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법꾸라지 김기춘이 드디어 구속됐다. 오랜만에 신선한 뉴스다.
상태바
[기자수첩] 법꾸라지 김기춘이 드디어 구속됐다. 오랜만에 신선한 뉴스다.
  • 조성우 기자
  • 승인 2017.02.01 21: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KAL 858기를 폭파하여 115명을 살해한 김현희는 사면, 군사정권 퇴진을 외친 국민은 "인혁당 사건" 조작으로 사형

보도에 의하면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혐의로 지난 21일 구속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22일 특검에 소환됐다.

▲ 수갑에 채워진 법꾸라지 김기춘

수갑을 찬 채 굳은 얼굴로 특검 사무실로 끌려가는 그의 모습을 TV화면으로 지켜보며 시원함을 느꼈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기반인 유신헌법을 설계하고 반국가단체 또는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사형까지 시킨 김기춘의 초라한 몰골은 인혁당사건의 유족들의 수십년 동안 가슴속에 쌓인 원한과 분노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 김기춘 초원복집 사건

김기춘은 지난 1992년 12월, 역사적으로 유명한 ‘부산 초원복집 사건’을 많은 국민들은 기억할 것이다.  같은달 18일에 치러질 14대 대통령선거를 사흘 앞둔 15일, 통일국민당 후보 정주영(현대그룹 회장) 진영은 전 법무부장관 김기춘이 12월 11일 부산 대연동의 초원복집에 부산 시장과 지검장, 경찰청장, 안기부 지부장, 기무부대장, 교육감, 상공회의소 회장과 함께 한 자리에서 민주자유당(여당) 후보인 김영삼 당선을 위해 부정선거운동을 구체적으로 모의했다며 ‘녹취록’이 공개됐다. “우리가 남이가!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 우리는 지역감정이 일어나야 돼”

부산시의 행정·정보·교육·경제를 총괄하는 수장에게 김기춘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부추긴 것은 명백한 실정법 위반이지만 민자당과 보수언론은 현행범인 김기춘의 비판보다는 오히려 녹취록을 폭로한 통일국민당을 거세게 공격했다.

공격의 선봉에는 조선일보가 있었다. 신문은 부산 기관장 비밀모임과 녹취록의 실상은 조그맣게 보도하면서 노태우 정권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일부 기관장 4명을 “전격 경질”한 일과 “김영삼 후보 엄중 문책 요청” 등의 내용을 주요 기사로 내보내 집권세력과 조선일보는 비밀모임에서 김영삼 당선을 위한 부정선거 논의보다 그 내용을 도청한 국민당의 “부도덕”을 부각시켰다.

 <구글 이미지 캡처>

이와 같은 지역감정에 불을 집혀 부산·경남은 물론이고 대구·경북에서도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가 급속도로 유행하면서 김영삼 지지 열풍이 거세게 일어났다. 결국 김영삼은 득표율 42.0%(김대중 33.8%, 정주영16.3%)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선이 끝난 후 12월 29일 검찰은 김기춘을 불구속 기소했지만 김기춘은 1993년 3월 “대통령선거법 제36조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을 제청하여 헌재가 1994년 위헌결정 함으로써 김기춘은 미꾸라지처럼 위기를 모면했다.

▲ 김기춘 유신헌법 설계  <구글 이미지 캡처>

김기춘에게 1972년  “출세의 길”이 운명처럼 다가 왔다. 당시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해 “10월 유신”을 위한 영구집권 프로젝트로 “유신헌법”을 설계하는데 33세의 검사 김기춘이 발탁된 것이다. 유신헌법은 일명 “체육관선거”를 이용해 대통령을 선출하고 선출된 대통령은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 및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지명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갖게 함으로써 영구집권과 독재정치를 가능하게 한 악법이었다.

▲ 김기춘의 인생사

이를 계기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된 김기춘은 동기 검사들보다 고속 승진하면서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에 임명되었다. 김기춘이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대공수사국이 1974년에 조작한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최고 사형까지 집행했지만 2000년대의 민주정부 시절에 대법원의 재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 인혁당 사건 재판관경 및 사형자들

김기춘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을 지휘하던 1979년 4월 9일 새벽에 바로 전날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인혁당 사건 피고인 8명을 18시간 만에 교수형을 집행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그 날을 “사법사상 최악의 날”이라고 명명했다.

▲ 권력에서 멀어지는 김기춘

김기춘은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다. 1972년부터 79년까지 7년 동안 박정희를 “주군”으로 섬기던 인연으로 김기춘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자 노구임에도 비서실장으로 등극하여 비선실세인 최순실과 더불어 결국 박근혜의 정치적 파멸을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 이제 남은 인생은 반성과 사죄 뿐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이 있다. 유신의 향수를 잊지 못했던 김기춘은 박근혜의 신유신체제의 부활을 꿈꾸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체 노구를 이끌고 살아서 콩밥을 먹으며 죄값을 치루어야 할 운명의 기로에 섰다.

한편 지난 1987년 11월 29일, 승객 115명을 태운 KAL 858기를 폭파한 김현희는 살인죄, 항공기폭파치사죄, 국가보안법 위반 등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속 기소로 재판받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 김현희는 정권실세들과 기념촬영

김현희는 하루도 수감된 적이 없으며, 죄수복을 입어본 적도 없다. 심지어 전두환에게 옷까지 선물받았고 정권의 실세인 박철언, 강제섭과 기념사진을 촬영했으며 안기부장 박세직의 권유로 침례교에서 세례도 받았다.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이 김현희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불과 보름 후인 4월 12일 노태우 대통령은 김현희를 사면했다. 우리나라 국민 115명을 살해한 테러범은 이처럼 관대하게 사면하면서 김기춘은 죄없는 국민을 국가보안법으로 엮어서 사형이 확정되자 18시간 만에 교수형에 처한 이유에 대해 김기춘이 사이코패스가 아니고 일말의 양심이 존재한다면 분명히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죽은 후에 무죄선고를 받았지만 행위자에게 어떤 처벌이나 책임도 묻지 않았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