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명 칼럼] 군 생활과 인간 재탄생①
상태바
[이기명 칼럼] 군 생활과 인간 재탄생①
  •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
  • 승인 2023.01.03 18: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인간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br>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br>

■ 나는 새로 태어난다.

논산훈련소에 입소해 머리를 빡빡 깎았다. 알코올 중독에 가까웠던 술꾼이 술을 못 마시니 미칠 것 같았지만, 도리가 없다. 모두가 나이 먹은 놈들이다. 기피하던 놈들, 졸업생도 있고 시골 애들도 있다. 선임하사란 자가 훈련병을 한 300명씩 갈라 세운다. 끌려 간 곳이 26연대 1중대다.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선임하사의 구령소리 몇 마디에 흐물흐물하던 훈련병들의 몸이 굳어졌다. 동작이 빨라졌다. 이게 군대로구나. 선임하사가 300여 명을 죽 훑어보더니 너! 너! 하면서 덩치가 있어 보이는 놈들을 골라낸다. 나도 뽑혔다. 그는 뽑힌 훈련병 댓 명에게 지시를 한다. 구령을 부쳐 보라는 것이다. 구호라고 해봐야 ‘차렷 열중쉬어 경례’정도였다. 난 학교서도 간부로 구령도 많이 붙여봤고 덩치도 크고 더구나 목소리가 남달랐다. 크고 우렁찼다. 거기다가 얼마나 잘 생겼는가. ^^.

중대장이 면접을 봤다. 그리고 떨어진 명령은 ‘훈련병 이기명. 넌 오늘부터 1중대 향도다.’

 

■ 훈련병 대장

중대 향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도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훈련병 대장이다. 훈련병 중의 귀족이랄까. 중대는 3개 소대로 편성됐는데 소대 향도가 있고 그들을 포함한 중대원 300명을 지휘하는 것이 중대 향도였다.

책상도 중대장실에 따로 있었다. 침구도 특별했다. 운이 좋구나. 속으로 좋아했다. 며칠 지나보니 중대 향도의 권한은 대단한 것이었다. 일요일 면회·외출도 맘대로 보낼 수 있었다. 비록 훈련병 신분이지만 훈련병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다른 훈련병과 달랐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다. 선임하사가 날 조용히 부르더니 은밀한 지시를 한다.

‘중대 향도, 넌 할 일이 참 많다. 너 하기에 따라 훈련소 생활이 달라진다.’

도대체 내가 할 일이란 무엇인가. 당시에는 훈련소도 불법과 부정이 존재했다. 군대생활은 궁핍 그 자체였고 중대장을 비롯한 인사계 선임하사 등의 주머니는 먼지가 났다.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책무가 내 임무(?)였다. 서울을 비롯한 도시 놈들은 단박에 알아 들었다.

돈을 걷었다. 물론 비밀이다. 제법 액수가 많다. 나도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내 주머니를 채우는 것은 생각 밖이지만, 잘 이용하면 편한 군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인사계를 조용히 만나 봉투를 내밀었다. 눈치 빠른 인사계는 빙긋이 웃었다. 돈의 위력이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훈련병들도 편해졌다. 점호도 심하게 받지 않았다. 중대장이 내게 위임한 권한은 대단한(?) 것이었다.

 

■ 지역감정 타파

당시만 해도 자유당 시대라 밖에서 술을 사다가 내무반에서 마시는 판국이었다. 한데 서울출신이 많은 1·2소대를 제외한 다른 소대는 지방출신들이 많았는데 영남 출신이 호남 출신을 구박하는 것이었다.

지역 차별이다. 원래부터 지역색을 가리는 것이라면 질색인 나는 참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때 사고가 터졌다. 호남 출신 중 부상자가 발생했다. 중대장에게 보고했다. 자칫 큰 사고로 번질지 모른다. 나한테 일임해 달라. 중대장은 내게 전권을 위임했다.

사고 친 놈들을 모두 모았다. 영남과 호남의 숫자가 거의 비슷했다. 내무반 하나를 비웠다.

“이 XX들. 부모고향 떠나 훈련소에서 고생하면서 싸움질이나 해? 더구나 지역 따지며 싸웠다지. XX들 오늘 고향생각 좀 나게 될 거다”

분노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잠을 재우지 않고 굴렸다. 물론 나도 날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새벽 놈들이 모두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내가 마지막 한 말이다.

“토끼 이마빼기만도 못한 작은 나라다. 여기서 지역감정 따지면 네놈들은 어디 가서 살겠느냐.”

나도 눈물이 났다. 모두 소리 내어 울었다. 다음날 이 소문은 중대에 쫙 퍼졌다. 중대장이 날 부르더니 눈을 크게 뜬다. ‘중대 향도. 큰일 했다. 놀랐다.’ 그다음부터 지역갈등은 사라졌고 며칠 후 연대장이 날 불러 칭찬했다. 난 영웅이 됐다. 작은 땅덩이에 지역감정은 정말 망국병이었다.

지역감정은 방송국에서도 겪었다. MB 시절, 방송국 간부들이 하나둘씩 영남 출신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보도국 주요 보직도 영남 차지였다. 물론 방송국장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서 불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당시 KBS는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골병이 들었다. 기자들의 기사는 편파 일색이다. 그 안에서 무슨 소리를 할 수 있는가. 더구나 나는 보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드라마작가다. ‘노차부(老車夫)’, ‘로멘스 빠빠’가 대표작인 김희창 작가와 ‘빨간마후라’, ‘남과북’을 쓰신 한운사 작가를 비롯한 유호·김영수 등 이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모두 KBS에서 집필했다.

이서구 선생의 ‘장희빈’은 완전히 방송드라마 청취를 장악했다. 그 후에도 한운사의 ‘남과북’, 김희창의 ‘또순이’ 등 방송극은 KBS 판이었다. 그러나 보도는 편파 일변도였다. 지금도 편파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기자들의 머리는 언제나 바뀌려는가. 머리를 분해해서 분석해 보고 싶다.

당시 김 모라는 보도국장이 취임했는데 보통 술꾼이 아니었다. 책상 속에 양주병을 두고 근무시간에도 마셨다. 더구나 기자들의 촌지는 일상이었다. 어느 체육부 기자는 촌지를 받아 들고 나와 봉투를 열고 현금을 꺼내 흔들며 ‘애걔 겨우 요거야’ 할 정도였다. 보도국의 신화다. 이름은 안 밝힌다.

그 때 우리 대한민국은 너도 썩고 나도 썩고 모두 썩었다.

지금까지 부지해 온 것이 기적 아닌가. 불쌍한 우리 대한민국. 그래도 난 내 조국을 사랑한다. 조국아 우리 불쌍한 국민을 잊지 말아다오. 윤석열이 잘해 주면 얼마나 좋으랴.

 



주요기사