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칼럼] 가탁왕명(假托王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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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칼럼] 가탁왕명(假托王命)
  • 이정랑의 고전소통
  • 승인 2019.10.1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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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으로 왕명을 빌린다.

왕조 지배 체제 아래에서 황제의 권한은 지존무상(至尊無上)이 었다. 누구든 눈에 들기만 하면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정랑 언론인 (중국고전 연구가)

춘추시대 주(周) 천자는 이미 지난날의 절대적인 권위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제후국들은 패권을 쟁탈하는 과정에서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주 왕실의 영향력을 이용하려 했다. 요컨대 천자가 갖고 있는 명분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주 왕실을 지킨다는 기치를 앞장 세워 자신의 패업을 달성하려 했다.

정나라 장공(莊公)은 송을 징벌하고 싶었지만 송은 나라도 크고 그 지위도 높은지라, 주 천자의 명의를 빌리고 제후국들의 지지를 얻어야 했다. 이에 장공은 제족(祭足)을 데리고 주 천자를 조회하여 주 천자가 정나라를 신임한다는 인상을 심으려 했다.

주 환왕(桓王)은 장공을 싫어하던 차라 일부러 장공을 골탕 먹이려 연회도 베풀어 주지 않았고 수레 열 대 분량의 기장쌀만 보내 가뭄 때 쓰라고 했다. 환왕의 냉대를 받은 장공은 괜히 왔다며 후회했다.

그러자 동행했던 제족이 주 천자로부터 받은 수레 열 대 분량의 기장쌀에 ‘천자의 은총’이라는 글을 짓고, 기장쌀을 싫은 수레들을 비단으로 덮어 마치 보물인 양 꾸며 주나라 성도(成都)를 떠날 때 천자가 내려주신 것이라 선전하면서 “송나라는 오랫동안 조공도 바치지 않고 있으니 내가 친히 천자의 명을 받아 병사를 이끌고 송을 정벌하리라!”며 허풍을 떨라고 권했다. 사람들은 모두 진짜로 믿었다.

이 소식이 송나라에 전해지자 송나라 상공(殤公)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정나라와 강화를 맺으려 했다. 그러나 장공은 이에 응하지 않는 한편, 천자의 이름으로 제나라와 노나라에 명하여 정이 송을 정벌하는 데 동참하라고 했다. 장공은 삼국 연합군을 이끌고 ‘천자를 받들어 죄를 다스린다’는 기치 아래 송을 정벌하여, 파죽지세로 고(郜)와 방(防) 두 성을 취했다.

정나라 장공은 천자의 명을 빌어 송나라를 정벌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하여 정나라는 춘추 초기에 가장 강성한 제후국이 되었다. 이후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 등이 패업을 이루는 과정에서도 ‘주를 떠받드는’ ‘존주(尊周)’의 기치를 버리지 않았다.

이 책략은 끊임없이 발전했다. 예를 들어 진 문공의 ‘존왕양이(尊王攘夷)’와 동한 말기 조조의 ‘천자를 끼고 제후를 명령한다’는 ‘협천자이령제후(挾天子以令諸侯)’도 이 책략을 발전적으로 운용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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