ , 1808년. 제리코가 살아 있을 때 돈을 벌고 유명해지려면 이런 살아 있는 권력을 그려야 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우리에게 비극적 데자뷔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진실이 결국 승리한다는 단순한 이치와 위대한 한 화가의 작가정신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쩜 이것을 알려야겠다는 게 바로 오늘 내가 이 그림을 소개하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적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 메두사호의 난파와 뗏목에서 일어났던 참상은 처음에는 가려지는 듯 했지만 얼마가지 않아 서서히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생존자들이 입을 열었고 마침내 그 진상이 책으로 출판된 것이다.

정권이 진실을 가리려 했지만 그것을 영원히 가두지는 못했다. 아마 세월호도 그럴 것이다. 그것도 언젠가 명명백백하게 사고의 원인과 사고 후 은폐의 내막이 드러날 것이다. 그게 역사의 순리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화가의 작가정신을 이 그림에서 발견하는 것도 우리에겐 매우 소중하다. 당시 프랑스 낭만주의 사조 하에서는 위대한 영웅의 역사적 사건을 과장적으로 그리는 게 유행이었다.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대관식’(1808) 같은 그림 말이다.

현재의 권력자를 높이 6미터가 넘고 길이가 9미터가 넘는 작품 정도로 그려야 돈도 벌고 유명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메두사호의 뗏목은 시대적 조류에선 한참 떨어진 그림이었다.

제리코라는 천재가 그런 길을 몰라서 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그것을 어떻게 감동적으로 그릴 것만 생각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예술혼의 소산이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당시 생존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참상의 실체에 다가갔다.

그는 뗏목에서의 생존자들의 정신상태가 어떠했는지, 그런 그들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정신병원을 찾아 광인들을 관찰했다. 심지어는 병원과 시체 안치소를 찾아가서는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관찰하면서 이들 피부의 색과 질감을 연구했다.

그 뿐 만인가. 그는 목수를 고용해 실제 크기의 뗏목을 만들고, 밀랍으로 사람 모형을 만들기까지 했다. 이런 철저한 고증 끝에 이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도대체 그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했을까. 진실을 자신의 예술혼으로 그려내야겠다는 작가정신, 그것이 없었다면 이런 그림은 애당초 탄생할 수 없었다.

이 그림은 1819년 살롱에 출품되었지만 철저히 외면당했다. 당시 부르봉 왕조 하에서는 당연히 예상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평가를 받는 것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세상은 제리코의 이 그림을 위대한 진실의 승리라고 칭송하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루브르에서 지금도 세계의 시민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제리코라는 한 젊은 화가의 작가정신이 빚어낸 위대한 승리다.

우리 예술가 중에서도 지금 어딘가에서 ‘메두사호의 뗏목’에 버금가는 ‘세월호’라는 작품을 그리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게 누구일까?

(2015. 11. 24.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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