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칼럼] 교이불어(敎而不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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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칼럼] 교이불어(敎而不語)
  • 이정랑의 고전탐구
  • 승인 2019.12.23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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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고 가르친다.

북송시대 신종(神宗) 희녕(熙寧) 연간(1068~1077년) 어느 날, 동파(東坡) 소식(蘇軾)은 당시의 재상 왕안섯(王安石)을 방문했는데 마침 왕안석이 집에 없었다. 왕안석의 집을 둘러보던 소동파는 우연히 책상 위 벼루 밑에 깔린 미쳐 완성하지 못한 시 한 수를 발견했다.

어젯밤 서풍이 불더니

뒤뜰의 국화 꽃잎이 떨어져

마치 황금이 땅에 가득 쌓인 것 같구나

이 시를 본 소동파는 생각했다.

‘가을이 되면 서풍이 부는 것은 당연하지만 국화는 서릿발이 심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오상지골(傲霜之骨)‘이라 가을이 아주 깊어서야 시들기는 하되 꽃잎을 떨어뜨리지 않는데, 어째서 꽃잎을 황금이 땅에 깔린 것같이 쌓였다고 했을까? 왕공께서 참으로 멍청하구나. 실로 우스운 일이야!’

그래서 소동파는 그 시 아래에다가 이렇게 적어놓고는 자리를 떴다.

가을꽃은 봄과 달라 떨어지지 않거늘

시인께 잘 살피시라

한 말씀 드리노라

왕안석이 돌아와 시를 계속 쓰려다 소동파가 다녀간 것을 알게 되었다. 소동파의 시를 본 왕안석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젊은 친구가 지나치게 자부심이 강하군. 내 이 친구에게 실질적인 교육을 시켜 주리라.‘

얼마 후 왕안석은 황제에게 소동파를 호북성 검주(芡州)의 단련부사(團練副使)로 보낼 것을 건의했다. 소동파는 이 조치를 자신을 무시한 것이라 생각해서 몹시 불쾌해했다.

그래서 부임해간 뒤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 진계상(陳季常)과 뒤뜰에서 국화를 감상하며 술을 마셨다. 그런데 며칠 동안 큰 바람이 불어 뒤뜰의 수십 그루나 되는 국화에 꽃잎이 하나도 매달려 있지 않았다.

황금이 땅을 수놓은 듯, 온 마당을 가득 메운 국화 꽃잎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이를 본 소동파는 잠시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계상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국화 꽃잎을 보더니 왜 그렇게 놀라는가?”

소동파는 왕안석의 집에서 국화에 관한 시를 자신이 고쳐 쓴 일을 이야기 하면서, 이제야 어떤 지방에서는 국화도 꽃잎을 땅에 가득 차도록 떨어뜨린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진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동파는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작년 이곳 검주로 발령이 나자 나는 왕형공(王荊公.-1079년 왕안석은 좌부사관문전대학사(左仆射觀文殿大學士)에 임명되면서 형국공에 봉해졌기 때문에 왕형공이라 불렀다)이 내가 자신의 단점을 지적한 데 앙심을 품고 보복을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형공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어리석었음을 누가 알았으랴. 얄팍한 재주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으니, 이번 일로 크게 깨우쳤네. 무릇 모든 일에 겸손하고 신중해야지, 섣불리 자신의 총명함만 믿고 큰소리치다간 남의 비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지.”

그 뒤 소동파는 왕안석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엥겔스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방면의 학습이건 자기가 범한 잘못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빨리 배우는 것은 없다.”

소식이 국화 시를 함부로 고치는 잘못을 범한 것은 아는 것이 많지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왕안석은 그를 말로 가르치려 하지 않고 국화 시에서 말한 그 옛날 자신이 있었던 지방으로 소식을 발령 냄으로써 자신의 눈과 귀로 직접 사실을 확인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젊은이의 생각을 고쳤으니, 말하지 않는 방법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은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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