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혼이 서린 부소산성 문화산책
상태바
백제의 혼이 서린 부소산성 문화산책
  • 충청메시지 조성우
  • 승인 2019.10.14 1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여의 부소산(扶蘇山)은 소나무를 의미하는 ‘풋소’가 한자 표기로 ‘부소’로 썼으며 백제시대 소나무가 많다는 의미로 ‘솔뫼’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해발 106미터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백제의 도성을 방어했고 패망과 함께 궁녀들이 몸을 던진 낙화암 등 역사적 장소로 2015년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백마강과 황포돛배

부소산을 휘감아 도는 백마강은 전북 장수의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금강하구까지 401㎞의 흐르는 금강으로 백제의 큰 강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538년 왕도를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래 660년 마지막 의자왕까지 123년 동안 백제문화는 이곳 부여에서 꽃피웠다. 아직 정확한 왕궁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관북리 일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소산 전경

부소산성(국가사적 제5호)은 백제시대 도성을 방어하는 핵심시설로 군창지와 사자루의 산봉우리를 머리띠 두르듯 쌓은 테뫼식 산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포곡식 산성만 백제시대 것이고 테뫼식 산성은 통일신라시대 축조되었다.

또 산성에는 영일루, 군창터, 반월루, 사자루, 낙화암, 고란사, 삼충사, 궁녀사 등 백제의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는 사적지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삼충사

부소산 초입에 삼충사(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5호)가 있다. 백제의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당시 백제 충신 성충과 흥수는 “당군(수군)이 기벌포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고, 신라군은 탄현(식장산 고개)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묵살됐다.

계백 장군은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전투에서 5만의 김유신 군사와 4승을 거뒀지만 중과부족으로 결국 패했다. 백제문화제 때 삼충제와 충혼제가 봉행된다.

전설에는 부소산 동쪽 산정에는 백제왕이 계룡산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영일대가 있었고, 서쪽 산정에는 달맞이를 즐기던 송월대(현재 사자루)가 있었다고 한다.

영일루

영일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는 백제의 왕과 귀족들이 해를 맞이하며 하루 일과를 계획하던 곳이다. 

현판 글씨 영(迎)자와 루(樓)자는 크게 쓰고 가운데 일(日)자는 작게 써서 산봉우리 사이에 해가 떠 있는 모습을 나타냈다고 한다. 조선시대 홍산현 관아문루를 1964년에 이곳으로 옮겨 영일루라 하였다.

사자루(또는 사비루 /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99호)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서쪽 봉우리 정상에 자리한 누각으로 이곳은 백제왕이 달맞이를 즐기던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1824)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기고 사비루라 칭했다.

석가여래삼존입상(보물 제196호)

1919년 사비루 공사 중 이곳에서 “정지원이라는 사람이 죽은 아내를 위해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저승길을 잘 가게 했다”는 내용이 새겨진 백제시대 금동 석가여래삼존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되었다.

군창지

군창터(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09호)는 백제의 군량미를 비축했던 창고터로 부소산성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1915년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반월루

반월루는 1972년 부소산성의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이 만나는 부소산 남쪽 산등성이에 건축한 2층 누각으로 백마강과 부여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다.

백제 왕자들의 산책로인 태자골 숲길로 들어서면 삼천궁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궁녀사가 있다. 10월 백제문화제 때 궁녀제가 봉행한다.

낙화암

낙화암(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0)은 부소산 북쪽 백마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 절벽이다. 사비성이 함락될 때 3천 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백화정

낙화암에는 1929년에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건립되었으며, 낙화암에서 후궁들의 자살했다는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인데, 다음과 같다.

[百濟古記云『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知其未免, 相謂曰“寧自盡, 不死於他人手.”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백제고기(百濟古記)》에 말하였다.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어 그 아래로 강물에 임하였는데 서로 전하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진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 이끌고 강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하므로 세상에서는 타사암(墮死岩)이라고 부른다." 이는 속설의 와전이다.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겠지만, 의자왕이 당에서 죽었다 함은 당사(唐史)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출처 위키백과>

위 삼국유사 기록에 후궁의 숫자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한 의자왕은 포로로 낙양으로 압송되어 병사했으며 낙양의 북망산에 묻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삼천 궁녀라는 단어는 윤승한의 소설 『김유신』(1941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삼천 궁녀에 대한 최초 기록은 이홍직(李弘稙)이 만든 『국사대사전』(1962년)의 "낙화암" 에 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사비성 인구가 5만 명 정도였다는 기록을 보면 삼천 궁녀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스토리텔링이다.

백화정(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08호)은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낙화암 정상 바위에 세운 육각정자이다. 백제 멸망 당시 낙화암에서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궁녀들의 원혼을 기리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로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시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란사

고란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는 부소산의 낙화암 아래 백마강변에 백제 말기에 창건된 절이다. 

법당인 극락보전 옆에는 종탑과 삼성각이 있고 뒤에는 고란약수와 고란초가 있다. 고란초는 상록다년초로 회귀식물이며 절 이름도 고란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란사 극락보전에 모셔진 부처님

낙화암의 설화를 품은 고란사 법당의 부처님도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바라보고 있다. 부처님도 백마강 탄식을 알고 계실까?

♪ 꿈꾸는 백마강 ♬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두둥실
낙화암 그늘 아래 울어나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모치는 듯
구곡간장오로리 찢어지는 듯
그 누구가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낙화암 달빛만 옛날같구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