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노 칼럼] ‘이념, 분단’과 육탄전을 벌인 세기의 프로레슬러들, 역도산과 이노키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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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노 칼럼] ‘이념, 분단’과 육탄전을 벌인 세기의 프로레슬러들, 역도산과 이노키의 재발견
  • 이흥노 재미동포
  • 승인 2023.01.25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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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노 재미동포
이흥노 재미동포

우리 민족이 낳은 영웅 역도산

우리 민족이 낳은 세기의 프로 레슬러 역도산과 전설의 일본 프로 레슬러 이노키는 우리 민족과 뗄 수 없는 인물들이다. 함남 출신인 역도산(본명 김신락, 24년생)은 군민 씨름대회 (1938년)에서 14살 나이에 3등을 했다.

일본으로 진출의 길이 열려 1940년 16살의 김신락은 청운의 꿈을 안고 현해탄을 건넜다. 즉시 스모에 전력투구해 빠른 속도로 두각을 나타내고 정상급에 올라갔다. 십여 년의 선수 생활을 접고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1951년, 역도산이 미국을 방문하고 미 프로레슬링계를 돌아봤다.

미국 진출의 꿈을 꾼다. 무슨 새로운 기법을 선보여야 관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불철주야 새 기법 개발에 몰두한다. 탁월한 운동신경의 역도산은 마침내 스모와 가라데의 특기를 접목한 ‘카라데 촙’을 개발한다.

후일 이 기법은 널리 애용되고 있다. 도미 준비를 끝낸 그는 52년 하와이에 터를 잡는다. 미 본토를 오가며 1년 동안 무려 200회 이상 출전해 대부분 승리를 거둔다. 역도산은 자신의 새로운 작품인 ‘가라데 촙’을 아낌없이 날려서 관중들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역도산이 상대 백인 코쟁이의 가슴팍을 내려치면 동포들은 미칠 정도로 환호성을 질렀고 지구촌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며 탄복한다. 미국 전역을 휩쓸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역도산은 미국 레슬링 협회(NWA)의 전권을 위임받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후배 양성과 스포츠 개발 사업에 뛰어들어 돌풍을 일으키고 승승장구한다. 사상 처음 일본에 프로레슬링 도장을 열고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를 결성한다. 일본 최초 프로레슬링 시합을 개최하고 1954년 국제 레슬링 시합까지 벌인다. 이젠 부동의 큰 스포츠 사업가다. 

 

역도산의 꿈, 한반도 평화, 북일 수교

역도산은 돈, 명예, 권력, 등 모든 걸 다 가졌지만 붙어 다니는 이념과 분단, 인종차별이라는 검은 그림자와 싸워야 했다. 역도산이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수제자 이노키였다.

그는 역도산의 꿈을 실현하는 데에 여생을 깡그리 바친 충실한 제자다. 역도산의 ‘꿈을 실현키 위한 정치 참여’ 불가피론에 크게 공감한 이노키는 역도산의 정계 진출 계획에 깊숙이 참여한다. 정계 진출 직전에 역도산은 일본 우익 깡패가 휘두른 칼에 맞아 1963년 아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왼쪽이 이노키, 오른쪽이 역도산 
▲ 왼쪽이 이노키, 오른쪽이 역도산 

하지만 그의 꿈은 고스란히 수제자 이노키의 몫으로 이어진다. 역도산의 정계 투신 결심 배경에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4.19혁명’과 군사쿠데타라는 게 설득력이 있다.

합법적인 민주 정권이 붕괴하고 통일의 목소리가 군사쿠데타의 군홧발에 처절하게 짓밟히는 비극을 지켜봤다. 일본 천황에게 “사쿠라와 같이 산화하겠다”라고 맹세한 일본 육사 장교 출신 박정희가 군사쿠데타에 성공했다고 기뻐하는 일본 태도에 역도산은 정말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실망과 분노를 추스르고 뭔가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을 것이다. 그것이 정계에 뛰어들 것을 부추겼을 걸로 보인다. 1963년 초, 한일 스포츠 교류 명목으로 방한한 역도산은 운동과는 무관한 판문점을 찾았다. 매우 추운 겨울이다. 거기서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이 코쟁이 헌병일 것이다.

“이게 뉘 땅인데, 코쟁이가!”라는 생각이 불같은 성격의 역도산을 미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남북의 대치점에서 첫인상을 완전히 잡친 역도산은 코쟁이와 한판 육탄전이라도 벌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즉시 외투와 웃통을 벗어 던지고 쏜살같이 비무장지대를 달렸다. 한참 동안 달리더니 멈춰 섰다. 

역도산은 북녘을 향해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주위 경비병과 일행들이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지척 북녘 고향을 그리면서 연로한 어머니와 형님을 목메어 불러봤을 것이라는 게 후문이다.

거기서 조국을 잊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의도 다졌을 것이다. 1961년에 귀국선 만경봉호를 타고 일본에 온 친딸 김영숙과 니가타항에서 상봉했다. 그는 고향을 떠난 후 두 번이나 고향을 방문했지만, 해방 후에는 한 번도 찾질 않았다. 정치적 이유였을 것이다. 

역도산은 1962년 김일성 주석의 생신 선물로 고급 벤츠 차를 보낸 바 있고, 60년대 초에 거금을 조국에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이런 일련의 활동과 정계 진출 구상은 군사 정변에 따른 한반도 상황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역도산의 수제자 이노키는 다섯 살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그의 사업까지 도산하자 살길을 찾아서 브라질 이민 길에 올랐다.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용직 막노동뿐이었다. 이노키는 브라질을 방문한 역도산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에 의해 발탁된 걸 천운이라 믿고 혼신을 다해 훈련에 몰두했다. 

 

역도산의 꿈 실현을 위해 생을 바친 이노키

이노키를 극진히 아끼고 정성을 다해 훈련한 사람은 선배 김일이었다. 매우 영리한 이노키는 단숨에 최정상급 선수의 대열에 올랐다. 이노키는 김일, 자이언트 바바 등과 같이 역도산 3대 제자가 됐다.

일본 레슬링계를 주름잡던 이노키는 현역 생활을 접고 정계 진출 준비에 들어간다. 1989년에 ‘스포츠 평화당’을 창당, 참의원에 당선된다. 그는 자신의 정계 입문에 대해 “스승 역도산이 극비 정계 진출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까워 그의 꿈을 대신 이루려 한다”라고 말했다.  

의정활동 중 북일 국교 정상화를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고 이노키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이를 위해 뛰었다. 그는 “자신과 북한을 연결한 매개체는 스승 역도산”이라면서 북한에 대한 애정이 북녘 동포 이상이었다.

생을 마감하기 전 휠체어를 타고서도 방북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평양을 사랑했나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역도산 생전의 꿈 ‘한반도 평화, 북일 수교’를 위해 죽는 최후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래서 그를 의리의 사나이, 위대한 체육인. 평화를 사랑한 정치가라고 평가된다. 

그는 역도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35번을 방북했다. 그가 이룬 스포츠 외교의 가장 빛나는 성과는 스포츠를 통한 평화의 축제였다. 이를 처음 제안했을 때, 북한은 단숨에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김용순 노동당 국제 비서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서 일사천리로 축제가 추진됐다. 즉시 위원회가 꾸려졌다. 이 축제에 역도산이 일본을 열광케 한 프로레슬링을 북한에 소개할 절호의 기회라는 점에서 북한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공식 명칭은 ‘평화를 위한 평양국제체육 및 문화축전’이지만 ‘평화의 제전’이라 즐겨 부른다. 북한은 이 평화의 제전을 기념하기 위해 이노키 사진이 들어간 기념우표까지 발행했다.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와 미국 레슬링계의 거물 릭 플레어를 비롯해 많은 정상급의 운동선수가 평양으로 갔다. 이노키가 링에 올라가 직접 플레어와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상상을 초월한 대성공이었다. 50만 넘는 관중이 몰려들었다. 전 세계에서 관광객과 언론인들 3만 명 이상이 평양을 찾았다. 

▲평화의 제전을 기념해 북한이 제작한 이노키 얼굴이 들어간 기념우표.
▲평화의 제전을 기념해 북한이 제작한 이노키 얼굴이 들어간 기념우표.

전 세계 언론 매체가 일제히 이 행사를 크게 보도 방영했다. 지구촌의 이목이 평양으로 쏠렸다. 이 제전을 계기로 이노키는 세계가 인정하는 명사가 됐고 북한의 신뢰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후 이노키의 방북은 더 잦았다.

매번 잊지 않고 그는 역도산의 핏줄을 찾아보고 특히 역도산의 딸 김영숙을 만나곤 했다. 김영숙은 체육대를 졸업하고 선수 생활을 하다가 결혼했는데 남편은 후일 체육상이 됐다. 역도산 외손녀는 역도선수로 활동하다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북한 역도 감독이었다. 

역도산 증손자 류일훈은 불과 14살에 수준급 선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노키는 평양 유도시합장에 나타나 시합을 끝낸 류일훈의 손을 치켜세우며 격려를 하기도 했다. 역도산의 유전자 때문인지 그의 혈육들이 전부 이름을 날리는 선수였다.

이노키는 역도산 가족만 끔찍이 챙긴 게 아니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거물급 김일(1929-2006)과도 끈끈한 정을 끝까지 이어갔다. 귀국 후 난치병으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던 선배 김일을 정성껏 챙겼다. 

 

인간미가 넘치는 일본인 이노키

전남 섬마을 출신 김일이 어느 날 우연히 일본 잡지에서 역도산 기사를 읽고 즉시 그의 제자가 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아내와 4남매를 두고 56년 밀항을 했다. 체포돼 결국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듬해 1957년 한국으로 강제 추방될 위기에 놓였다.

최후 수단으로 역도산에게 살려달라는 편지를 썼다. 주소를 몰라 역도산이라고만 적었다. 그런데 이것이 전달돼 구원의 손길이 닿았다. 역도산 덕택에 풀려난 김일은 바로 역도산의 제자가 돼서 뼈를 깎는 심정으로 훈련에 돌입했다. 김일은 일약 정상급에 올라섰다.

김일은 유난히 정성을 쏟아 이노키를 지도했다. 두 사람은 남다르게 끈끈한 정이 두터웠다. 이노키는 2000년, 김일을 문안하고 ‘나눔의 집’도 방문했다. 할머니들에게 과거 일본의 잘못을 정중 사과하고 금일봉을 전달했다.

2013년 유신회 참의원에 재당선된 이노키는 같은 당 출신 의원과 같이 평양길에 나섰다. 북일 평화연락사무소 개설, 북일 간 평화교류 사무소 설치, 스포츠 외교를 통한 북일 평화교류 등 다양한 의제를 놓고 북한과 진지하게 논의했다. 북한의 호의적 반응과 달리 일본의 반응은 차가웠다. 

 

역도산이 생존했다면?

2018년 평창올림픽 경기 소식은 이노키를 미치도록 열광케 했다. 즉시 그는 경기 일부를 마식령 스키장에서 개최할 것을 구상했다. 남북 관계 발전에 스포츠가 어떻게 기여할까를 놓고 고민에 들어갔다. 그는 판문점, 싱가포르 선언을 전폭 지지 환영하고 나섰다.

역도산의 꿈을 펼칠 절호의 기회가 찾아들었다고 믿었다. 이게 웬일인가! 트럼프가 2019년 하노이 북미회담을 깨버렸다. 하지만 그는 트럼프에 화살을 돌리지 않고 “제아무리 지독한 제재를 가해도 북핵은 절대 포기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더 자주 했다.

되돌릴 수 없지만, 역도산이 생존하고 있다는 가정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역도산은 계획에 따라 쉽게 정계에 진출하게 돼 있었다. 그를 뒤따라 입성한 이노키와 합세해 의회를 주도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북일관계 개선에 성과를 냈을 것이다. 여세를 몰아 북미관계 개선에 화력을 집중했을 것이다. 따라서 남북관계는 저절로 평화와 번영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는 주변 정치 안보 지형을 바꾸고 나아가 세계평화에 지대한 이바지를 했을 것이다. 

역도산은 우리 민족이 낳은 영웅인 동시에 일본 국민 최대 최고 영웅이다. 역도산 장례식은 어떤 국상보다 더 성대했고 더 많은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또한 그를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한 영화, 문학작품이 남·북·일에서 나왔다. 그가 생존했다면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의 운명이 달라졌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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