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칼럼] 가치부전(假痴不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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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랑 칼럼] 가치부전(假痴不癲)
  • 이정랑의 고전탐구
  • 승인 2019.07.08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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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척하되 미치지는 마라

이정랑 언론인 (중국고전 연구가)

‘치(痴)’란 어리석고 멍청한 것을 말하고, ‘전(癲)’은 정신착란을 말한다. 거짓으로 어리석고 멍청한 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 착란이나 미친 것은 물론 아니다. 그 목적은 형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내심에 품고 있는 정치포부를 숨기기 위해 겉으로 멍청하고 어리석게 보여 아무 일도 못 할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정적의 경계의 눈길을 피하는 것이다.

‘36계’ 제27계에서는 이 계략을 풀이하여 “거짓으로 모르는 채, 못 하는 체하는 것이 낫지, 모르면서도 아는 척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침착하게 본색을 드러내지 않음이 마치 겨울철에 천둥 번개가 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권모술수는 흔히 물러섰다가 나아가며, 뒤에 출발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후발제인(後發制人)’으로 표현된다.

1805년, 나폴레옹은 제4차 동맹군과 전투를 벌여 그 승세를 타고 러시아 군을 추격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는 근위군과 후원 부대가 이미 전열을 정비했다고 판단, 프랑스 군과 결전을 벌이고자 했다. 그러나 전략적 안목이 깊은 쿠투조프는 다른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는 현재 러시아 군 전체가 전멸할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신속히 그리고 계속 퇴각하면서 결전을 피하고, 전투 국면을 지구전으로 끌어 프러시아 군대를 기다렸다가 최후로 대불 전쟁에 투입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군 사령부 내부에 두 가지 의견이 제기되어 서로 갈라지고 있음을 알았다. 나폴레옹은 쿠투조프가 알렉산드르 황제를 설득할까봐 내심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전투의 기회를 상실함은 물론 불리한 장기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전군에게 추격을 즉시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깊숙이 침투시켰던 전초 부대도 철수시켰다.

그러고는 상대에게 전투를 중지하고 강화하자며 즉시 대표를 보내 러시아와 담판을 지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을 마치 무능하고 결전을 꺼리는 연약한 인물인 것처럼 꾸몄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는 이에 자신감을 굳혔다. 프랑스 군은 유리한 전기를 이미 놓쳤다.

나폴레옹처럼 오만한 인물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몰린 것이 아니라면 자청해서 강화를 요구할 리 만무하다. 이렇게 판단한 알렉산드르는 쿠투조프의 의견을 묵살하고 프랑스 군과 결전을 치르고 말았다. 그 결과 나폴레옹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어 ‘낙화유수(落花流水)’ 꼴이 되고 말았다.

계책은 지혜에서 나온다. 치밀하면 성공하고 자신을 노출시키면 패한다. 현명한 지휘자는 자신의 의도를 감추기 위해 흔히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뭇 사람들의 이목을 흐리게 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고 총명함을 멍청함으로 가장하는 것이, 하지도 못하면서 할 수 있는 척, 멍청하면서도 영리한 척하는 것보다는 백 번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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