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배워야 할 것 그리고 배워서 안 될 것

헌법을 통해 본 대한민국의 역사

2022-12-21     김용택 세종본부장
김용택 세종본부장

1차 개헌이 이뤄졌던 1952년 한국전쟁이 채 끝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임시수도인 부산 ‘피난국회’에서 ‘발췌개헌’을, 그리고 6·25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나라에서 국어사전에도 없는 ‘사사오입’ 개헌을 한다.

대한민국 헌법상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정하고 원래 2회까지만 가능했던 대통령 연임 제한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자신에 한해)면제하기 위해서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인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신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제1공화국’ 종신집권…잘못 꿰어진 개헌의 첫 단추>

이승만 정부는 3선 개헌 이후 정치적 자유를 말살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독재정치를 자행하였다. 결국 4번째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1960년 3월 15일의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투표 및 개표 조작 등의 부정을 통해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과 시위대간의 충돌했다. 결국 4월 11일에는 마산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고교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이승만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다.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를 막았지만, 그치지 않았다. 결국 4월 24일에는 이승만이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을 사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그치지 않은데다, 25일에는 대학교수까지 시위에 나서면서, 27일에는 대통령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국회는 개헌과 총선거를 통하여 시국을 수습하기로 결의하고, 5월 2일 허정을 수반으로 한 과도정부를 수립하였다. 국회는 의원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 기초위원을 선임, 국회에서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가결되었다. 이로써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합헌적인 절차를 통한 개헌이 이루어졌다. 3차 개헌 헌법이다.

개헌의 역사는 굴절 많은 한국 정치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총 9차례의 개헌 가운데 현직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 4차례, 쿠테타 이후 정권찬탈을 위한 개헌이 2차례였다. 민의를 반영한 개헌은 4.19 직후 2차례(3,4차 개헌)와 현행 헌법이 만들어진 87년이 전부다. 독재정권이 유린한 대한민국 헌법.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뜻에 따라 바뀌어여 할 헌법이 독재자들의 야망에 따라 휘둘린 헌법은 주권가 당한 폭력이었다.

 

<제3차, 4.19혁명 이후 의원내각제 개헌...‘1960. 6.15.’>

종래의 대통령제에서 완전한 의원내각제로 전환하여 대통령의 지위를 원칙적으로 의례적·형식적 지위에 한정하고, 국회의 양원 합동회의에서 선출된다(제53조). 실질적 행정권은 국무원(내각)에 속하고, 내각수반인 국무총리는 민의원에서 선출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제69조).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과반수는 국회의원이어야 하며, 국회는 내각 불신임권을 갖고, 내각은 민의원 해산권을 갖는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위헌입법의 심사와 기타 헌법사항을 관할하는 헌법재판소를 설치하고, 선거의 공정을 기하기 위하여 중앙선거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를 통해 선출하도록 하였다.

 

<제4차, 반민주행위자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 개헌...‘1960. 11.29일’>

혁명정부는 3·15 부정선거의 주모자와 4·19 혁명의 전후에 군중들을 살상한 관련자를 처벌하기 위해 민의원에는 헌법 부칙에 특별처벌법의 제정 근거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개헌안이 제출되어, 11월 29일 반민주행위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소급입법의 근거가 되는 제4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졌다.

1960년 4월 26일 이전에 반민주행위를 한 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 또한 1960년 4월 26일 이전에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자에 대한 행정·형사상의 처리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을 추가하였다. 이를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제 3,4공화국 ‘5~7차 개헌’>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소장 등 군부 세력들은 헌법을 집권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 개헌작업에 착수한다. 국회가 강제로 해산되고 헌정이 중단된 상태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이 작업을 주도한다. 결국 민의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3차, 4차 개헌은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쿠데타 세력들은 국회가 해산된 상황에서 절차적 하자를 은폐하기 위해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재개정하고 국민투표로 헌법 개정을 결정하는 국민투표법을 제정했다. 계엄령 하인 1962년 11월5일 개헌안을 공고하고 12월 6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결을 거쳐 17일 국민투표에 부쳤고 26일 공포했다. 헌법적 개정 절차와 국민적 토론절차를 무시한 채 쿠데타 세력의 편의에 따라 제3공화국 헌법은 이렇게 ‘위험한 탄생’을 알렸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종신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하고 분노한 주권자들에게 쫒겨난 이승만 정권의 전철을 밟는다. 1차에 한해서만 중임이 허용된 5차 개헌의 조항을 2차까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1969년 6차 개헌이 추진됐다. 한마디로 박대통령의 3선 연임을 위한 개헌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