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칼럼] 백성의 해골로 산천을 뒤덮은 국민방위군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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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칼럼] 백성의 해골로 산천을 뒤덮은 국민방위군사건
  • 김용택 참교육이야기
  • 승인 2020.02.17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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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아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의 연옥과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국현대사 산책-리영희증언-

사진 : 소집된 국민방위군의 모습
사진 : 소집된 국민방위군의 모습

부르면 눈물 날 것 같은 그대가 아니라 알면 분노에 치를 떨게 될 이 기막힌 사건은 왜 학생들이 배우는 현대사 교과서에조차 한 줄도 나오지 않을까? 물론 모든 사실(事實)을 다 역사로 남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실(事實)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살아 갈 세상에 길잡이가 되거나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면교사로 삼을 사실(事史)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배우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런데 사가(史家)가 혈연이거나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라면 객관적인 역사를 집필할 수 있을까? 국정교과서가 안 되는 이유가 그렇다.

개인의 인품은 스펙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 온 내력을 보면 안다. 물론 잘잘못 없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객관적인 인물 평가는 그 사람의 내력을 숨김없이 드러내 후세 사가(史家)들의 냉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겠다는 사람들...

이승만을 평가하면서 그가 초대대통령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부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다. 이승만이 초대대통령이 되기까지 그리고 12년간의 임기동안 그가 한 일을 보면 드러난 역사보다 감춘 역사가 더 많다. 그래서 6월항쟁과 같은 열린 공간에서는 ‘거꾸로 읽는 역사니 ’거꾸로 읽는 현대사‘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국민방위군사건의 진실은 이렇다

현대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치고 ‘국민방위군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1월 1·4 후퇴 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월~2월 사이에 500,000명에 달하는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 가운데 아사자, 병사자, 동사자가 무려 120,000여명에 이르렸고 동상으로 인해 손가락과 발가락뿐만 아니라 손과 발까지 절단난 200,000여명이 넘는 동상자들을 이르게 한 사건」을 말한다.

사진 : 남하하는 국민방위군 대원들
사진 : 남하하는 국민방위군 대원들

국민방위군은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은 한국 정부는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 국민병을 편성’된 부대다.

이승만은 학도병을 이끌고 낙동강 전투에서 활약했던 김두한을 국민방위군 육군준장 사령관으로 임명해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하자 군대경험도 없는 씨름꾼인 김윤근을 추천하여 육군준장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 부사령관에 독립운동가 출신 윤익헌대령으로 삼아 편성됐다.

이들은 국민방위군에게 지급해야 할 군수보급, 물자를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징집된 수많은 국민방위군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게 된다.

이들은 병력 수송비용과 식비 등을 횡령하여, 신정동지회 김종회 등 20여명의 국회의원들에게 공작비와 여비 등의 명목으로 제공되었다. 덕분에 징집된 방위군이 혹한기 속에 굶주리면서 행군하여 기아와 동상으로 전투 한번 없이 희생된 대한민국 육군 최악의 흑역사이다.

적군도 아니고 조국인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 경시로 100여 일 사이에 전투에 참여는커녕, 총 한 번 못 만져본 장병 수만 명이 후방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었으며 전체의 80%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 유영익교수조차 "9만 명 가량의 장정들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진술했다.

이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물러나고 이를 지켜본 부통령 이시영은 이승만 정부에 대한 무지막지한 회의감으로 사표를 제출하여, 스스로 행정부 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의 공식기록에는 1,000~2,000명 사망으로 기록되어있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50,000~100,000명 가량이 죽었다고 하며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에 따르면 50만 명의 대원 중 20%가 병사 혹은 아사했다고 되어있고, 부산일보가 간행한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0,0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죽했으면 이승만을 열렬히 찬양하는 유영익 교수조차 9만 명이 굶어죽고 얼어 죽은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말했겠는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5만~ 8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사진 : 국민방위군 사령관 외 5명 총살 공개집행집행 모습
사진 : 국민방위군 사령관 외 5명 총살 공개집행집행 모습

추산이다. 징집된 이들은 명부도 없고 군번도 없고 무기도 없고 군복도 없는 군대. 일명 '죽음의 대열', '해골들의 행진'이라 불린 바로 그런 군대가 국민방위군이었다. 명부도 없으니 몇명이 동원되었고,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죽었는지는 오늘날 현재에도 정확히 모른다.

정부의 공식기록인 '한국전란1년지'에는 천수백명 사망, 당시 소문으로는 ‘5000명 내지 1만명’...은 말 그대로 추측일 뿐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부통령 이시영이 사직서를 제출했고,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던 한민당과 민국당계 인사였던 조병옥, 윤보선, 김성수 등은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된다.

이 기막힌 사건은 비공개가 원칙인 군사재판에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를 하였다. 이 재판에서 육군총장 정일권 소장에게 "(국민방위군사령관)김윤근은 일등병의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별을 달고 사령관이 될 수 있느냐?"하고 묻자 정일권은 "이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다."라고 답변했다.

수만명이 굶어 죽은 이 기막힌 사건으로 육군참모총장인 정일권이 이종찬으로 교체되고 국민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을 선고, 공개 처형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언제 이 억울하게 죽어간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혀 그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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