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의 제7경 옥녀봉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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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의 제7경 옥녀봉을 가다.
  • 조성우 기자
  • 승인 2017.03.3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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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포구(금강둔치)

강경포구는 원산포구와 함께 전국 2대포구로 이름을 올릴만큼 해상 유통이 활발했던 관문이었고 강경장은 평양장, 대구장과 함께 조선후기 3대시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곳이다. 

▲ 죽림서원(문화재자료 제75호)

돌산전망대 옆에는 죽림서원(문화재자료 제75호)이 자리하고 있다. 서원은 유현(유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선비)을 제사 지내는 사(祠)와 양반의 자제를 교육하는 재(齋)로 구성된 사설 교육기관이다. 

▲ 죽림서원

이 서원은 인조 4년(1626) 창건 당시에는 지명에 따라 황산서원이라 하였으나 현종 5년(1665)에 죽림서원으로 사액(賜額)받았다. 이 후 고종 8년(1871)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으나 1964년 다시 제단을 설치하였고 1965년에는 사우(祠宇)를 복원하였다. 

제향 인물은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등 6인을 제향하였는데 이들 모두가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유현(儒賢)이어서 육현서원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 임리정(유형문화재 제67호)

죽림서원에서 대나무 숲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임리정(유형문화재 제67호)이 자리하고 있다. 1626년(인조 4년)에 사계 김장생(1548~1631)선생이 건립한 건물로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원래는 황산정(黃山亭)이라 하였으나 임리정기비(臨履亭記碑)에 의하면 시경의 “전전긍긍(戰戰兢兢) 여임심연(如臨深淵) 여리박빙(如履복薄氷)”[두려워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하는 것같이 하며, 엷은 얼음을 밟는 것 같이 하라]이라는 구절에서 임리정이라 하였다 한다.

즉 항상 자기의 처신과 행동거지에 신중을 기하라는 증자의 글에서 나온 말이며 이처럼 몸가짐을 두려워하고 조심하라는 선인들의 뜻이다.

▲ 임리정기비

앞마당에 있는 임리정기비(臨履亭記碑)는 김상현이 이 글을 짓고 김영목이 써서 1875년(고종12년)에 세운 것이다.

▲ 돌산전망대

강경시내가 한눈에 볼 수 있는 황산근린공원 돌산에 올랐다. 돌산전망대 주변은, 문화의 거리, 죽림서원, 임리정, 분수공원과 박범신문학비, 시민들의 산책로, 소공원과 운동시설, 그리고 팔괘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 하얀 목련꽃

화창한 봄날씨에 꽃망울을 터트린 하얀 목련의 그윽한 향기는 이곳을 찾는 분들을 매료시키에 충분했다.

분수공원과 범범신문학비가 있고 정상에 등대와 비슷한 강경 돌산전망대가 있으며 이 돌산전망대를 지나 뒤로 내려가면 이리 저리 소공원과 운동시설을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전망대 바로 아래에는 조선 인조때 학문을 닦고 연구하기 위해 우암 송시열이 세운 정자인 팔괘정이 있다

▲ 팔괘정(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전망대 남쪽에 위치한 팔괘정(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은 조선 인조때 우암 송시열이 세운 건물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제자들에게 강학(講學 )하던 곳이다. 

송시열은 스승인 김장생선생이 임리정을 건립하고 강학을 시작하자 스승과 가까이 있고 싶어하는 제장의 마음에 임리정에서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팔괘정을 건립하게 되었다 한다. 

▲ 박범신 문학비

도로변 황산의 절벽에 분수공원을 조성해 놓았으며 이 분수 바로 옆에 박범신문학비가 있다.

박범신 문학비에는 “아 금강! 백제의 고도 공주 부여를 지나온 황톳물이 성동벌판의 끄트머리를 낮은 포복으로 쓸고 내려와 ㄹ자(字)로 휘돌며 이득고 강경포구를 자애롭게 쓰다듬는다. 강물은 여한이 없다. 

질펀한 갈대밭을 좌우로 거느린 채 나바우성당 솔숲을 건드릴 듯 흘러가고 말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광활한 성동벌판도 그곳에선 손금처럼 내려다보인다. 일찍이 동학군 십만명이 파죽지세 우금치로 나아가기 전 진을 쳤었다는 벌판을 한눈에 품어 안으면 가슴에선 사뭇 모닥불이 타오른다. 

강과 벌판은 잘 어우러져 가름없이 한통속이다. 운무속으로 쑥 물러앉아 멀리 계룡산서 기와 합장한 아트막한 산들의 연접도 보기좋다. 갈대밭에서 날아오른 새떼들이 연방 옥녀봉과 돌산꼭대기를 차고 넘는다. 안개낀 날의 새벽강은 더욱 웅숭깊고 찰지다. <장편소설 (더러운책상) 일부를 작가 박범신이 직접쓰다>

박범신의 문학비와 분수대 사이로 나있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을 타고 오르면 금강과 강경읍내를 조망할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 돌산에서 바라본 옥녀봉

이곳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강의 비경은 한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고 절경이다. 눈앞에 군함모양의 강경젓갈전시관과 옥녀봉이 다가온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경읍내
▲ 옥녀봉

【옥녀봉 유래】 옛날에는 이 산 아래로 강물이 어찌나 맑았던지 고기가 노는것도 보였고 조약돌이 손에 잡힐 듯 했으며 산은 숲으로 우거져 있는데다 넓은 들판으로 그 경치가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래서 하늘나라 선녀들이 무리지어 달 밝은 보름 무렵 밤에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이곳에 내려와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목욕을 하고 놀다 올라가는 것을 더 없이 영광으로 알고 자랑을 하였으니 이 절경을 옥황상제의 딸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해 팔월 보름날 옥황상제의 딸도 많은 선녀들과 이곳에 내려와 물속에 몸을 담그고 앉아서 놀며 휘영청 밝은 달빛이 어찌나 밝은지 참으로 별천지 같은 절경에 심취되어 올라갈 시간조차 잊고 있었다. 

한편 하늘나라 옥황상제는 어찌하여 딸과 선녀들이 시간이 되었는데 올라오지 않느냐? 어서 올라오도록 나팔을 불어라 명하였다. 

나팔소리를 듣고 선녀들과 옥황상제의 딸은 시간이 없어 서둘러 오을 입다가 한쪽 가슴을 내보인채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있었으니 이를 본 옥황상제는 "여봐라 저기 가슴을 내놓고 올라오는 자가 누구냐? 당장 저자를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영원히 그 땅에서 살도록 떨어뜨려라" 하며 노 하였다. 

그 후 그녀는 하늘에 올라 가지도 못하고 이 땅에 살면서 이름을 옥녀라 하였다. 옥녀는 매일 아침이 되면 산위에 올라와서 용서를 빌고 하늘나라에 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산위에 올라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옥녀 앞에 거울이 하나 떨어졌다. 그 거울속에는 그렇게도 그리던 하늘나라 궁궐과 옥황상제의 모습도 보이고 옥녀를 아끼던 시녀들이 아래를 내려다 보며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신하들이 옥황상제에게 자기를 구해 줄 것을 아뢰다가 호통을 당하는 모습도 보였다. 

옥녀는 아침마다 산에올라 기도를 드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지만 끝내 하늘나라에 오르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고 말았다. 

지금도 이 산 위에는 그녀가 하늘나라의 부름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봉우리 위의 동그랗게 몸처럼 봉우리 진 곳이 있는데 이 곳을 후세 사람들은 옥녀가 죽은 자리라 하여 옥녀봉이라 부르게 되었다하며 그 녀가 들여다 보던 거울은 바위로 변하여 용영대(龍影臺)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를 영원히 전하고져 이 유래비를 세운다.

이처럼 옥녀봉은 하늘의 선녀기 반할정도로 빼어난 절경임을 전설을 통해 알 수 있다.

▲ 옥녀봉 봉수대

옥녀봉의 옛 이름은 강경산이다. 금강물이 감돌아 흐르는 강 언덕에 자리한 강경산은 예로부터 풍치가 아름다웠고 그 산정에는 수운정(垂雲亭)이라 부르는 정자와 함께 봉수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봉수(熢燧)란 높은 산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나라에 큰 일이 날 때마다 밤에는 봉(햇불), 낮네는 수(연기)를 피워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방법이다. 

▲ 강경 항일 만세운동 기념비

1919년 3월 10일 강경읍 장날을 이용하여 약 500여명의 군중들이 강경 옥녀봉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하산하여 일본인이 거주하는 본정통(홍교리 일대)을 경유 시장을 일주하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렸다. 

1919년 3월 20일 제2차 만세운동이 강경 옥녀봉에서 또 전개되었으며 시장을 경유할 때 군중과 장꾼들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이 1천여명이나 되었다.

이와 같이 강경에서 1, 2차 독립만세운동의 시발점이 옥녀봉 산정에 강경항일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5년 논산군에서 이 비를 건립하여 후세에 그 뜻을 전하고 있다.

▲ 안순득여사 추모비

여기 나라사랑의 순국여성 안여사의 행적을 후세에 전한다. 1908년 1월 4일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였으며 1925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동 27년 경성보육학교를 나와 이 나라 보육사업에 전념하였다. 

8.15해방 전후를 통하여 애국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대한부인회 강경지회장으로 교회의 속장으로 심혈을 경주하다가 6.25 민족수난 때 공산군에 붙들려 죽엄직전까지 민주대한의 긍지와 여성본연의 정기를 발휘하여 유유히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했다. 

자신의 자신의 최후를 하나님께 부탁하고 저들의 죄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무자비한 일곱발의 총탄에 쓰러지고야만 안여사의 장엄한 죽업은 이 땅 온겨레에 길이 남기고 싶은 순국여성의 휘황찬 증표, 여기에 다음 동지들이 성심을 모두어 여기 돌비에 표식하여 두노라.

<1974년 12월 24일>

▲ 기독교 한국침례회 최초 교회

이곳은 1897년 미국선교사 폴링이 <강경침례교회>를 설립한 곳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다. 이 교회는 한강 이남에 지여진 최초의 ‘ㄱ’자 교회로써 당시 남녀칠세부동석, 남녀유별이 엄격한 유교전통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1906년 펜윅 선교사는 이곳에서 전국 31개 회회를 모아 침례회 최초 총회를 열었으며 당시 개설한 성경학교는 현재 대전에 소재한 <침례신학대학>으로 발전하였다. 3.1운동(1919년) 이후, 일제는 우리민족 말살정책과 항일사상의 근거지를 없애려는 의도로 전국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교회는 일제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증여형식으로 부지와 교회를 일제에 넘겼다. 일제는 1943년 교회를 폐교 방화하고 신사당부지로 사용했다. 현재 침례교회 전국총회에서 이 곳의 가옥화 터를 “침례교단 사적지”로 지정했다.

▲ 옥녀봉의 일몰

강경산(옥녀봉)

  

              나익(那益) 서우선 

  

옛 승운정(乘雲亭)자리에 오르니

구름타고 누리를 내려다 보는 듯

풍광이 한눈을 확메운다.

  

산 아래 새 나루

굽이쳐 흐르는 경관(景觀)

손에 잡힐 듯 아름다우며

  

저 멀리 고군산 열도까지 

아득히 멀어져 가는 강변에 

채색한 구름 비단강 돋 보이여

창조(漲潮)의 운동이 낳은

흙빛 곱고 수려(秀麗)한 채운들

씨뿌리고 거두는 삶이 좋아

  

승천(昇天)의 나팔소리 뒤로하고

용영대(龍影臺) 바위 머무른 

선녀의 전설 또한 곱고

  

길섶 꽃들 흙내음 보듬고 

어둠을 지우는 속살로

옥녀 웃는 선경(仙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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