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호국보훈의 달에 생각해 보는 계룡산 삼신당!

독립운동으로 일경에 죽임을 당했지만 독립유공자 추서도 안되는 현실?

2017-06-21     충청메시지 조성우 기자

애국지사와 독립군을 쫓아 섬멸한 일본의 앞잡이는 현충원으로!

▲ 일본 앞잡이 김창룡 묘
▲ 애국지사 묘

보훈호국의 달을 맞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를 돌아보았다. 일제강점기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몸바친 순국선열들이다.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은 어떤 분들일까?

일제 강점기 우리국민들은 대부분 가난했기 때문에 배우지 못했다. 그렇지만 국가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받쳤다. 

▲ 대종교 본산 (서대문구 홍은동)

그 중심에는 5천년 역사의 신화인 단군을 모태로 한 대종교라는 민족신앙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종교의 구현목표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 이며, 그 교리는 민족의 정통사상과 철학이 담겨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좌진장군, 이범석 장군, 홍범도장군도 대종교 신도였고 독립군들도 대부분 민족신앙으로 무장한 교인들이었다.

계룡산 신도안에 이와 같은 민족신앙의 성지가 있었다. 1924년 동학의 교단인 시천교 교주 김연국과 황해도 및 평안도의 신도 약 2,000여 명이 비룡승천형이며 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알려진 계룡산 신도안으로 이주했다.

1984년 계룡산 민간인 철거계획(6.20사업)으로 130여 종교단체가 철거되기 전까지 60여 년 간 한국의 민족신앙 및 신흥종교 메카로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던 지역이다.

▲ 80년대 계룡산 삼신당

이 가운데 계룡산 삼신당이 있다. 삼신당 앞에는 암용이 승천한 설화가 전해지는 암용추가 자리한다. 또한 삼신당이 위치한 곳은 태조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한 후 조선을 건국했다는 길지로 전해진다.

▲ 삼신당 - 삼신

삼신당에서 치성을 드리면 복을 받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삼신당은 천(天)·지(地)·인(人) 삼신을 모신다. 중앙에 천신, 왼쪽에 지신, 오른쪽에 인신이 자리한다.

▲ 계룡산 삼신당

삼신당은 정원강이 1925년 설립하여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을 맺고 독립운동을 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기도와 독립운동가의 은신처로 사용되었다. 정원강은 1943년 일경에 체포되어 경북 성주 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으로 사망했다.

그렇지만 해방된 조국은 정선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근거자료가 부족하고, 전장에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추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 박영숙 (94세, 2016. 11. 운명)

이에 정선생의 자부 박영숙씨(94, 2016.11.운명)는 시부(정원강)가 세운 삼신당을 국가의 뜻에 의해 장태산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시부의 독립유공자 추서를 위해 노력했다.

▲ 장태산으로 이주한 삼신당. [정창교(정원강 손자)와 김미경의원]

민초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진실은 반드시 세상에 밝혀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전국을 돌며 기도하며 정성을 드렸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 장태산 삼신당 내부

정선생은 평생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그것이 죄가 되어 일경에 의해 목숨을 잃었지만 정작 대한민국은 이름없는 무속인으로 치부했다. 진짜 이유는 일제청산을 하지 못한 우리나라 역사의 그림자에 가리워진 것은 아닐까?

평생을 간곡하게 기도했지만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노(老) 자부의 바램은 결국 왜곡된 근대사의 단면을 넘지 못했고 국가를 위한 애국심도 이제는 빠르게 외래문화에 잠식되면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를 정복하고 유럽의 일부까지 정복했던 징기스칸도 어느날 갑자기 소멸됐다.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