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안 칼럼] 이승만 기념관 짓겠다는 윤 정권의 의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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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안 칼럼] 이승만 기념관 짓겠다는 윤 정권의 의도는?
  • 유영안 서울의소리 논설위원
  • 승인 2023.04.20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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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소리

윤석열 정권의 굴욕적인 친일외교와 미국 CIA의 한국 안보실 도청 사건으로 국정 지지율이 27%(갤럽)로 폭락한 가운데, 보훈처가 500억을 들여 이승만 기념관을 짓겠다고 하자 “역시 친일 매국노 후예들답다.”라는 비난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윤석열 정권이 보훈처를 보훈부로 승격한 것은 긍정적이나, 보훈부의 첫 작업이 이승만 기념관 짓기라니 기가 막힌다. 이승만 기념관은 크든 작든 이미 여러 곳에 있는데다가, 이승만이 과연 500억을 들여 기념관을 지을 만큼 훌륭한 인물인가에 대해선 논란이 많기 때문이다.

 

이승만 기념관을 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

수구들은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정착하게 한 국부로 칭송하지만 어불성설이다. 이승만은 당시 미국에서 유학한 후 박사 학위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인 것은 맞지만, 그가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킨 국부란 말은 인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제주 4.3 항쟁에서 무고한 양민 대거 학살한 이승만 정권

거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여순반란’이라고 했지만, 이 사건은 제주 4.3을 진압하라는 상부 명령을 어겨 벌어진 사건이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는데, 그때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제주도민 6명이 죽었다. 이게 시발점이 되어 4.3 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승만 정권과 미국은 제주도에 북한에서 내려온 개신교 집단인 ‘서북청년단’을 보내 무자비하게 양민을 학살하게 했다. 당시 제주도민이 30만 명 정도 되었는데, 그 10%인 약 3만 명이 이승만의 일당의 만행에 죽었다.

그때 양만 학살에 동원된 세력이 서북청년단인데, 광복 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종교를 탄압하자 남쪽으로 내려온 자들이다. 이들은 이승만의 개가 되어 그 후 각종 만행에 참여했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 대형교회의 모태가 되었고, 집회 때마다 태극기를 흔든 이른바 ‘태극기 부대’다.

제주 4.3 항쟁은 1947년에 시작되어 6.25 전쟁이 끝난 후 즉 1957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제주도에서 옳은 말을 한 사람들은 씨가 마를 정도도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길달삼 등 일부 남로당이 개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발단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 반대였다.

 

(2) 반민특위 방해하고 결국 해체시킨 이승만

이승만 세력은 광복 후 설치된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위원회(반민특위)’를 방해하고 결국 해체했다. 일제에 부역한 매국노들을 처벌해야 할 반민특위가 이승만과 그를 주총하는 세력에 의해 탄압받다가 결국 해체된 것은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이다. 그 후예들이 지금 설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독립군을 때려잡던 노덕술 같은 친일 경찰이 살아나 의열단의 김원봉 장군 뺨을 때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 일로 김원봉을 북한으로 가 간부 생활을 하다가 숙청되어 어디에서 어떻게 죽은지 아무도 모른다. 영화 ‘암살’에서 배우 조승우가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하는 대사로 비로소 남한에도 김원봉이 알려진 것이다. 당시 백범 김구보다 현상금이 높을 정도로 김원봉은 일본에겐 무서운 존재였다.

 

(3) 민족 지도자 여운형, 김구 암살한 이승만 세력

그것도 모자라 이승만 세력은 민족 지도자 몽양 여운형을 암살하고, 백범 김구까지 암살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구 암살엔 미국 CIA가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CIA가 지금도 한국 안보실을 도청하고 있다. 인구 5000만 명 이상, 개인소득 3만 불 이상인 나라에서 전쟁이 나도 작전권이 없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여운형과 김구를 살려두어선 정권 유지가 곤란하다고 판단한 이승만 세력은 미국의 지시로 여운형과 김구를 암살한 것이다. 대신 이승만은 경찰, 군 간부 약 80%를 친일 매국노로 채웠다. 독립군을 때려잡던 간도 특설대 출신인 박정희, 백선엽이 나중에 반공투사로 변한 것 자체가 모순이다.

 

(4) 6.25때 한강 다리 폭파하고 대전으로 도망간 이승만

혹자는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애국자라고 칭송하지만 6.25가 발발하자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방송하고 자신은 대전으로 도망간 사건은 유명하다. 

이승만은 전쟁 와중에도 부산 파동을 일으켜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을 해 자신의 장기 집권의 토대를 닦았다.

 

(5) 3.15 부정선거로 4.19 촉발 하와이로 망명

주지하다시피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로 4.19가 일어나자 하야하고 화와이로 도망간 사람이다. 혹자는 이승만이 부정선거엔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건 마치 전두환이 광주5.18과 무관하다는 말과 같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부통령 이시영을 당선시키기 위해 투표함 바꿔치기, 야당 참관인 쫓아내기, 3~5인조 투표, 각종 금품 제공 등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대학생, 중고생은 물론 시민들까지 모두 거리로 나서자 이승만 정권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포했다.

이 시위에 참여했던 김주열군(16)의 시신이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두에서 발견돼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979년에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게 우연이 아니다. 대구도 원래는 민주화의 도시였는데, 박정희가 집권 한 후 보수 도시로 변해버렸다.

이승만의 과거가 이러한데, 그런 이승만의 기념관을 짓겠다는 윤석열 정권의 의도가 뭘까? 바로 보수 결집이다. 최근 합리적 보수층마저 떠나 국정 지지율이 27%로 폭락하자 이승만 카드를 꺼낸 것이다.

 

이승만 팔아 보수 결집?

지난 3.1절 기념식에서 뒷배경으로 여러 독립 운동가들의 사진이 나왔는데, 거기 이승만이 보이지 않자 윤석열이 대노했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보훈처를 보훈부로 승격하고 이승만 기념관을 지으라고 지시한 모양이지만, 그런다고 이미 떠난 합리적 보수층이 돌아올까?

뭐라 변명해도 윤석열의 친일 행각은 용서되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는 내년 총선으로 나타날 것이다. 출범한 지 일 년도 안 되어 경제파탄, 외교파탄, 안보파탄을 일으킨 정권은 윤석열이 유일하다.

국민들과 기업들은 고물가, 고금리, 무역수지 적자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측근들을 부산 횟집으로 불러 술이나 처마시고 사는 족속들은 마땅히 척결되어야 한다. 그들이 바로 ‘가자 독립운동가’ 이승만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을 때도 외교를 한답시고 동포들이 모아준 독립자금을 향락을 즐기는 데 사용했다. 그런 자가 국부라니 기가 막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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