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칼럼] 순양적의(順佯敵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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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칼럼] 순양적의(順佯敵意)
  • 이정랑의 고전소통
  • 승인 2020.10.13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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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의도에 따르는 척한다.

이정랑 중국고전 평론가. 칼럼니스트

용병의 요점은 적의 의향을 신중하고 자세히 살피는 데 있다. 적 전체를 상대로 작전 계획을 세워 천 리 먼 곳에 있는 적을 쳐부수고 장수를 죽일 수 있다. 이를 두고 교묘한 방법으로 일을 성취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계략은 적의 의도에 따르는 척하면서 대세의 흐름을 좇는 것이다. ‘잡으려면 잠시 놓아주라’는 ‘욕금고종(欲擒故縱)’의 계략을 아울러 구사하면서 적의 행동을 극단으로 치닫게 유도하여, 잘못을 저지르게 한 다음 병력을 집중시켜 진군하는 것이다.

(‘욕금고종’ 참조) 조조는 이에 대해 “적이 전진하려 하면 매복으로 격퇴, 시키고 물러가려 하면 길을 터주고 공격한다.”는 주를 달았다. 책략 예술의 목적은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것인바, 적을 잘 다루어야지 거꾸로 적에게 당해서는 안 된다.물살을 따라 배를 밀고 나아가듯, 비탈길로 노새를 몰아가듯,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목적은 적이 내 범위 안으로 들어오도록 부추기자는 데 있다.

 

『병경백자』 「순자 順字」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견고한 자에 대해 억지로 거스르는 것보다는 쫓다가 틈을 이끌어 내는 것이 낫다. 적이 전진하고 싶어 하면 약한 척 전진하게 해주고, 물러나고자 하면 길을 열어주어 멋대로 후퇴하도록 한다.

적이 강함을 믿고 대들면 예봉을 멀리하여 굳게 지키면서 교만함을 부추기고, 적이 위엄을 부리고 나오면 거짓으로 받들어 주는 척하면서 내실을, 기해 놓고 나태해지기를 기다린다. 대접해 주는 척하면서 갑자기 공격을 가하고, 놓아준 다음 잡아들이며, 교만하게 만든 다음 그 틈을 타고, 나태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수습한다.

역시 적의 의도대로 따라줌으로써 적의 착오를 이끌어 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순양적의’의 핵심은 적의 심리와 판단의 준거가 되는 사고의 틀에 맞추는 데 있지, 단순히 적의 행동만 쫓는 데에 있지 않다.

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이 독일군의 침공을 막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1943년 9월 독일군이 소련에서 철수할 때, 소련 정찰군은 적이 당당한 모습으로 주둔지를 떠나는 것을 발견했다. 소련군 지휘관은 정찰군의 보고에 근거하여, 적이 철수 행위를 통해 마을에 복병을 숨겨놓은 사실을 은폐하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적의 복병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은 일부 병력으로 하여 몰래 마을 뒤쪽을 돌아 적의 등 뒤를 공격하도록 준비시켰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부대를 아무 일도 없는 듯 정면에서 적의 매복권 쪽으로 전진시켰다.

즉, 적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한 것이다. 이같이 부대를 둘로 나누어 양동 작전을 펼친 것은 적이 틀림없이 상대가 접근해올 것을 예상하고 매복을 배치했으리라는 점을 근거로 한 행동이었다.

따라서 소련군은 적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어떤 은폐 동작이나 수단을 취하지 않다가, 총격을 가할 수 있는 사정권 내에 진입한 후 병사들을 일제히 땅에 엎드리게 했다. 독일군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순간, 마을 뒤쪽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이어 엎드려 있던 병사들도 일제히 공격을 가하니 독일군 복병은 순식간에 섬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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