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선재, 죽음까지 함께 한 효열(孝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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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선재, 죽음까지 함께 한 효열(孝烈)
  • 충청메시지 조성우 기자
  • 승인 2017.06.12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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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문원공파 염선재 종중을 만나다.
▲ 염선재 (충남도 문화재자료 제316호) 

광산김씨 문원공파 염선재 종중(이하 종중)의 어르신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 순천김씨 묘 진입로

e편한세상아파트를 건설하며 김씨부인의 묘 앞을 절개하여 접근로가 불편했지만 이제는 침목으로 계단을 설치하는 등 묘의 진입로를 새롭게 단장했다.

▲ 종중 어르신들과 종손 김정순

오늘은 종중 어르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김씨부인 묘를 돌아보고 간단한 제를 올렸다. 함께 모인 어르신들 평균 나이가 80세 초반이지만 김정순(58세)씨가 종손으로 제일 먼저 술잔을 올린다. 사실상 종중의 어른이다.

▲ 종중회의

오늘 종중에 참여한 23분의 어르신들이 대부분 70대 이상이다. 김씨부인의 묘에서 참배를 마친 종중 어르신들이 염선재에서 회의를 했다.

매년 음력 12월 9일 새벽 3시에 염선재에서 김씨 부인의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종중 어르신들은 걱정이다. 젊은 후손들의 참여가 저조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화에 부응하는 지혜가 있어야 종중의 문화를 계승할 수 있다. 

좀더 많은 후손들의 참여를 위해 김씨부인 제사를 새벽 3시에서 11시로 변경하자는 의제가 상정됐다. 일부 어르신들은 반대했지만 결국 결정되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문화도 변화를 모색한다. 

◈ 염선재, 김씨부인은 어떤분인가?

단종대에 좌의정을 역임한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 )의 7대 손녀다. 단종을 지키다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에 반역의 누명을 쓰고 직계 3대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다행히 일점혈육이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구해 신분을 감추고 음지에서 살았다. 염선재 순천김씨 친정의 가계도다.

▲ 사계고택 (은농재)

17세가 되었을 때 염선재는 사계 김장생의 계배(繼配)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사계의 첫 부인 조씨의 3년상을 끝낸 시기다. 염선재는 절재 김종서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명문대가인 사계 가문으로 시집을 왔다.

2년 후 장자 영(榮)이 태어나자 염선재는 자신의 신분을 사계에게 고백했고, 사계는 부인의 비원을 이해했다. 

당시에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사고가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로, 사계는 끝내 조정에 그 뜻을 상주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자, 김씨부인은 이를 한탄하며 3년상을 마친 후, 단식으로 자진(自盡)하여 사계의 뒤를 따랐다.

이는 단순히 부군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멸문지화를 당한 절재 김종서의 신원(伸寃)이 이뤄지지 못함을 한탄하여 스스로 효열(孝烈)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 순천김씨 정부인 교지

그에게 광무 십년(1906년) 4월 18일 정부인 순천김씨라는 칙명의 교지가 내려졌다.

▲ 정려각과 정려비

그가 살던 두계에 정려비와 정려각이 세워졌고 1882년(고종 19년) 염선재라는 재실과 잠소사라는 김씨 부인의 위패가 안치된 사당이 세워져 후손들의 향사가 이어졌다.

▲ 잠소사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순천김씨의 생애는 조선시대의 비정한 정치사가 담겨 있고, 조작된 역적의 후손으로 살아야 했던 몰락한 가문의 한 여성의 한(恨)과 설원(雪寃)의 염원을 담고 있다.

▲ 염선재

염선재는 원래 작은 규모의 제각이었으나 1913년 현재의 건물로 증축되었다. 1990년 9월 2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1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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